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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43] 안정면 봉암리

단산사람 2015. 8. 26. 19:28
봉암의 전설 교훈삼아 나누고 베푸는 ‘봉암마을’ 사람들
우리마을 탐방[43] 안정면 봉암리
[505호] 2015년 01월 15일 (목) 12:41:09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
  
 봉암마을 전경

삼국시대 고분 200여기, 옛 성터 등 유적 보존
사과 농사 확대, 미나리 작목반 등 소득증대 활발

안정면 봉암리 가는 길

  
 외봉암 전경

서천교에서 풍기방향으로 나뭇고개(木峴)를 넘어 비행활주로를 지난다. 안정면소재지(신전1리)에서 용암산바위공원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안정초 앞을 지나 자동차전용도로 아래를 통과하면 동강매운탕, 쌈모아닭발, 초가집식당 등 별미음식점들이 여럿 보인다. 중앙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면 양계장, 사슴농장, 봉황사 표석 등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봉암리이다.

봉암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람 형상을 한 키 큰 마을표석이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난 6일 오전 봉암리에 갔다. 마침 이날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새해맞이 신년인사회 겸 마을총회를 여는 날이다. 마을회관에서 송인호 이장, 황병일 노인회장, 송갑선 부녀회장 등 여러 어르신을 만나 마을의 형성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의 형성 

  
 마을표석

     

봉암리는 용암산(637m) 동쪽 기슭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1430년 경 풍기진씨가 외봉암과 내봉암 사이에 집성촌을 이루어 크게 번성하며 살았다고 한다. 

양지마 우영하(80) 어르신은 “1470년 경 단양우씨 위하(緯夏) 선조가 영주 용암대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다래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여 양지마 입향조가 됐다”며 “그 후 500년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음지마에 사는 창원황씨 후손들은 “창원황씨가 이곳에 입향한 정확히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00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입양(立陽) 선조가 음지마 인근 산전을 개척하여 삶의 터를 마련했다”고 했다. 

봉암리는 회관이 있는 양지마(단양우씨)와 그 서쪽 위에 있는 음지마(창원황씨)를 내봉암이라 하고 마을 동쪽 초입에 있는 마을을 외봉암이라 한다.  

 

마을의 역사

  
 음지마 전경

옛 문헌에 봉암(鳳岩)이라는 지명은 기록에 없다. 옛 풍기군의 방리(坊里)에 보면 생현리, 부왕리, 송동리, 신전리가 생고개면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주시사에는 봉암리는 풍기군 생현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내봉암, 외봉암을 병합하여 안정면 봉암리가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봉암리 지역은 신라 때에는 기목진(基木鎭), 고려 때는 기주현(基州縣)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때는 풍기군 생고개면(生古介面)에 속한 봉암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봉황대(鳳凰臺)의 교훈

  
 선말샘

옛날 이 마을에 고관대작을 지낸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탁발스님이 이 집에 와서 불경을 외우면서 시주를 청했다. 잠시 후 주인은 “이 집이 어느 집인 줄 알고 시주를 달라 하느냐?”고 호령하면서 하인에게 “이 중놈을 당장 곳간에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끌려가서 감금됐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여러 날을 보낸 스님은 명을 구하기 위해 간계(奸計)를 꾸며 주인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스님은 “이 중놈을 살려만 주신다면 그 은공으로 귀댁이 자손만대의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드리겠다”고 말했다. 욕심에 눈이 먼 주인은 스님의 간계에 현혹되어 스님의 요구사항을 승낙했다. 스님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마을 뒤 저 바위를 깨뜨리면 자자손손이 천추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고했다.

