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榮州)의 연혁(沿革)
【영천군(榮川郡) 영주의 옛날 이름】
고구려시대(기원전 ? - 668) 내이군(柰已郡 영주의 옛날 이름)이다.
신라시대(기원전 ? - 935) 파사왕(80-111)이 점령하였다.
소지왕 11(489)년 9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해 과현(戈峴 영주시 상망동에서 지누로 넘어 가는 고개)까지 왔다.
경덕왕(742-764)이 내이군(柰已郡)을 내령군(柰靈郡)으로 고쳤다.
고려(918-1392)시대 내령군(柰靈郡)을 강주(剛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구성(龜城)이다.
【순화(淳化 990-994)때에 정한 것이다.】
현종(顯宗) 무오(1018)년에 길주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인종(仁宗) 계해(1143)년에 강주(剛州)를 순안현(順安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高宗) 무오(1258)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순안현(順安縣)을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계사(1413)년 예(例)에 의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를 영천군(榮川郡)으로 승격 하였다.
세조 3(1457)년 11월 29일 부석(浮石)면 수식(水息)면 곶천(串川)면 파문단(破文丹)면을 풍기군(豊基郡)에서 영천군(榮川郡)에 속하게 하였다.
숙종 임술(1682)년 1월 13일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를 복설(復設)하고 부석(浮石)면 수식(水息)면 곶천(串川)면 파문단(破文丹)면을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 돌려주었다.
고종(高宗) 31(1894)년 8월 8도제 시행당시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榮川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2(1895)년 5월 26일 칙령 제 28호(1895. 5. 26)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영천군(榮川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3(1896)년 8월 4일 칙령 제 36호(1896. 8. 4)로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榮川郡)이 되었다.
1906년 1월 19일 임지면(林只面)을 봉화군(奉化郡)에 부쳤다.
1913년 1월 총독부령 제 39호로 북면(北面) 오록리(梧麓里)를 순흥군(順興郡)에 부쳤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 111호(1913. 12. 29일 공포)로 순흥군(順興郡)과 풍기군(豊基郡)을 폐지하여 영천군(榮川郡)에 붙이고 영주군(榮州郡)이라 불렀다.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고구려시대(기원전?-668) 급벌산군(及伐山郡)이였다.
사적 238호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 고분벽화 발견.
사적 313호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 고분벽화 발견.
신라시대(기원전?-935) 급벌산군(及伐山郡)을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다.
문무왕 16(676)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급산군(岌山郡) 부석면 북지리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 하였다.
고려시대(918-1392) 급산군(岌山郡)을 흥주(興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순정(順政)이다.
【순화(淳化 990-994)때에 정한 것이다.】
명종(明宗) 1(117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려 갑술(1274)년에 충렬왕(忠烈王)의 태(胎)를 소백산 태봉(胎峰)에 안치하였다.
흥주(興州)를 흥령현(興寧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려 계축(1313)년에 충숙왕(忠潚王)의 태(胎)를 소백산 경원봉(慶元
峰)에 안치하였다.
흥령현(興寧縣)을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 하였다.
고려 무자(1348)년에 충목왕(忠穆王)의 태(胎)를 소백산 욱금동(郁錦洞)에 안치하였다.
지흥주사(知興州事)를 순흥부(順興府)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계사(1413)년 예(例)에 의하여 순흥부(順興府)를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고쳤다.
소헌왕후(세종의 왕후 심씨)의 태(胎)를 소백산 윤암봉(輪岩峰)에 안치하였다.
세조(世祖) 3(1457)년 6월 27일 단종복위 의거 사전에 들통이 났다.
세조(世祖) 3(1457)년 8월 2일 순흥 고을을 폐지하면서 풍기군(豊基郡)에 부쳤다.
순흥도호부 복설된후 풍기군(豊基郡) 영천군(榮川郡) 봉화현(奉化縣) 각 지역에 분할되었던 땅들은 되돌려 받았다.
