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선비정신’·‘학자정신’ 곳곳에 스며있네 | ||||||||||||||||||||||||||||||||||||||||||
[기획]드라마 ‘정도전’과 ‘정도전’이 영주에 남긴 흔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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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신암리 부모묘에서 3년 시묘살이...문천서당으로 남아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다. 지난 4일 저녁 드라마 ‘정도전’의 첫 회가 방영된데 어어 3,4회까지 방영됐다. 전국 시청률은 10%대를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고장의 경우 10명 중 3~4명은 시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들의 시청률이 높은 까닭은 정도전이 우리고장 출신이고 지역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5일(일) 2회 방송분 끝 부분에는 삼판서 고택과 제민루가 소개되면서 영주시가지와 서천의 모습도 비춰졌다. 12일 4회 방송에서는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공민왕 사당이 소개됐다. 김형일 ‘정도전’ 드라마 책임프로듀서는 지난해 영주에서 있었던 제작 설명회에서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매주 일요일 방송 마지막 부분을 통해 미니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도심 속 역사 유물, 유적지를 소개한다”며 “이는 사극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것으로 시청자들은 이 방송을 통해 알지 못했던 역사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나다 정도전이 10대 중반이 되었을 때 아버지(정운경. 1304-1366)가 개경으로 벼슬을 옮기자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가 이색의 제자가 됐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정도전은 학문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으며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14살 위인 이색은 정도전을 군자라 칭하며 “존경한다”고 했고 5살 위인 정몽주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했다.
▲ 시묘살이를 했던 이산면 신암리 1개월이 넘도록 산소자리를 구했으나 길지를 얻지 못했다. 하루는 한 자나 되는 눈이 왔는데 이산면 신암리 선영 구내에만 한 점의 눈도 없으므로 그 자리에 장사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에 또 모친(영천 우씨)이 돌아가시니 전후로 3년간 시묘(侍墓,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삶 )살이를 했다. 정도전은 아버지 묘소 앞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상중에도 학문에 전념하는 열정을 보여 줬다. 이 때 남방의 학자들(안비판, 이안렴, 성중서, 김사농, 유판도 등)이 배우러 왔으므로 그들을 잘 가르쳐서 모두 등과시켜 좋은 벼슬에 오르게 했다. 영주향토사연구회 김태환 회장은 “신암리에 있는 문천서당은 정도전이 3년동안 여막살이를 하던 곳으로 상주가 여막에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선비들이 모여들자 강론을 하는 등 후학에 힘썼는데 그 여막이 지금 문천서당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또한 영주에서 시묘살이를 할 때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 질을 정몽주가 보내 준 일이 있었다. 정도전은 그 책을 보내 준 뜻을 새기며 하루에 한장 혹은 반장을 넘기며 정독해 맹자의 진수(眞髓)를 터득했다고 한다. 젊은 정도전에게 민본사상과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교시(敎示)했던 사람이 바로 정몽주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개혁에 대한 의견이 달라 갈라서게 됐다. ▲ 유배 또 유배, 그 때마다 고향에 왔다 1375년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을 맞아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가 나주 회진현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남으로써 개혁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1375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1377년 이후 4년간 고향 영주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삼각산 밑에 집(삼봉재, 三峯齋)을 짓고 글을 가르치니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를 만나 역성혁명의 주역이 된다. 1391년 역성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반대파를 탄핵하려다 도리어 패해 봉화로 유배됐다가 직첩과 녹권을 회수당하고 나주로 이배(移配)된다. 정도전은 봉화에서 나주로 이배 될 때 이별의 시를 남겼다. 北望行行遠(북망행행원)
▲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영웅 다시 귀양지를 광주로 옮겼다가 6월에 조정에서 다시 불러 돌아오게 하여 충의군에 봉했다. 같은 해 7월 위기에 처한 이성계는 반대파의 영수인 정몽주를 격살하고 역성혁명을 성공시켜 이성계를 신왕으로 추대해 조선을 개국했다. 개국 공신이 된 정도전은 제도와 법을 정비하고 유교 덕목을 적용한 새 도읍지 서울의 도시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요동정벌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끝내 선영이 있는 고향 영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운의 영웅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봉화정씨 영주종친회 정동섭 총무는 “참사 당시는 선생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삼봉재 후학들이 시신을 수습해 삼각산 어딘가에 모셨을 것으로 보고 최근까지도 삼각산 근처를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며 “현재 삼봉 기념관이 있는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가묘가 있다. 언젠가는 영주로 모셔 와야 한다”고 말했다.
▲ 그가 남긴 선비정신 그리고 그가 설계하고 디자인한 600년 서울은 오늘도 아름답게 건재하고 있다. 봉화정씨 영주종친회 정종석 회장은 “우리는 드리마 정도전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훈과 지혜를 찾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시민들이 드라마 정도전을 많이 시청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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