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삼릉 태실문화(西三陵胎室文化)
문 정 조 (010-4818-7809)
Ⅰ. 머리말
「이조실록」에ꡒ태를 편안히 모시는 제도는 옛날예법에는 보이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에 태를 묻고 태봉이라 하다.ꡓ,「영조대왕태실가봉의(胎室加封儀)」에ꡒ태실에 돌난간설치의식절차,경위,과정 등의 기록ꡓ,「정조대왕태실가봉의괴(軌)」에ꡒ석난간배설도의 존재ꡓ,「경국대전의 병전잡류(兵典雜類)」에ꡒ선왕선왕후의 태실에 4명, 대전 왕비의 태실에 각 8명, 왕세자에 4명의 태실간수를 둔다.ꡓ,「조선왕조실록」에ꡒ태실이 조성된 현(縣)은 군(郡)으로 승격된다.ꡓ등의 기록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부터이다.
그러나 태실문화는 한반도에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그 문화의 형태가 비록 원시적이라 하더라도 있어왔으리라 여겨진다. 그 이후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도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되어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내지 취급하던 풍습이 있어왔다. 예로,「세종실록지리지」와「삼국사기」에ꡒ진천현 태령산에는 신라 김유신의 태를 묻고 고려 때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ꡓ라는 사록이 말해주고 있는 진천군의 김유신장군태실, 가락국왕의 응달리태봉, 울주 보은리태봉, 고려왕자의 고잔리태봉, 고려 정희왕녀의 송우리태봉, 고려 공민왕의 원주 치악태봉, 고려 충렬왕의 순흥(順興郡)태봉, 그리고 고려 신종(神宗), 원종(元宗), 우왕(禑王)등의 고려사 기록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태실문화를 갖추게 된것은 조선시대 이후부터로 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다분히 신앙적인 측면이 강했다. 태는 그 사람의 지혜나 성쇠에 중요한 것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다분히 금기적인 성격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의 처리가 다음 왕자나 왕녀의 출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과 태실자체가 왕실의 번영과 권위를 상징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조차도 아기가 태어날 때 갖고 나오는 태에는 그 인간과 동기(同氣)가 흐른다하여 귀하게 여겨 명당을 찾아 태를 묻기도 했으며, 출산후 마당을 깨끗이한 뒤에 왕겨에 묻어 태운뒤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곤 했다. 그리고 사정이 어려운 서민들은 소중히 태를 짚에 싸 강물에 띄워 바다로 흘러가게도 했다.
그러나 조선조왕가에서는 후덕이 먼 지방까지 파급효과를 가져다준다는 믿음에 왕자의 태를 태우지 않고 항아리에 담아 이름난 명당을 찾아 안치했던것이다. 그 후부터 태를 모신 주위를 태봉이라 부르며 마을사람들은 성지로 생각하고 섬겨왔다.
오늘날까지 태봉이라고 붙여오고 있는 지명이 풍수지리에서는 대부분 명당으로 보는데, 경기도 연천군 죽면 태봉마을, 가평군 상면 태봉부락, 강원도 원주시 태장마을, 경상도 울진군 북면 태봉부락, 구미시 옥석면 태봉리, 성주군 월항면 태실, 마산시 진동면 태봉리, 양산시 원동면 태봉리, 부산 북구 태봉산, 하동군 후천면 태봉,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보은군 내속리면 태봉, 금산군 추부면 태봉마을, 전북 익산시 삼기면 태봉리, 완주군 구이면 태실마을 등이 해당된다.
당시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유명 명당을 찾아 적극적으로 쓴데는 왕조의 은택을 일반백성에게 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풍수지리에서말하는ꡒ동기감응론효과ꡓ를 받자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여 왕업의 무궁무진한 계승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믿었다. 또 한편으로는 사대부나 일반백성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왕릉은 도읍지 100리 안팎에 모셔진데 반해 태실은 전국 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고, 자연히 백성들은 왕족의 태실을 자기마을 부근에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그러나 불행은 1910년 이후부터 시작된다. 특히 1930년을 전후해 일제가 조선망조 왕실을 관리한다는 미명하에 전국 각 곳에 있는 태실을 옮겨와 집장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무성의하게 모아 놓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행위는 왕족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시키고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켜주자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전국의 40여개소 중 아직까지 태봉이라는 지명을 갖고는 있을지라도 원래 안치된 태봉이 그 자리에 있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봉은 경북 성주군 월한면 인촌동 선석산에 있는 세종대왕 아들의 태실이다. 그 외의 태실들은 훼손된 부분을 후에 모아 복원시켜 두었거나 아니면 고양시 서삼릉 집장지로 옮겨간 경우이다.
