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영주의 역사&인물

풍기군의 역사

단산사람 2017. 3. 1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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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의 역사

 


[연혁]


삼국시대

 ▶ 고구려의 내기군 및 급벌산군

 ▶ 신라의 파사왕이 점령,

신라로 복속;(AD100 무렵)


통일신라시대

 ▶ 내기군을 내령군으로 개칭

 ▶ 풍기지역에 기목진 설치

 
고려시대

 ▶ 기목진을 기주로, 급산군을 흥주로 개칭(995)

 ▶ 내령군을 강주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순안으로 개칭(1143)

 ▶ 급벌산군은 흥주로 하였다가 다시 순정으로 개칭

 ▶ 순흥을 부로 승격(1258)

 
조선시대

 ▶ 순안을 영주로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으며, 기주는기천현으로 개칭

 ▶ 문종의 안태지로 은풍, 기주 두 고을의 이름을 따 풍기로 개칭

 ▶ 순흥을 도호부로 승격(1413)

 ▶ 순흥도호부는 폐부, 영천군, 풍기군, 봉화군에 분리 편입(1458)

 ▶ 순흥도호부 부활(1683)

 ▶ 칙령98호로 안동부 관할(고종32년)

 

 

현대


1914

옛 풍기군 동부면, 서부면과 순흥부의 창락면을 합쳐 3개 면과 옛 풍기군 와룡동면의 전구리를 편입시켜 영주군 풍기면으로 되었다.


1952

행정 간소화시책으로 종전의 구를 없애고 14개 동으로 합동하여 책임자를 마을주민들이 선출하고 동장으로 개칭하였다.


1953

떨어져 있던 주민들 사이에 협동심의 부족으로 행정수행상 지장이 많아 종전대로 다시 분동되었다.


1970

본면관내 동부 2동이 인구가 증가하여 동부 2동과 6동으로 갈라 놓았다.


1973

풍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

영주읍이 시로 승격됨으로 영주군이 영풍군으로 개칭되면서 풍기읍이 분군의 중심지로 군의 모든 행사는 풍기에서 행해졌다.


1990

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시지역은 동으로, 읍면 지역은 리로 통일하였다.

풍기는 리로 개칭함과 동시에 백3동을 백1리에 편입시켰다.


1995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통합 영주시 풍기읍으로 개칭되었다.

 

 

 

[행정구역]

30개리 204개반(자연부락 59)

 

성내1~4리, 동부1~6리, 산법리, 미곡리, 삼가리, 욱금리, 금계1~2리, 교촌1~2리, 서부1~3리, 백1~2리, 백신1~2리, 창락1~2리, 수철리, 전구1~2리

 
[총면적]

75, 92㎢(농지 12, 1. 임야 57, 3. 기타 6,52)

 
[총인구]

5,118세대 12,910명(남6,459, 여 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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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지역 역사

 

 

우리고장에는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나 유물로는 아직 알려지거나 발견된 예가 없지만 구석시 시대나 신석기 시대가 상당히 오랜 기간인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은 발견된 것이 있다. 우리고장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로는 안정면 안심동에서 출토된 반달돌칼이 대표적이다. 신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시작된 농경생활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벼농사가 시작됨으로써 생산력긍 더욱 높아지고 각종 농기구도 더욱 발달하였다. 우리고장에서 출토된 반달 돌칼을 가을에 이삭을 잘라 추수하던 청동기 시대 대표적 농기구이다.

 
특히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은 보통 2내지 4개의 굄돌을 세우고 돌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평평한 덮개 돌을 얹어 놓은 것이 전형적이다. (북방식)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굄돌이 낮거나 굄돌이 아예 없고 덮개 돌만 있는 것도 있다. 휴천1동의 고인돌은 북방식과 남방식의 중간적인 형태로 추정된다. 그런데 규모가 큰 수십톤의 덮개 돌과 굄돌을 운반하고 설치하기까지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고인돌은 지배층의 정치권력을 잘 반영해주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이다.


고인돌은 교촌리 141-1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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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시대 지역역사

 

 

진한의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중앙 집권을 이룩 국가였다.

