소백산의 보물을 간직한 산골마을 ‘삼가리’ | ||||||||||||||||||||||||||||||||||||||||||||||||||||||||||||||||||||||||||||||||||||||||||||||||
우리마을 탐방[42] 풍기읍 삼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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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70%가 이북에서 넘어 온 정감록 신봉자 풍기읍 삼가리 가는 길
이곳에서 비로사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샘밭골(1반장 조정호)을 시작으로 교회마을(2반장 최병철), 구판장마을(3반장 송요근), 당골(4반장 황기양), 정안동(5반 이래준), 달밭골 (6반장 최영학) 등 6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달 29일 삼가리에 갔다. 마을 경로당에서 방재혁(85)·김사홍(76)·김석궁(77) 어르신으로부터 십승지 이야기를 들었고, 기춘자(77)·김순분(76)·송인옥(74) 할머니에게는 마을의 내력을 들었다.
마을의 유래 이 마을은 옛 풍기군 서부면(西部面) 욱금리(郁錦理)였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삼가동(三街洞)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을 삼가리라 이름한 이유는 소백산 비로봉을 중심으로 세 갈래 골짜기로 되어있고, 골짜기마다 마을이 산재해 있어 ‘삼가리’라 불렀다 한다. ▲샘밭골은 옛 삼가분교가 있던 마을이다. 욱금리와 지경 지점 밭둑밑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려 샘밭골이라 불렀다. 이 샘은 80년대 도로확장 때 없어졌다. ▲삼가리 본 마을은 교회가 있는 아랫마와 구판장이 있는 웃마로 나누어져 있으며 삼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당골(堂谷)은 본 마을 다음가는 마을로 삼거리에서 서쪽 방향 계곡에 형성된 마을이다. 성황당이 있어 당골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500년 된 방등소나무가 있다. 당골 뒷산으로 오르면 연화봉이고, 서쪽계곡 따라 계속가면 희방목넘이고개다. ▲지안동 또는 정안동(靜安洞)은 당골 방등소나무 가기 전 우측 계곡에 있는 마을이다. 대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소백산 기도원이 있고 계속 오르면 비로봉이다. ‘저-안동네’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정안동이 됐다고 한다. ▲달밭골은 비로사 우측에 있는 마을로 달풀이 많다하여 ‘달밭골’이라 불렀다 한다. 이 골 동남쪽에 있는 넓은 계곡은 삼국시대 때 신라군의 연병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 때는 월전(月田)에 사고(史庫)가 있어 ‘사고터’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이 곳에서 코발트라고 하는 광물을 대동아전쟁 끝무렵까지 채굴했다고 한다. 정감록의 마을 삼가동 그 십승지 중에서 제1승지가 소백산 금계바위를 중심으로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이다. 그 중에서도 삼가동은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소백산 깊은 산속에 숨어있다. 지금 삼가동 주민의 70%가 이북에서 넘어 온 정감록 신봉자의 후손으로 4-5대에 걸쳐 이곳에 살고 있다. 주로 평안남·북도에 살고 있던 이들은 해방 전 1944년부터 6·25(1950년) 전까지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당시 그들은 대동아전쟁의 참상을 보고 들으면서 더 큰 환란(患亂)이 닥칠 것을 예상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닌 살아남는 그 자체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당시 9살 때 평안남도 성천군 통선면 남원리에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정착했다는 김찬익(80) 어르신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고 하면서 “당시 이주민들은 화전(火田)과 숯가마, 나무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죽은 듯 목숨을 부지하고 살았다”고 했다. 김 회장은 또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정안동에 20~30 집, 달밭골에 20~30집 등 삼가동 골짜기에 월남 이주민 200여 호가 살았다”고 말했다.
소백산의 보고(寶庫) 달밭골 비로사 창건 무렵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달밭골은 소백산 비로봉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으며 소백산의 귀한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달밭골에는 소백산자락길의 명소가 된 산골주막이 있다. 탐방객들에게는 ‘자유의 종’이 있는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율계산(무인주막)으로 운영되고 있어 색다른 맛이 난다. 산골주막은 2014년 국립공원 명품마을 조성사업과 손을 잡고 쉼터를 신설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여 쉬어가는 곳에서 묵어가는 곳으로 활용될 계획이어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현재 달밭골에는 8가구 13명이 거주하고 있다. 산골주막 인근에는 100년 전 초막집이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여기서도 한 시간가량 더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하늘을 지붕 삼아 산을 울타리 삼아 살아가고 있는 귀틀집도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방송3사 오지(奧地)담당 작가들이 가장 탐내는 마을이다. 소백산 으뜸 탐방로
고려 태조(왕건)가 다녀간 비로사 비로사는 소백산 비로봉 중턱 삼가리에 위치하고 있다. 680년(문무왕20) 의상조사가 영전사에 거주하면서 문도들과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승 진공이 이 절에 있을 때 고려 태조가 이 곳에 와서 진공의 법문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됐다고 한다. 태조 20년 진공이 입적하자 태조가 직접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비로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의 거점으로 활용되다 전소되어 새로 지었고, 1909년에도 법당 외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남아있는 건물을 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사찰 경내에는 보물 제996호인 아미타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이 적광전에 모셔져 있고 경북 유형문화재 제4호 진공대사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 제7호인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 영주비로사아미타불탱화(제436호) 등 신라 말, 고려 초의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삼가동 사람들 이 마을 양승백 이장은 7년째 이장직을 맡고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문화유산보존협의회 위원이고 국립공원 명품마을(달밭골) 추진위원장이기도 하다. 양 이장은 재임 7년동안 현대식화장실 조성, 건강관리실 설치, 임산물판매소 및 냉동창고 건립, 당골소나무 보호수 지정 등 마을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양 이장은 “최근 현대화 시설을 갖춘 삼가야영장에는 겨울이지만 야영객들이 북적이고 있고 새마음 쉼터, 비로·묘솔캠핑장 등이 문을 열어 힐링중심마을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 원로이신 방재혁(85) 어르신은 “우리 경로당은 매일 점심을 같이 하면서 친교활동과 건강관리,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늘 점심을 준비해 주시는 안방노인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소백산 삼가리에서 구판장을 운영하고 있는 유재화(67)·김순자60)씨 부부는 비로봉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소백산의 인심과 구수한 덕담을 전해주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탐방객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사람으로 명성이 높다. 달밭골에서 산골주막을 경영하고 있는 김진선·류우련 씨 부부는 “실개천 주변에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고 자연 속 쉼터를 마련해 유치원 아이들이 체험학습 올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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