따라서 오늘날 태실문화를 재조명해 보기 위해서는 서삼릉경내에 봉안된 태실들에 관한 연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제부터 다루게 되는 본 논문을 통해서 태실이 어떠한 구조와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서삼릉 태실은 어느시기에 어느곳에서 옮겨왔는지? 그리고 옮겨오기 전의 원래 태실의 상황과 이장후 태실 내용물의 상황을 알아보고, 태실문화의 특이성이 새로운 향토문화상품으로의 가치에 관해 고찰해 보려 한다.
Ⅱ.태실의 구조에 대한 검토
태실은 좁은 의미로 보아 왕실에서 왕족일가의 출산이 있게 되면 태를 봉안하게 되는데, 이곳을 태실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태옹(胎甕)이라고하여 항아리에 태를 담아 안치하지만, 왕세자 등의 경우는 다음에 보위를 이어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석실로 만들어 보관하게 했다. 그리고 태실의 크기가 신분에 따라 왕은 540m, 대군은 300m, 왕자나 공주는 180m로 정해 차별화했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일단 태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길한방향에 안치한다. 그후 길일 길시를 택해, 태어난지 7일이내에 태를 씻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씻고 또 씻어 무려 백 번이나 씻고 엽전 한 개를 작은 내항아리 밑바닥 중앙에 깔았다. 엽전은 글자가 있는 면이 위로 오도록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백 번 씻은 태를 올려 놓았다. 왜 엽전을 넣었는지 그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다.
작은 내항아리를 기름종이와 비단으로 밀봉해 좀 더 큰 외항아리에 넣었다. 내항아리가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밑바닥과 공간을 솜이나 고운 흙으로 메웠다. 그리고 기름종이로 밀봉하고 빨간 헝겊으로 싼후 빨간 끈으로 항아리의 사면을 정성껏 꼭꼭 묶었다. 땅에 묻은 의식은 안태(安胎)라고 하는데, 이 의식을 행하기 위해 안태사라는 관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경우에는 석실을 만들어 태를 봉안하게 했다. 태실을 구성하고 있는 석함(石函) 등의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1991년도에 조사되어 그나마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원주의 왕려복난태실(王女福蘭胎室;조선성종의 딸,1486년)을 중심으로 해 알아보려 한다.
태실은 구릉 정상부에서 표토를 삭토한 후 기반암인 화강암반에 토광(직경3.5m,깊이2.5m)을 다시 굴광하여 이 위치에 석함을 안치하였다. 석함을 매몰할 때에는 기반토와 다른 적갈색 사질 점토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묻었고, 상부를 약간 도드라지게 쌓았다. 토광 외곽에는 이중으로 백자호나 백자접시를 매설하였는데, 석함을 중심으로하여 동서 남북축 상으로 각각 2개씩 매설하고 남서 동남지역에 다시 3개씩의 용기들을 매설하고 있다.
그러나 왕녀복난태실,영조태실,순조대왕태실,원주원당리태봉,옹주태실,옥계리태봉태실,상봉동태실,예종대왕태실,선조대왕태실 등의 자료를 참고로해 볼 때 태실별 토광 석함 및 주변상황들이 일치하지를 않아 일정한 기준을 정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단, 제한적이나마 몇 가지의 특징적인 점을 찾을 수가 있다.
태실중에서 지표하에 매장을 한 경우에는 석함의 형태가 원통형 내지는 원기둥 형태인데 반해 외부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석란간(石欄干)으로 주위에 경계를 두른 경우에는 태실이라 불리면서 보주형(구슬모양)내지는 난형(卵形)을 하고 있다. 덮개에 있어서도 전자가 반구형 내지는 원통형인데 반해 후자는 삿갓형과 같이 상면이 편평한 원추형을 하고 있다.
외부에 설치하는 경우에는 태실을 중심으로하여 8각의 지대석을 깔고 태항아리를 설치하기 위한 중단석을 놓고 그 위에 연판이 조각된 상석을 올려 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상석 꼭대기에는 보주를 조각해 놓고 주위에는 8각의 석란각을 세워 경계를 표시했다.
이상과 같은 형태적 특징들은 조선시대 왕가태실 축조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법으로 여겨진다.
Ⅲ.태실의 성격에 관한 고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되어 태아가 출산된 뒤에는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달랐다.
우선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나면 예조의 관중감(觀衆監)에서 태를 봉안할 장소를 물색하고 길일을 선정하고,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개보수해 지장이 없게 했다. 이에 들어가는 물품들은 태가 안치되는 각 지방에서 조달하게 했다. 봉송일이 되면 봉송관원을 임명하는데, 당상관으로 안태사(安胎使)를 정하여 안태봉송의 책임을 맏게 하고 배태관(陪胎官)을 임명하여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게 했다. 그리고 상토관(相土官)을 두어 이미 선정된 태실이 길지인가를 재 확인하게 했다.
이와 같이 완벽에 가까우리 만큼 태실조성 준비가 끝나게 되면,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르고, 태실주위에 금표를 세워 접근을 금하는 보수규제와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왕에 오르거나 왕비가 되면 가봉(加封)을 하게 되는데, 가봉의 시기는 관례적으로 즉위 직후 실시하나 농번기나 흉년 등의 이유로 11월부터 3월사이에 실시하게 했다.