가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립하던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을 하였다.

 

백제와 동맹 관계에 있던 왜구가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으로 물리치기도 했다. 따라서 적어도 5세기 중엽까지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우리 고장 순흥면 비봉산에서 발굴된 어숙묘 고분 벽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지역이 적어도 6세기 중엽(550년)이전까지는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 때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 이북을 점령하고 단양 적성비를 세웠다. 이로써 경북 지방의 북쪽 경계선에 있는 영주시, 봉화군 일대가 완전히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죽령은 고구려와 신라간에 쟁탈의 표적이었으며 고구려 명장 온달이 빼앗긴 땅 회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기도 하였고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침략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고구려 보장왕은 죽령을 반환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마저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한강 유역의 장악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 중국과 직접 통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처럼 우리 고장을 둘러싸고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각축을 벌였으며 이 지역의 장악은 세력 판도를 좌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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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고려) 지역사

 

 

1.약사


기목진은 다시 기주(基州)라 개칭 하였으며, 성종 14년(995)에 奈靈郡은 강주군(剛州郡)으로 개칭하여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급산군은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순정(順政)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현종 9년(1018)에는 강주, 흥주, 기주가 모두 지금의 안동인 길주(吉州)에 속하게 되었으며, 인종 21년(1143)에 강주는 순안군(順安郡)으로 개편하고 흥주는 순안군에 이속(移屬)하였다.

 
그후 순안군에 이속되었던 흥주는 충렬왕(忠烈王)의 안태지(安胎地)가 되면서 흥령현(興寧縣)이 되었으나 충숙왕(忠肅王)의 안태지가 되므로써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되었다. 그후 충목왕(忠穆王)의 안태지가 되면서 순흥부(順興府)로 승격(1348)되었다.

 
한편 순안군은 위사공신(偉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고향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되었다. 기주는 고려말 공양왕때 은풍을 예속시켜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이 되었다.

 


2. 평설


왜구가 우리 나라에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였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초 고종 10년(1223) 5월에 김해에 침입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략질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는 충정왕(1349∼1351) 이후의 일이며 그후 우왕 때에 왜구의 침입은 거의 절정에 이르러 재위 14년간 무려 378회나 되었다. 이들 왜구의 침입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식량의 약탈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의 노략이었다.

 


우리 고장에 왜구가 침입한 것 중 주요한 것만 골라 보면,

 

우왕 8년 3월에 순흥에 침입하였으며

4월에 풍기를 거쳐 단양으로 침략하였으나 변안렬이 왜구를 쳐부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적극적인 왜구 토벌책을 시행하여 많은 왜구를 소탕하였다.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와 소탕을 위한 방법은 주로 화포의 사용과 성(城)의 축조였다. 대체로 해안 지방에서는 화포를 사용하였고

우리 고장과 같은 내륙 지방에서는 성을 쌓아서 방비도 하고 격퇴도 시켰다.

 

 

- 효자각 -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있다. 선효각이라고도 하며 고려 공민왕 때 문재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후 이 마을을 '효자리'라고 하였다 한다.

 
한편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성리학은 처음 소학을 중심으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윤리를 중요시하는 면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연구하는 철학적인 면이 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성리학을 처음 전래한 학자는 우리 고장 출신인 안향이었다. 그후 경북 지역에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는 무신 집권기와 몽고의 침입 기간이었다. 이때 개경 문벌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상층 향리 자제가 군공과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특히 몽고 침입으로 이를 피하기 가장 좋은 곳이 우리 고장인 소백산맥 이남의 산간 분지였다. 이때 우리 고장을 본관으로 하는 호장들은 주민을 독려하여 몽고와 항전을 계속하였고, 강화도로 천도한 최씨 정권은 이들의 군공을 인정해 주거나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우리 고장의 상층 향리는 신진 사대부로 지배층 속에 포함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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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시대(조선) 지역사

 


1. 약사


지영주사는 태종 13년(1413)에 순안군을 영천군(榮川郡)으로 개칭하고 군수(郡守:종4품)와 六房을 두었다.