주인은 즉시 가두었던 스님을 석방하고 석공을 동원하여 수 십 일간 바위를 깨뜨리는 작업을 했다. 드디어 바위가 두 개로 갈라짐과 동시에 봉(鳳) 세 마리가 나타나 한 마리는 학가산으로 다른 한 마리는 순흥 비봉산으로 날아가고 남은 한 마리는 다리가 부러져 붉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봉이 날아간 후 욕심 많은 부자는 자손만대의 영화는 고사하고 그 큰 집과 그 많던 재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을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봉이 나왔던 바위라 하여 바위 이름을 봉암(鳳岩)라 하였고 이에 따라 마을 이름도 봉암동이 됐다. 봉암리 사람들은 봉암이 남긴 전설을 교훈으로 삼아 욕심 없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서로 돕고 베풀면서 살아가고 있다.  

 

용암산의 유적

용암산의 옛 이름은 누암산(樓巖山)이다. 옛 문헌에 ‘풍기군 남쪽 십리에 있으며, 일명 무성(蕪城)이라 하는 곳에 옛 성터와 군마를 훈련시키던 치마장(馳馬場)터가 있다. 그 아래에는 울퉁불퉁한 큰 바위 하나가 있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고 그 이름을 봉황대(鳳凰臺)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외봉암 방향으로 용암산에 오르면 산 중턱에 봉황대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해발 428m 위치에 봉암성지(鳳岩城地)가 있다. 주변에서 수습된 기왓장 조각을 확인 결과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일대에는 200여기의 삼국시대 고분이 있다. 일명 ‘고려장(高麗葬)’이라고도 하는 이 고분군은 내부 구조가 잘 보존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 곳에 고분군과 성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군사요충지 또는 막강한 세력이 존재했던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암리 경로당

  
 송인호 이장
  
 황병일 노인회장

1990년대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들이 힘을 모아 지은 마을회관은 경로당을 겸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마을의 주요 행사나 현안을 논의하기도 하고 경로효친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날 경로당 안방에는 김삼순(83), 황정남(87), 장두길(76), 이인순 어르신 등 20여명이 모였고, 경로당 사랑방에는 황병일 노인회장(74), 김천수(71) 총무 등 십 수 명이 모여 마을 부녀회(회장 송갑선)에서 준비한 점심을 함께 하고 있었다. 황 노인회장은 “우리 마을은 주민들 간 협동으로 두레정신을 잘 실천하는 마을”이라며 “봉암이 전해 준 전설을 교훈삼아 나눔과 배풂의 가치를 가장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봉암리 사람들

  
 이인순 할머니
  
 횡정남 할머니

용암산은 돌이 많은 산이다. 그래서 ‘용암산바위공원’이라고도 한다. 500여 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한 선조들은 돌이 많은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 메마른 땅이 지금은 사과재배의 적지가 되어 봉암리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송인호 이장은 마을 현황에 대해 “봉암리는 외봉암에 18호 50명, 양지마 30호에 80명, 음지마 30호에 80명 등 210명이 살고 있다”고 하면서 “세 마을이 화합하고 협력하여 농사를 짓고 있으며, 사과 농사의 확대, 청정미나리 작목반 운영, 특용작물 재배 등 소득증대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항대섭 어르신
  
 김삼순 할머니

이인순 女 노인회장은 “지금은 겨울이라 노인정에서 놀고 쉬는 날이 많지만 봄, 여름, 가을철에는 농사일로 매우 바쁘다”고 말했다.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선말샘을 안내해 주신 김삼순(83) 어르신은 “예전에 이 샘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으며, 40년여 년 전에는 마을이 모두 초가집뿐이었다”고 말했다. 

외봉암의 강현숙(65)씨는 “봉암마을은 전망좋고,

  
 장두길 할머니
  
 우영하 어르신

공기좋고, 조용해서 잠자기 좋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소음이 심해졌다. 마을 앞에 방음벽을 설치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외봉암에는 봉황사(주지 혜상스님)가 있다. 이 절은 자연석 위에 돌탑을 높이 쌓아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이 절 도원스님은 “봉황사는 봉황대 아래에 있으며 앞으로 이 자리에 대한불교화엄조계종 총무원이 들어 설 자리”라고 설명했다.

  
 강현숙 씨
  
송갑선 부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