이러한 태실과 관련하여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다분히 신앙적인 측면이 강했다. 육안태법(六安胎法)에서와 같이 태는 그 사람의 지혜나 성쇠에 중요한 것으로 여겨 소중하게 했으며, 다분히 금기적인 성격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태처리가 다음의 왕자나 왕녀의 출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 안태법에는 남자나 여자 모두 성별에 따라 성장하면서 이루거나 혹은 겪어야 할 사항들과 관련되어 있다.
태실을 조성한다는 것 자체가 권위와 번영의 상징이며 다음세대의 출산을 비는 점복적인 성격도 있었다. 그리고 시기에 따라서는 풍수사상이나 음양설 등의 영향도 받았다고 보여진다.
Ⅳ. 서삼릉 태실의 현황
서삼릉 집장지에 봉안되어 있는 태실은 총 54기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태실군의 태항아리와 지석을 옮겨온 시기와 이전하기 전의 기록을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참고로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29년 3월1일자 동아일보의 보도ꡒ조선총독부 이왕직(李王職)이 전국의 명당지에 있는 39기의 태실을 종로구 내수동의 임시보관소에 두었다가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ꡓ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이왕직 전사(典祀)의 출장복명서」에 ꡒ1928년 8월5일부터 8월30일까지 숙명공주,숙경공주,태종대왕,세종대왕,인종대왕,세종대왕 태실을 조사해서 태항아리와 지석을 경성(서울)에 봉송하여 봉안하였다.ꡓ라는 기록과ꡒ1930년 4월15일부터 4월17일까지 3일간에 걸쳐 서삼릉경내에 태실 49기를 이장했다.ꡓ라는 기록이 있다. 그 외 진전하(晋殿下)의 태실은 동경에서 1934년 6월8일에 옮겨와 1935년에 조성되고, 왕세자 태실은 1932년 1월25일에, 경평군의 태실은 1934년 무렵에 서삼릉으로 이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왕전하,영산군,의혜공주 태실의 이장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
태실군의 표비석군은 오석비군과 화강암비군으로 나뉘어 지는데, 표석의 구조는 지대석(址臺石), 기단석(基壇石), 표석(表石)으로 되어 있다.
오석(烏石;검은빛암석)비군은 철자형의 기단석을 설치하고 왕세자 태실을 시작으로 조선조 역대왕의 태실 19기와 장조의황제 태실 등 총 22기가 봉안되어 있다.
화강암비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4열, 남쪽에서 북쪽으로 8열의 대군 1기, 군 14기, 대원군 1기, 세자 2기, 세손 1기, 공주 5기, 옹주 7기, 연산군생모 1기 등 총 32기가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오비석군에 속하는 경종의 태실은 이미 도굴되어 표비석과 태항아리 및 지석이 사라진 상태이다.
1. 오석(烏石)비군 태실 22기
1)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1392-1398)
@태항아리 모형 : 그림A
@이장전 소재지 : 충남 금산군 진산 만인산
@태실의 상황 : 태조의 태를 처음에는 함경도 본궁의 용연(龍淵)에 안치하였다가 무학대사의 지시로 금산군으로 이주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돌난간을 두른 정역(淨域)을 만들고 그 안에 8각원당형의 구조로 했다. 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는데, 외항아리는 흑회색 경질도기이며 발형에 가깝고 뚜껑은 갓형을 하고 있다.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지석의 음각명문 내에 백칠흔적이 남아 있으며 소화4년(1929년)에 이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정종대왕(正宗大王 1398-1400)
@태항아리 모형 : 그림B
@이장전 소재지 :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직지사 뒤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흑회색 경질도기이며 어깨에서 완만하게 저부로 좁혀지는 기형을 하고 있다. 뚜껑은 넓은 접시를 엎어놓은 형태로 손잡이가 없다. 내항아리는 회청색 경질도기이며 뚜껑이 없다. 지석의 음각명문내에 소화4년(1929년)에 이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태종대왕(太宗大王 1400-1418)
@태항아리 모형 : 그림C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성암면 대봉리 태봉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흑회색 경질도기이고 동체부 상단에는 3중의 파상문과 음각선이 돌아간다. 뚜껑은 대접을 엎어놓은 형태로 단추형의 작은 손잡이가 달려 있고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흔적이 남아 있다. 지석의 음각명문내에 백칠흔적이 남아 있으며 1929년에 이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세종대왕(世宗大王 1418-1450)
@태항아리 모형 : 그림D
@이장전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번지
@태실의 상황 : 태실 봉안때 석물을 충청도에서, 지물과 집기는 전라도에서, 식량과 사역은 경상도에서 담당케 하였다. 불응하면 참수한다는 내용의 문헌이 지금도 사천군청에 보관되고 있다.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도굴하여 태실 내부와 돌 난간이 파손된 것을 1604년(선조37)에 크게 중수하였다. 내항아리와 지석만 있다. 가장 오래된 백자항아리로 동체부에는 3면에 고리를 수평으로 2단 부착을 하였다. 뚜껑은 대접을 엎어놓은 형태로 상단 3면에 3개의 고리를 항아리처럼 부착하였다. 제작시기는 1601년이다.