순조(純祖) 29(1829)년 고을백성의 강상변고로 순흥현으로 격하되었다.
헌종(憲宗) 2(1836)년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회복되었다.
고종(高宗) 31(1894)년 8월 8도제 시행당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를 순흥군으로 고쳐서 경상도(慶尙道) 순흥군(順興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2(1895)년 5월 26일 칙령 제 28호(1895. 5. 26)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순흥군(順興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3(1896)년 8월 4일 칙령 제 36호(1896. 8. 4)로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순흥군(順興郡)이 되었다.
1906년 1월 19일 와단면(臥丹面)을 봉화군(奉化郡)에 부쳤다.
1913년 1월 총독부령(總督府令) 제 39호로 영천군(榮川郡) 북면(北面) 오록리(梧麓里)를 편입하였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 111호(1913. 12. 29일 공포)로 수식면(水息面) 수민단면(壽民丹面) 화천면(花川面) 곶천면(串川면) 파문단면(破文丹面) 북면(北面) 오록리(梧麓里)를 봉화군(奉化郡)에 붙이고 나머지는 영천군(榮川郡)에 붙이고 영주군(榮州郡)이라 불렀다.
【기천현(基川縣) 풍기의 옛날 이름】
신라시대(기원전 ? - 935)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혹(或)은 기목진(基木鎭)이라고 한다.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158)년 3월에 죽죽(竹竹)에 의하여 죽령 길을 열었다.
선덕왕 12(643)년에 두운대사(枓雲大師)가 기목진(基木鎭) 수철리에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하였다.
고려시대(918-1392) 기목진(基木鎭)을 기주(基州)라 불렀다.
별호(別號)는 영정(永定)이다.
또는 안정(安定)이라고 한다.
【순화(淳化 990-994)때에 정한 것이다.】
현종(顯宗) 무오(1018)년에 길주 임내(任內) 에 붙였다가 명종(明宗) 임진(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다시 안동(安東)에 붙였다가 공양왕(恭讓王) 경오(1390)년에 다시 감
무(監務)를 두고 안동 임내 은풍현(殷豊縣)을 기주(基州)에 붙였다.
조선 태종(太宗) 계사(1413)년 예(例)에 의하여 기주(基州)를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문종(文宗)의 태(胎)를 소백산 명봉산에 안치하였다.
문종(文宗) 즉위(1450)년 7월 26일 은풍현(殷豊縣)과 기천현(基川縣)을 합하여 풍기군(豊基郡)이라 하였다.
세조 3(1457)년 8월 2일 금성대군을 따른 순흥부를 풍기군에 붙이고 호장·장교 등을 벌하게 하였다.
세조 3(1457)년 11월 29일 경상도 관찰사의 건의로 풍기군의 관할 지역을 조정하다.
순흥도호부 복설된후 풍기군(豊基郡) 영천군(榮川郡) 봉화현(奉化縣) 각 지역에 분할되었던 땅들은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 돌려주었다.
고종(高宗) 31(1894)년 8월 8도제 시행당시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2(1895)년 5월 26일 칙령 제 28호(1895. 5. 26)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풍기군(豊基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3(1896)년 8월 4일 칙령 제 36호(1896. 8. 4)로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풍기군(豊基郡)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 111호(1913. 12. 29일 공포)로 풍기군(豊基郡)을 영천군(榮川郡)에 붙이고 영주군(榮州郡)이라 불렀다.
문수초 29회동창화 카페에서 박세우 선생의 글을 복사해옴 (2013.10.17)
'영주사랑 이야기 > 영주의 역사&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도전의 호 ‘삼봉’은 도담삼봉이 아니다 (0) | 2014.04.04 |
---|---|
정도전이 영주에 남긴 흔적 (0) | 2014.01.20 |
장윤석 의원, ‘국제문화관광산업연구포럼’ 개최 (0) | 2013.07.04 |
배순의 정려비 (0) | 2013.01.28 |
[스크랩] 삼판서 고택 이야기 (0) | 2012.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