 
순흥부는 태종 13년(1413)에 순흥도호부가 되고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이라 하였으며 도호부사(都護府使:정4품)를 두었다.

 
한편 기주는 5대 문종의 안태지가 되자 은풍(殷豊)과 기천(基川)의 양이름을 따서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순흥도호부는 세조 3년(1458)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금성대군(錦城大軍)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실패함으로써 폐부가 되고 이지역은 영천군, 풍기군, 봉화현에 각각 활속(割屬) 되었다.


그후 225년만인 숙종 9년(1683)에 다시 순흥도호부로 복설되었으나 고종 32년(1895) 순흥도호부를 폐지하고 순흥군으로 개편되었다.

 


2. 평설

 

조선 건국의 주체 세력인 사대부와 신흥 무인들은 사상적으로는 숭유 억불(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함)을, 대외 정책으로는 친명 배원(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원나라를 멀리함)을 표방하였으며 사회 경제적으로는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말 권문세족의 기반을 정리하여 재분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우리 고장 출신인 정도전은 다른 조선 건국 세력과 함께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과 지배 기구를 마련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우리 고장은 큰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5세기 세조는 계유정난(1453)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과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사육신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우리 고장 순흥에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이 순흥 부사 이보흠과 순흥 영주의 지방 세력을 모아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이에 관련되어 많은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 고장 순흥부는 관아 창고들이 파괴되었고 영주, 풍기, 봉화 3읍에 분할 귀속되어 완전 폐읍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유학 교육을 위한 기구로는 관학으로서 중앙에 성균관과 4부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였으며 그 외 사학으로서 서당, 서원 등이 설치되어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우리 고장에도 풍기향교 등이 설립되어 있었고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순흥면 내죽리에 설립되었다.

 
서당도 17세기에 순흥에만 14개가 세워졌을 정도로 우리 고장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 교육적 기능이 뛰어난 곳이었다. 16세기말 조선은 왜란이라는 큰 고비를 맞게 된다. 지배층의 분열이 국력의 쇠퇴를 가져와 조선은 한 때 전 국토가 유린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전국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의병이 조직되어 많은 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목사였던 오운이 의병 대장인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김대현, 곽수지 등은 김륵과 함께 김성일과 서로 연락을 하여 역시 의병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7년에 걸친 왜란은 우리 나라에 큰 피해를 안겼다. 그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극심한 지역은 경상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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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지역사

 

 

1.약사

 

1914. 3. 1 부령 제111호(1913. 12. 29)로 행정구역 개편(府·郡制 통폐합)에 의하여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 영주군 (11개면)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당시 풍기군의 관할이었던 상리(上里), 하리(下里)는 지역적인 관계로 예천군으로 편입되고 순흥군의 수식(水息), 수민단면(水民丹面)은 봉화군으로 각기 편입이 되었다.

 

 
2 평설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우리 고장에서 펼쳐졌던 항일 운동을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의병운동


한말 의병운동은 대략 3기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 :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로 인한 의병 운동으로 우리 고장 출신 의병장으로는 장복규가 충북 제천에서 서상렬과 함께 싸우다 일경에 체포되어 전사하였다.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전국민의 궐기를 위하여 유림에 전달된 통문에 의거 1896년(병신)정월초에 영주, 풍기, 순흥 각향중에서는 향회(鄕會)를 열고 일제침략의 토벌문(討伐文)을 각 문중으로 격문(檄文)을 보내니 의거원병(義擧援兵)이 구름같이 모였다. 대개, 당시는 사림(士林)의 망사(望士)로 조직되었으나 하부에 전투할 의사가 수없이 많았다


② 제2기 :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인한 의병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일제(日帝)에 대한 항쟁(抗爭)이 일어나 1906년에서 1910년까지 5년간 왜병과 접전하여 서로가 수많은 생명과 재산의 피해를 냈다.

 

의병이라 하여 여기서내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고, 우리고장은 3개도의 경계선과 천년요새 소,태백산을 등지고 있다.