5)문종대왕(文宗大王 1450-1452)
@태항아리 모형 : 그림E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가장 큰 백자외항아리로 외반된 구연아래에서 급하게 벌어지다 저부로 가면서 좁아진다. 어깨에는 고리가 달려 있다. 뚜껑은 넓은 대접을 엎어놓은 형태에 손잡이가 붙어 이다. 내항아리는 회청색 도질이고 뚜껑은 백자이다. 지석의 음각명문내에 백칠흔적이 남아 있으며 1929년에 이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세조대왕(世祖大王 1455-1468)
@태항아리 모형 : 그림F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상주군 월항면 선석사 뒤(인촌리산 8번지)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문종과 유사한 형태이며,내항아리는 분청으로 뚜껑은 분청인화문 대접이다. 제작시기는 1438년으로 보고 있다.
7)예종대왕(睿宗大王 1468-1469)
@태항아리 모형 : 그림G
@이장전 소재지 :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태실의 상황 : 태실은 네모진 기단위에 구형의 돌을 올려 8각의 옥개석을 덮고 다시 그 주위를 8각형의 난간으로 둘러싼 모습이었다. 태실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앉은 모습이었다.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외항아리는 어깨에서 밖으로 넓어지다가 저부로 가면서 좁아진다. 어깨 밑에 고리가 4개 달려 있다. 내항아리는 백자로 길쭉한 장난형이다. 뚜껑에는 4개의 원형구멍이 뚫려 있는 보주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462년이다.
8)성종대왕(成宗大王 1469-1494)
@태항아리 모형 : 그림H
@이장전 소재지 :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실의 상황 : 성종대왕의 태실비는 현재 창경궁내에 있다. 귀부(龜趺)와 비신(碑身),이수(虫离 首)를 갖추고 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위에 석종형(石鐘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다.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외항아리는 기형이 예종의 것과 흡사하며, 내항아리는 길쭉한 장난형의 백자항아리이다. 어깨에 고리가 4개 달려 있고 뚜껑에는 3개의 보주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458년이다.
9)중종대왕(中宗大王 1506-1544)
@태항아리 모형 : 그림I
@이장전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산 310(상색초등학교)
@태실의 상황 : 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금편이 있다. 외항아리는 예종의 것과 흡사하며, 내항아리는 없다. 외면에 봉합천과 주칠끈 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시기는 1492년이다.
10)인종대왕(仁宗大王 1544-1545)
@태항아리 모형 : 그림J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번지 은해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항아리 모두는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기에 속하는 형태이다. 어깨에서 벌어지면서 저부로 좁아지는 길다란 형태를 하고 있다. 어깨에는 4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흔적이 남아 있다. 뚜껑에는 4개의 원형구멍이 뚫려있는 보주형의 납작한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521년이다.
11)명종대왕(明宗大王 1545-1567)
@태항아리 모형 : 그림K
@이장전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산 1
@태실의 상황 : 태실은 32개의 부채꼴로 된 화강석 판석을 깔아 8각지대를 만들고 그 위 외곽에 8각 돌난간을 세우고 그 중앙에 종형의 태실과 태실위에 팔각 옥개석을 올려 놓았다.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외항아리는 고리모양과 외형적 형태가 인종의 것과 유사하지만 항아리 높이가 낮고 뚜껑의 모양이 인종의 것은 반원형으로 뚜껑의 높이가 높은 반면, 명종의 것은 뚜껑의 위쪽이 약간 눌려서 반타원형이다. 내항아리의 기형은 외항아리의 축소형이다. 제작시기는 1538년이다.
12)선조대왕(宣祖大王 1567-1608)
@태항아리 모형 : 그림L
@이장전 소재지 :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237
@태실의 상황 : 원래 선조3년에 오덕리 태봉산 꼭대기에 “주상전하태실비”라 쓰고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현재 내항아리와 지석만 있다. 내항아리의 형태가 특이하다. 기형에 비해 구경이 작고 어깨까지 급하게 벌어지다가 저부로 가면서 좁아진다. 2층굽이며 어깨에 4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570년이다.1)
13)숙종대왕(肅宗大王 1674-1720)
@태항아리 모형 : 그림M
@이장전 소재지 : 충남 공주군 이인면 태봉동 원태봉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구연과 어깨사이에 “c”자형 고리가 달리며 단면은 방형이다. 뚜껑은 넓은 대접을 엎어놓은 형태에 4개의 구멍이 뚫인 단추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661년이다.2)
14)경종대왕(景宗大王 1720-1724)
@태항아리 모형 : 확인되지 않음.
