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문화유산보존회 2013년 11월 답사
속칭 ‘왕머리’(평은면 강동2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쳐들어온 홍건적의 난(1361년)을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족보가 있는 마을이다.
여기에 있는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2005년 1월10일 지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지난 23일 오후 왕유동 마애상에 햇살이 비칠 무렵 영주 향토사학자들과 이곳에 도착하여 그 내력을 알아보려고 오랜 시간 머물렀다.
약 6미터 정도의 높은 크기에 약간 뒤로 누운 상태로 거의 수직으로 선 입상은 크기가 대형 마애불로 보였다.
이 석상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기독교상’이냐 ‘불상’이냐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도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애보살입상, 분처바위, 도마상 등 이름이 여러가지이다.
영주문화유산보존회원들이 석상 주변 청소를 하고 있다.
손모양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위에 올려놓고 있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위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불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조각 기법이라고 하네요.
손모양 자세히 관찰하기
히브리어로 '도마'라고 합니다.
네모나 보이는 글자가 히브리어입니다.이것을 도마라고 읽어야되는지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양이
사실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문가의 연구에 의하면 히브리어가 맞고 '도마의 손과 눈'이라고 해석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추정하기를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모양만 흉내만 내어서 팠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글쎄요?
어떤이는 이것을 고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 알파벳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야간 여러가지 비밀이 많은 바위입니다.
나이롱 사학자들이 탁본한답시고 먹칠을 해서 바위를 다버렸어요.
보기가 흉하네요.
발가락 모양/부처상에서는 발가락을 조각한 예가 없다고 합니다.
발가락 밑에 여러가지 문양이 있은데 잘 모르겠어요.
분처상 앞에 나무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기독교 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차대기가 아주 협소해요.
인근에 차 2대라도 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가을이 남아있네요.
한 소녀가 마지막 남은 가을을 따고 있다.
감은 이렇게 까치밥으로 남아 겨울을 보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주댐 견학
동호정
동호정
영주댐이 완공되면 물 속으로 사라질 장소에 있다.
영주에서 평은면을 지나 예고개를오르기 전 도로 좌측에 있다. 수몰로 사람들은 떠나고 그곳에 자리한
'동호정'은 한가로이 보인다. 그런데 동호정은 염소가 잘 지키고 있었다.
동호정(東湖亭)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영주의 남쪽, 금강(錦江 : 내성천乃城川)의 동쪽, 영지산(靈芝山)
서쪽에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호정은 배현봉(裵顯奉)이 그의 부친 배상길(裵相吉, 1864~1942)을 위해 세웠다.
동호공 배상길은 한말 1864년 정월에 강동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는 사현(士賢), 호는 문일(文日)이며, 흥해배씨이다. 부친은 배만보(裵萬輔)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모친은 예천임씨로 3남을 두었는데 상길은 2남이다.
염소똥
동호정 옆 발굴지/영주댐 순환도로 공사로 인한 지표조사 발굴지임
옛 절터인가? 집터인가?
평은리 양지암
안동에서 옹천을 지나 두 개의 터널을 지나고 영주로 향하다보면 자동차 전용도로 우측에
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지날 때마다 저기에 꼭 가봐야지! 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날(2013.11.23) 답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도로변에 있어 오면 가면 볼 수 있지만 이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깊고 깊은 산골짝 막장에 있었다.
평은면사무소에서 영주방향으로 가다가 평은리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영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강둑으로 조금내려가다가 좌회전하여 고불고불 산길 산모롱이를 지나
산골 깊숙히 들어가면 자동자전용도로 아래 굴을 통과하면 바로 양지암 앞에 다다른다.
지금은 자
정면에서 본 수우당의 모습
수우당 뒤 본채가 양지암인 것 같음
- 평은리 양지암
- 민속문화재 제152호
- 조선시대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1515
- 지정일자 : 12.10.22.
이 건물은 조선 명종 1년(1546) 부장공 김언광의 묘소수호를 위해 건립한 재사이다.
김언광은 딸만 셋이 있어(첫째 사위 의성 김씨 김인, 둘째 사위 청도 김씨 김봉상, 셋째 사위 고령 박씨 박대령) 유명에 의하여 외손 봉사하게 되었다. 그후 인조 16년(1638)에 재실은 무너지고 사당만 남게 되자 김인의 5대손인 만휴와 박대령의 후손인 정량이 숙종 13년(1687)에 중건하였다.
건물은 양지암마을 좌측편 야산자락에 남향하고 있다. 전면에는 경사진 대지에 중층 루각건물인 수우당을 배치하고, 그 뒤편 한단 높은 축대위에 양지암과 대문간, 유사실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양지암은 정면 4칸, 측면 2칸 납도리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큰방 2통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정지 2통칸, 우측에 온돌방 1칸, 도장방 1칸이 앞·뒤로 놓여 있다. 큰방 2칸은 앞·뒤로 퇴간을 두었는데, 앞쪽에 툇마루를 깔았고 뒤쪽은 통로 1칸에 제수방 1칸을 두었다. 정지는 내정으로 개방되어 있고, 도장방은 우물마루 바닥에 큰방쪽으로 문을 내어 이용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높이 5척 가량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재실 건축으로는 특이하게 2고주 5량가이고, 정지상부는 3량가로 꾸몄다.
지붕은 안방부분은 맞배지붕이고, 양측은 가작지붕을 설치한 공자형 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수우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몰익공계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루하층을 통로와 창고로 사용하고, 루상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안마당을 제외한 삼면에 판벽을 치고 쌍여닫이 띠장 널문을 달아 놓았다. 특히 어칸에는 영쌍창을 설치한 홈 흔적이 남아 있고, 각칸의 창호폭은 조금씩 틀리다. 주상은 몰익공으로 꾸미고, 창방과 정혀사이에는 소로 2개씩 수장시켰다. 상부가구는 건실한 굴도리 5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유사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굴도리 익공계이다. 전면주상은 첨자가 있는 이익공이고, 후면은 몰익공이다. 대문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문을 내고 양측은 온돌방을 꾸몄다.
안채
수우당 안
부엌
안채서 내려다 본 마당과 수우당
수우당과 안마당
수우당 안쪽/우측 창호가 눈길을 끈다.
동쪽 측면
야성송씨 괴동재사(冶城宋氏 槐洞齋舍)
- 문화재자료 제546호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262
- 지정일자 : '08. 12. 29
이 재사는 야성 송씨(冶城 宋氏) 시조인 맹영(孟英)의 14대손인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낸 윤(綸)의 제단(祭壇)과 그의 아들인 석충(碩忠)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소수호를 위해 1716년에 건립되었다.
송석충의 자(字)는 원로(元老), 호(號)는 눌재(訥齋)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成宗) 8년(147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금남(錦南) 최부(崔溥)등 당대의 명현들과 깊게 교류하면서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를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의 정치․사회적 폐단을 개혁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냈던 사림파의 초기 구성원으로 활동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영주로 낙향하여 영주의 입향조가 되었다.
재사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자형 가옥으로 경북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소박하고 검소하다. 상부가구는 견실한 3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안마당
안채 모습
오래된 마루, 구멍난 마루짱
뒷쪽 모습
이 괴동재사는 영주댐 수몰지구로 이보다 조금 높은 지역으로 이전 건축된다고 한다.
좋은 소식 GNπ http://blog.daum.net/lwss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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