 
그러므로 멀리로는 강원도 삼척 강릉방면, 충청도 제천 단양방면, 울진 영해 영덕 동해방면과 문경 예천 용궁방면, 안동 영주방면, 풍기 순흥 소백산방면, 봉화 영양 청송 일월산 방면등 전투상황과 규모에 따라 각지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의병의 지휘자 및 병력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소백산 순흥, 풍기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순흥면 지동리 옛 학교 자리에 왜군이 소백산전투에서 전사한 왜군 병사의 위령비를 세웠으나 해방 이후 철거한 적이 있다. 또 안정면 동촌리에 살던 박수석은 의병 활동을 하다 배신자의 밀고로 1913년 영주 헌병대로 압송 도중 고현리에서 총살당하였다.

 
③ 제3기 :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한 의병 운동으로 1, 2기와 달리 어느 정도의 병력과 조직을 갖추어 대규모적인 항전을 감행하였다. 우리 고장에서는 탁지부 주사로 있던 서재승(현재 백산서원에 배향)이 경기도 지방에서 다년간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도중 풍기 창락에서 총살당하였다.


향토 유림의 파리 강화회의 사건


상해에서 동포 수백 인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조직하고 있을 때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는 것을 듣고 성주 출신 김창숙이 경남·북 유림 백여 명의 연서로 한 청원서를 파리로 보내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137인이 체포되었다. 그 중 김동진(부석면 상석리), 권상두(영주시 하망동), 정태진(영주시 상줄리) 등이 우리 고장의 인사였다. 그리고 의열단 단원으로 활약하다 체포된 송영호도 우리 고장의 인사이다.

 

풍기 광복단 활동


1913년 풍기의 채기중의사가 중심으로 류장열, 류창순, 한군, 강병수, 김병열, 김종한, 정만교, 김상옥, 장두환, 황상규, 임세규, 이각, 대구의 박상진, 양제안, 우재룡등 의병에 몸바쳐온 팔도의 의사들을 이곳 풍기에 모아 조직한 국내 최초의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 대한광복단을 조직은 그 활동 범위가 전국적으로 넓혀갔다.


1915년에는 대구의 박상진 의사가 이끄는 조선국권회복단과 병합하여 전국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고 그 명칭을 ‘대한광복단’으로 하였다. 영주의 대동상점을 비롯하여 대구의 상덕태상회, 서울의 남일여관 등 전국에 100여개의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군자금 모금, 비밀 폭동, 암살 혁명 봉기를 비롯하여 김좌진 장군과 신홍학교의 독립군 기지 사업 등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서울에 독립의군부 중앙순무총장을 두고 각도에 도순무총장을 각군에 군수, 면에는 향장을 배치하고 총독부 관재 기구와도 맞서는 임시정부 형태의 조직을 갖추고 조선의 국권회복에 활약하던 독립의용군 사건은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일제히 검거되어 어수선할 무렵 풍기와 대구에서 죽음을 맹서한 애국동지들이 광복단을 조직하여 지하운동에 나서고 있었다.

 

때마침 대구 지방에서도 비밀결사로 독립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풍기와 대구는 서로 접선하여 드디어 광복회란 이름으로 통일하고 일본의 침략세력을 이 나라 강토에서 몰아낼때까지 죽음으로 싸울 것을 선언문에 기록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울라디보스크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여업회와 부인회에도 사람을 보내 접선했고 북만주 홍안령산맥 기슭에 강력한 독립군을 1916년에 노백린,김좌진,신현대, 윤홍중등을 가입시켜 광복단이라 개칭하였다.


이들은 수백명의 단원을 포섭하여 확장하고 선언문을 발표하고 한편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18년 이탈자의 밀고로 조직망이 발각되고 수많은 의사들이 일제의 형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 유지는 헛되지 않아 이듬해 3.1만세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남은 의사들은 수비단, 암살단, 의열단 등에 흩어져 광복을 맞기까지 계속 피흘려 싸웠다.

 
이에따라 동양대학교의 동편에 광복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3.1운동후에는 김상옥, 한군, 김동순등 20여명의 암살단을 파견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였고, 임세규는 서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 참 고 문 헌> * 영주군지 * 대한국사연보

* 향토교육자료 * 경북경찰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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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지역역사

 


1.약사


1952

행정 간소화시책으로 종전의 구를 없애고 14개 동으로 합동하여 책임자를 마을주민들이 선출하고 동장으로 개칭하였다.