@이장전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34-1
@태실의 상황 : 영조 2년(1726년)에 선왕의 태실을 돌로 장식하고 비석을 세워 순호군 16명을 두어 3년 주기로 제를 올렸다. 태실의 형태는 석조로 8각의 돌 난간을 두르고 그 가운데 4각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8각의 상대석을 올렸다. 8각 옥개석의 낙수면에는 합각머리를 뚜렷이 나타냈으며 정상에 보주만 조각한 8각 원당형의 부도식 태실이다.3) 불행이도 도굴되어 태항아리와 지석이 없는 상태이다.
15)영조대왕(英祖大王 1724-1776)
@태항아리 모형 : 그림O
@이장전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산6-1
@태실의 상황 : 옛 태실터는 충북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외항아리와 내항아리의 기형이 숙종의 것과 비슷하지만 뚜껑의 형태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제작시기는 1695년이다.4)
16)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태항아리 모형 : 그림P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복리 명봉사 뒤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 및 은편이 있다. 외항아리로는 작은 편이고 직립의 짧은 목을 하고 있다. 어깨아래에 단면이 둥근 4개의 삼각형 고리가 달려 있으며 뚜껑은 보주형의 손잡이가 달린 갓형으로 손잡이 목에는 방형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내항아리는 구연이 직립하고 어깨 아래에 4개의 “c”자형 고리가 달려 있다. 뚜껑은 작고 납작한 접시를 엎어놓은 형태로 장방형의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제작시기는 1735년이다.
17)정조선황제(正租宣皇帝 1776-1800)
@태항아리 모형 : 그림Q
@이장전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2리 893-1 KBS영월방송국내 복원
@태실의 상황 : 옛 태실터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4호로, 태실비가 남아 있다. 정조가 태어난 다음해인 영조 29년에 영월 계족산에 처음 만들어 졌다.그후 정조가 죽자 1800년에 가봉(加封)된 태실이었다.5)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어깨 아래에는 "c"자형 고리가 4개 달리는데 고리와 기면의 접합부분을 눌러서 처리 하였다. 외항아리 뚜껑 상면에 2줄의 음각선이 돌아간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와 유사한 형태이나 개경은 좁은 편이다. 제작시기는 1753년이다.6)
18)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800-1834)
@태항아리 모형 : 그림R
@이장전 소재지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산1-1(법주사)
@태실의 상황 : 옛 태실터는 충북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인 1806년에 와의 태실로서 석물을 갖추었다.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직립한 긴 목을 하고 있다. 동체부 중앙에는 삼각형에 가까운 고리가 4개 달려 있다. 뚜껑은 손잡이가 달리고 손잡이 목에는 원형구멍이 뚫려 있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에 비해 목이 짧고 배가 부르며 뚜껑도 개경이 좁은 것 외에는 흡사하다.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7)
19)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34-1849)
@태항아리 모형 : 그림S
@이장전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옥계저수지)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외항아리는 구경이 넓고 목이 긴 낮은 항아리이다. 어깨면이 넓게 벌어지고 s자형 굴곡을 주면서 좁아진다. 어깨하단에 c자형 고리가 4개 달려 있다. 뚜껑은 구멍이 4개 뚫린 보주형 손잡이가 달린 갓형이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의 축소형이다.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0)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1907-1910)
@태항아리 모형 : 그림T
@이장전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태실의 상황 : 내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항아리의 어깨부분은 배가 부르며 저부로 좁혀져 내려간다. 고리는 c자형으로 동체부 하단에 달려 있다. 뚜껑은 넓은 접시를 엎어놓은 형태로 구멍이 4개뚫린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1)영왕(英王;고종의 3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U
@이장전 소재지 : 창덕궁 비원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팽창된 어깨에서 저부로 s자형 굴곡을 주며 급격히 좁아지는 기형이다. 거의 저부에 가까운 곳에 4개의 c자형 고리가 달려 있다.뚜껑은 넓은 대접을 엎어놓은 형태로 동체에 비해 작은 보주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의 축소형이다.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2)왕세자(王世子;영왕의 제2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V
@이장전 소재지 : 동경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청화백자의 대접과 뚜껑으로 각각 외면에 3마리 학과 3개의 이화문이 번갈아 그려져 있다. 뚜껑 중앙에 고리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내항아리는 초벌구이한 적갈색 대접과 뚜껑이다. 제작시기는 1932년이다.
2. 화강암비군 태실32기(대군,군,세자,세손,공주,옹주)
1)인성대군(仁城大君;예종의 제1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1
@이장전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태실의상황 : 옛 태실터는 충북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報)이 있다. 내.외항아리가 성종의 것과 유사하다. 내항아리 뚜껑의 보주형 손잡이에 4개의 원형구멍이 있다. 제작시기는 1462년이다.
2)연산군모윤씨(燕山君母尹氏;성종의 비,연산군의 어머니)
@태항아리 모형 : 그림2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장신의 항아리로 동체부 중간에 원형의 고리가 4개 달려 있다. 뚜껑은 넓은 접시를 엎어 놓은 모양이다. 손잡이는 접시의 굽과 같은 형태이다. 내항아리는 긴 흑회색의 도기이고 뚜껑은 분청사기 인화문 접시의 저부를 사용하였다. 제작시기는 1478년이다.
3)안양군(安陽君;성종의 제3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3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상주시 모동면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報)이 있다. 외항아리는 장신의 백자로 어깨에서 배가 부르다가 저부로 가면서 좁아지는 형이다. 어깨에는 4개의 c자형 고리가 달려 있다. 뚜껑은 보주형의 커다란 손잡이가 들렸으며 외면에 壽라는 묵서가 외면에 쓰여 있다. 내항아리는 길다란 백자로 형은 외항아리와 유사하다. 제작시기는 1484년이다.
4)완원군(完原君;성종의 제4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4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상주시 모동면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안양군의 것과 유사하다. 어깨에서 저부까지 거의 직선이다. 뚜껑은 4개의 구멍이 뚫린 보주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외면에는 주칠끈 흔적이 남아 있다. 내항아리의 모형은 성종,인성대왕의 것과 유사하나 배가 부른편이고 뚜껑이 항아리의 동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제작시기는 1484년이다.
5)왕자수장(王子壽長;성종의 아들 중 하나)
@태항아리 모형 : 그림5
@이장전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태실의 상황 : 외항아리와 지석만 있다. 외항아리는 장신의 백자로 어깨에는 두껍고 큰 c자형 고리가 달려있다. 뚜껑에는 납작한 4개의 구멍이 뚫린 보주형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484년이다.
6)견성군(甄城君;성종의 제7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6
@이장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하복리 태봉산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외항아리는 왕자수장의 것과 유사한데 견성군의 것이 고리가 작고 뚜껑의 보주형 손잡이가 크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와 유사한데, 외항아리에 비해 어깨부분이 둥글게 돌아간다. 제작시기는 1486년이다.
7)연산군원자금돌이(燕山君元子金乭伊;연산군의 제1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7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태봉산)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장신의 백자항아리로 견성군의 외항아리와 기형은 유사하나 견성군은 회백색을 띠고 금돌이의 것은 유백색을 띤다. 뚜껑에는 둥근 손잡이가 달려 있다. 내항아리는 기형에 비해 구경이 작으며 어깨에 c자형 고리가 4개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501년이다.
8)연산군자인수(燕山君子仁壽;연산군의 제2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8
@이장전 소재지 : 경북 문경시 기은읍 왕룡2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연산군 자 금돌이의 것과 유사하다. 외항아리의 뚜껑은 보주형, 내항아리 뚜껑은 작고 둥근 손잡이가 달려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작시기는 1501년이다.
9)왕녀영수(王女靈壽;연산군의 딸 중 하나)
@태항아리 모형 : 그림9
@이장전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회청색 경질도기로 구연과 동체 일부가 결실되었으며 뚜껑도 없다. 내항아리는 배가 부른 단지형으로 분청사기 소형접시로 뚜껑을 하였다. 제작시기는 1929년이다.
10)연산군녀복억(燕山君女福億;연산군의 제5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
@이장전 서재지 : 강원도 삼척시 자원동,도원동(태봉산)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이 있다. 외항아리는 저부만 남아 있다. 표면이 거칠고 군데군데 기포현상이 보인다. 내항아리는 단지형의 백자이고 백자접시를 뚜껑 대신으로 했다.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11)연산군녀복합(燕山君女福合;연산군의 제7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11
@이장전 소재지 :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태실의 상황 : 외항아리와 지석만 있다. 외항아리의 기형은 연산군 자 인수의 것과 유사하나 뚜껑의 손잡이가 결실되어 있다. 바닥에 주칠흔적이 남아 있다.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12)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중종의 제7남,선조의 아버지)
@태항아리 모형 : 그림12
@이장전 소재지 :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태조태실 뒷산)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구연에서 바로 벌어져 저부까지 직선으로 내려와 안정감을 주는 백자 항아리이다. 내항아리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시기는 1530년이다.
13)인성군(仁城君;선조의 제7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13
@이장전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 산411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명종대왕의 것과 유사하다. 뚜껑에는 단추형에 가까운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제작시기는 1589년이다.
14)인흥군(仁興君;선조의 제12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14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합창읍 태봉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항아리의 배가 부르고 뚜껑 중앙이 눌려 납작한 접시모양을 하고 있다. 외면에 주칠끈 흔적이 보인다. 제작시기는 1608년이다.
15)숙명공주(淑明公主;효종의 제3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15
@이장전 소재지 : 경북 김천군 지례면 관덕1리(활남마을)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금종이가 있다. 어깨에서 저부로 내려가는 경계가 확연하며 약한 s자형 굴곡이 진다. 제작시기는 1660년이다.