1953

떨어져 있던 주민들 사이에 협동심의 부족으로 행정수행상 지장이 많아 종전대로 다시 분동되었다.


1970

본면관내 동부 2동이 인구가 증가하여 동부 2동과 6동으로 갈라 놓았다.


1973 풍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

영주읍이 시로 승격됨으로 영주군이 영풍군으로 개칭되면서 풍기읍이 분군의 중심지로 군의 모든 행사는 풍기에서 행해졌다.


1990

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시지역은 동으로, 읍면 지역은 리로 통일하였다.

풍기는 리로 개칭함과 동시에 백3동을 백1리에 편입시켰다.


1995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통합 영주시 풍기읍으로 개칭되었다

 

 

2. 평설


이중환의‘택리지’를 읽다보면 그의 대담성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역을 평하는데 있어 그는 조금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한다.

 
가령 태백산과 소백산을 가리키는 ‘이백(二白)’의 남쪽에 있는 예안·안동·순흥·영천(현재의 영주시)·예천에 대해서는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라고까지 했다. 그저 살만한 곳이 아니라 “신이 알려준 곳”으로 극찬했다. 그중 한 곳인 오늘날 영주시 풍기읍에 대해 살펴본다. 이곳에 대한‘택리지’의 언급은‘욱금동(郁錦洞)’이란 골짜기의 평에서 엿볼 수 있다. “소백산에 욱금동이 있는데 천석(泉石)의 훌륭한 경치가 수십리”라고 했다. 글의 말미에 이른바 십승지적 표현으로 “병란을 면하는데 가장 좋다”고 덧붙였다. 이런 표현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의 첫째가 풍기읍이라고 지적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 말 한반도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휘말리면서 풍기에는 외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개 비결서에서 말하는‘병란의 참화’를 피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주민들의 대부분은 그때 이곳으로 온 사람들의 2세거나 3세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풍기를 두고‘작은 서울’이라고 부른다. 풍기의 토산품인 인삼이나 직조물은 대개 그 당시 모인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마련한 사업이 기초가 됐다. 인삼은 여전히 옛날과 다름없지만 직조업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로 사양화했다. 대신 풍기에서도 대구지역처럼 사과밭이 많아졌다. 죽령을 넘어서면 국도변 어디서나 사과밭을 보게 된다.

 

풍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마을이 ‘십승지’라고 믿는 점이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풍기 금계촌이나 ‘택리지’의 욱금동이 그중 대표적인 경쟁지다. 속설에 풍기의 십승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돌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바람이 없어야 한다. 셋째는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십승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조건은 모두 죽령과 관계있다. 소백산에서 속리산으로 넘어가는 맥을 이어주는 죽령은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또 죽령을 경과해야 서울이든 영남으로 통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풍기는 사람이 숨어 살 곳이 아니라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는 셈이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은 바로 이런 점을 의식해 붙여진 것이라고 하겠다. 돌은 대개 냇가에 많다. 죽령에서 발원하는 남원천은 국도를 따라 흐른다. 또 바람 역시 물길 따라 불게 마련이다. 그래서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대로에서 벗어나 숨은 마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금계동이나 욱금동은 모두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자연히 서로 십승지라고 다툴 수밖에 없다.


지난 60, 70년대 풍기는 영풍군(오늘날 영주시)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풍기에서는 게으르지만 않으면 굶어죽는 법이 없다고까지 했다. 인삼과 직조업의 번성으로 군 전체의 경제를 책임졌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해 지금은 군청 소재지였던 영주읍에 군 이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2000년대 초 중앙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면 풍기는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된다. 과거의 은둔적인 십승지가 아니라 영남 제1의 전원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다. 또 ‘사람의 씨를 보존한다’는 소백산이 곁에 있는 한 교육 도시로 각광받게 될 것이다.


[출처] 풍기의 역사 (순흥안씨 문숙공파 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