16)숙정공주(淑靜公主;효종의 제5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16
@이장전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3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및 동전(萬曆通寶) 그리고 금종이가 있다. 17세기에 속하는 형태이고 지석의 음각명문내에 주칠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시기는 1662년이다.
17)숙경공주(淑敬公主;효종의 제6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17
@이장전 소재지 : 경북 김천군 지례면 관덕리(할남마을)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崇禎通寶)이 있다. 17세기에 속하는 형태인데 항아리의 높이가 약간 낮아지고 어깨에서 저부로 내려오는 s자형 굴곡이 약간 커진다. 제작시기는 1660년이다.
18)명선공주(明善公主;효종의 제1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18
@이장전 소재지 : 충남 보령시 미산면 남심리 태봉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내.외항아리는 숙경공주의 것과 유사하다. 제작시기는 1660년이다.
19)연령군(延齡君;숙종의 제6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19
@이장전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고새울)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고리가 다소 내려와 어깨부분에 달려 있다. 지석의 음각명문내에 주칠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시기는 1699년이다.
20)화유옹주(和柔翁主;영조의 제10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20
@이장전 소재지 : 충남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태실의 상황 : 외항아리와 지석만 남아 있다. 지석 음각명문 내에는 백칠흔적이 남아 있고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1)화령옹주(和寧翁主;영조의 제11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21
@이장전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대흥면 대흥면사무소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18세기가 되면 17세기에 비해 동최대경이 다소 아래로 내려오고 4개의 고리가 어깨에서 시작해서 아래쪽에 달린다. 항아리 동체부는 어깨에서 S자형 굴곡을 지며 저부로 내려간다. 뚜껑의 개경이 이전보다 넓어지고 배신의 깊이가 깊어져 반원형을 그린다. 뚜껑의 손잡이는 보주형이 대부분이고 둥근것과 단추형도 있다. 화령옹주의 것은 이 시기에 속하며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2)화길옹주(和吉翁主;영조의 제12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22
@이장전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태봉산)8)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및 동전(開元通寶) 그리고 금종이가 있다. 항아리의 형태는 18세기에 속하며 지석 음각명문 내에는 주칠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시기는 1754년이다.
23)의소세손(懿昭世孫;영조의 손자,장조의 제1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23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18세기의 다른 태항아리와 달리 짧은 굽다리를 가지고 어깨에서 저부까지 완만하게 내려온다. 제작시기는 1750년이다.
24)문효세자(文孝世子;정조 제1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24
@이장전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자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開元通寶)이 있다. 18세기 후번이되면 구경이 넓고 배가 부르며 낮은 기형의 항아리가 나타난다. 문효세자의 것이 이에 속하며, 동체부의 S자형 굴곡이 심하고 고리가 동체부 하단에 달린다. 뚜껑의 손잡이는 모두 보주형이고, 외면에 봉합천과 주칠끈 흔적이 남아 있다. 제작시기는 1783년이다.
25)철종왕세자(哲宗王世子;철종의 제1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25
@이장전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주친면 주친리
@태실의 상황 : 외항아리와 지석만 있다. 19세기가 되면 구연이 길고 동체부가 S자형 기형을 하고 고리는 하단부에 부착된다. 외부에는 봉합천과 주칠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6)덕혜옹주(德惠翁主;고종 제4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26
@이장전 소재지 : 창덕궁 비원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및 동전(朝鮮通寶) 그리고 목간이 있다. 외항아리는 깊은 사발과 배신이 깊은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짧은 굽다리가 부착되어 있다. 동체부에 4개의 “ㅁ”자형 고리가 다른 태항아리와 달리 횡으로 붙어 있다. 지석의 음각명문은 백칠이 남아 있고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7)고종제8남(高宗第八男)
@태항아리 모형 : 그림27
@이장전 소재지 : 창덕궁 비원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및 동전(開元通寶) 그리고 목간이 있다. 외항아리는 덕혜옹주의 것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항아리의 배신이 좀더 길고 직선적이다. c자형 손잡이 종으로 4개가 달려 있다. 목간의 내용은 전면에 왕손이 태어난 일시 및 어머니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태항아리 운반을 담당했던 호산청 사무관 2명과 호산관 3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장시기는 1929년이다.
28)고종제9남(高宗第九男)
@태항아리 모형 : 그림28
@이장전 소재지 : 창덕궁 비원
@태실의 상황 :SO.외항아리와 지석 및 동전(開元通寶) 그리고 목간이 있다. 항아리 모두 고종제8남과 동일하고, 지석의 명문내용도 동일하다. 목간의 내용은 담당자 이름외에는 고종제8남의 것과 동일하다.
29)진전하(晋殿下;영왕의 제1남)
@태항아리의 모형 : 그림29
@이장전 소재지 : 동경
@태실의 상황 : 다른 태항아리와 달리 목함과 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함은 방형의 판자를 맞물려 나무상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 내부는 석회로 가득차 있고, 그 아래에 원형의 목질이 남아 있는데, 원형의 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형의 목질안에 초벌구이한 적갈색 접시가 아래 위로 덮혀서 출토되었다. 제작시기는 1934년이다.
30)영산군(寧山君;성종의 제13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30
@이장전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외항아리는 왕자수장의 것과 유사하며, 내항아리는 견성군의 것과 유사한데, 뚜껑의 배신이 납작하고 보주형 손잡이 목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다.제작시기는 1494년이다.
31)의혜공주(懿惠公主;중종 제2녀)
@태항아리 모형 : 그림31
@이장전 소재지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90
@태실의 상황 : 내.외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동전(朝鮮通寶)이 있다. 인종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제작시기는 1523년이다.
32)경평군(慶平君;선조 제11남)
@태항아리 모형 : 그림32
@이장전 소재지 : 대전광역시 서구 과수원동 180-3(향토사료관내)
@태실의 상황 : 산봉오리 정상에 240m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매장되었던 태실 석함은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석함은 높이 142cm에 직경이 115cm이며, 원통형의 몸체와 반구형의 뚜껑은 석회로 단단하게 붙여진 상태였다.9) 외항아리 2점과 내항아리,지석,동전(開元通寶),금종이가 있다. 제1외항아리의 기형은 예종의 것과 동일한데, 크기가 작다. 제2외항아리와 내항아리는 인흥군의 것과 거의 흡사하다. 제작시기는 1608년이다.
Ⅴ.맺음말
1. 지금까지 일반인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분야가 되다보니, “태실”에 관한 자료도 많지 않을뿐더러 그나마 있는 내용도 단편적이고 여기저기 전국에 산재해 있었던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 논문을 통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사료된다.
2. 일반적으로 ‘한국’하면,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없는 동양적인 신비문화를 기대하고 있다. 태실문화는 중국,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문화인데다 신비스러움도 한 껏 깃들어 있다.
순박하고 가족계통을 중시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인식을 초월한 자연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의 힘을 빌려서라도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던 그 원초적사랑이 배어 있는 태실문화, 이 문화는 분명 서구인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사료된다. 이것은 곧 세계적인 태실문화상품으로의 부상도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건이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첫째, 서삼릉경내에 “태실박물관”을 마련한다.
둘째, 서삼릉경내에 당시의 시대별, 형태별 태실을 볼 수 있게 하는 “야외 태실전시장”을 조성한다.
셋째, 태실을 상징하는 “토종캐릭터”를 개발해 다양한 상품을 개발한다.
넷째, 태실문화와 연계된 역사 속의 각종 이벤트를 준비한다.
3.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베로나는 야외오페라로 유명한 세계적 명소다. 여름 3개월간 이 도시의 특정지역에서 열리는 오페라 공연이 전 세계에서 매년 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사는 그룹에 속해 있다. 서삼릉태실단지에서도 숲속의 야외오페라 공연장을 마련해,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임산문화가 배경이 되는 특이성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각별한 경험의 장이 되게 함으로써 관광객들을 매료시키는 일종의 베로나식 벤치마킹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달빛태실문화기행, 별빛태실문화기행과 같은 신비스러운 느낌이 가게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한밤 휘영청 밝은 달아래 태실문화를 감상하고 태실마을을 거닐다보면 지구상에 또다른 느낌과 분위기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4. 원래 왕릉경역 내에는 후궁,왕자,공주 등의 묘나 태실을 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1910년 11월에 통치국 일본의 국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왕직(李王職)이 설치되었고, 이왕직에서는 서울.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왕자,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한다는 명목아래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묘외 15기와 세종대왕 1녀 정소공주의 묘외 18기를 서삼릉경내에 집장케 했다. 그리고 태실의 집중관리라는 미명하에 태조의 태실등 22기와 왕자등 32기의 태실을 1930년대를 전후하여 역시 이곳으로 이설하게 했다. 이처럼 서삼릉 경역내 후궁과 왕자, 공주묘 및 태실의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케하여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 때까지는 하나의 경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불행은 그 이후에 더 심해진다. 1960년대말에 이르러 시범낙농단지 조성을 시행함으로써 경역의 대부분이 낙농방목초지로 바뀌고 일단의 경역은 예.희릉구역, 효릉구역, 후궁.왕자.공주묘구역, 태실집단구역, 소경원구역 등으로 분할되고 각 권역은 서로 통행할 수 조차 없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이 상태로의 방치는 우리 고유문화자산의 활용면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하나의 경역으로 통합시켜 울창한 원래의 능림을 이루게 하고, 태실문화개발을 필두로 세계적 문화관광자원으로 가꾸어나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5. 세계에서 유일문화인 태실단지가 있는 서삼릉을 “달빛고요한 태실마을”로 이미지화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사료된다.
2014.3.13 태장마을 탐방을 위해 복사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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