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10월 갈산산성 답사

단산사람 2013. 10. 27. 20:28

영주문화유산보존회

2013년 10월 26(토)  14:00-16:00 갈산산성 답사

 

 

 

 소백산 단풍 절정

 

갈산산성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성골마을)

해발 138m의 야산에 있다.

산 정상에 동서가 긴 타원형의 평탄한 터전이 펼쳐져 있고

그 남쪽 비탈에 옛 성터가 자리해 있다.

성의 기단부만 남아있고 그 둘레에 여기저기 석재가 흩어져 있다.

둘레 900m 정도의 성 자리로 그 연대나 유래는 알길 없으나 임진왜란 때

전적지라고 전한다.

사면으로 경사가 심하고 주위를 살필 수 있도록 시야가 열려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

 

 

 산 정상 평탄한 터전

 

 

 기단과 흩어진 석재

 

 알밤줍기

 

  갈산산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

 

 

 멀리서 본 갈산산성

 

 녹야당

 

 문화재 청소미화

 

 

  문화재 청소미화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녹동)

진사 장진이 세웠다.

김희진의 기/ 진사 녹야공은 호서에서 옮겨와 고을 남서쪽 탄배에 숨어 살아왔다.

간재 이덕홍, 유기봉과 가까이 왕래했으며 부용대 사마계첩에도 머리에 올라있다.

정한강의 오계서원 군자정 강회는 학생을 갖춘 명사들의 모임으로 퇴계 이황 문인이 아니면

퇴계 선생을 사숙한 이들이었는데 공 또한 거기에 참여했다.

그 뒤 오랜 세월 당이 무너지고 유적이 모두 없어져 그 유광을 찾을 길 없어 한스럽 더니 이제

그 후손 두진이 여러 종족들과 설력을 모아 이 당을 다시 이룩했다.

공은 세상사에 초탈하여 문을 닫고 지냈는데 90세에 노직이 내렸으나

국자생(진사)으로 족하다 하고 사당에도 고하지 않았다.

 

 

 

 

 

 간재 이덕홍 강생유지비

 

영주 서쪽의 구룡(龜龍) 마을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우며 정기가 모여 깃들었으니 바로 간재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선생의 외조부 사직 박공(朴公)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살았기에 선생이 1541년(중종 35)에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제 300년이 지나니 사직공의 옛날 집은 헐리고 황폐하여졌으나 이곳에 사는 노인들이 여기가 간재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 하니 어찌 시대가 변천하였어도 훌륭하던 정기가 희미하게 어리는 듯하니 이

터가 아니겠으며, 현인 군자의 자취는 아무리 오래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아! 선생은 품성이 온순하고 자태가 순수하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착한 일을 즐거이 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천성이 그러함이오, 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깊이 믿고 따르며

가르침을 독실하게 익히니 동문의 어진 분들이 주자의 제자 면재(勉齋) 황간(黃幹)과 구봉(九峯)

채침(蔡沈)에게 견주어 소중히 여기였다.

저서로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사서질의(四書質疑)』 등이 있는데 경연에서 신하들의

건의로 베껴서 옥당에 보관하고 있다.

처음 선생께서 천거되어 계방(桂坊 : 동궁의 사경국)에서 벼슬하다가 외직으로 영춘 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에 호종한 공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선생이 돌아가고 후학들이 선생을 잊지 못하고 더욱 사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며

정자와 대를 수리하여 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은 모두 표시하였고 또 서로 의논하여 “구룡의

옛터를 황폐하게 버려 둘 수는 없다.”고 하고 계를 만들어 자금을 마련해서 비석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선생의 주손인 유곤(裕昆) 씨가 나에게 글을 지어 달라기에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자(顔回)가 살던 마을의 우물가에 비를 세웠고, 정강성[鄭玄]이 살던 마을을 정향(鄭鄕)이라

표시하였으니 옛 사람들이 어진 분을 사모함이 이러하였다.

여기 선생이 태어난 터는 하늘의 운수가 합당하게 호응하고 땅의 영기를 받아서 선생이 나고

길러졌으니 반드시 우연만은 아니며 비석을 잘 다듬어 세우고 후세에 전하여 우러러 흠모하고

윤리를 좋아하도록 권장함이 끝이 없을 것이다. 비면에 ‘간재 이선생 강생유지비

(艮齋 李先生降生遺址碑)’라고 쓰고 또 시를 지어 아래로 이어서 이르노니,

높고 높은 영산(榮山)이여. 넓고 넓은 영수여. 신령한 정기를 받아서 빼어나게 길러졌으니

우리 간재 선생이 뛰어나게 훌륭하도다.
아! 간재 선생은 퇴계 선생의 뛰어난 제자였으니 어려서 문하에 들어가 종신토록 친히

가르침을 받았도다.
학문에 정성을 다하고 바르게 깨달아 힘껏 실천하였으며, 물러나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착한 기틀을 일으키니 스승이 감탄하였도다.
스승이 선기옥형을 만들라하고 서적도 맡기었으니 『계산기선록』은 논어의 일부인 것 같도다.
남긴 학문을 열렬히 연구함은 정일한 심법이 보존되었기 때문이요, 스승의 학문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기쁨과 은혜를 베풀었도다.
우리 후학들이 우러러 흠모함이 끝이 없으니 향리에서 경건하게 이루어서 향사를 지내고 높이

흠모하도다.
이곳 구룡동은 훌륭한 분이 태어난 곳으로 영명한 정기를 받아서 길러졌으니 어찌 감히 잊을

수 있으리오.
옥같이 돌을 다듬어 남기신 명성을 나타내니 수백 년 골짜기가 빛이 나고 모습이 바뀌었도다.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사람은 학문으로 높아지니 유학하는 자는 누군들 이 두둑을

바라보고 공경하지 않으리오.
넓고 넓은 영수여, 높고 높은 영산이여, 이 비석과 함께하여 영원하리라.

1933년 10월 일에 후학 안동 권상익(權相翊)은 삼가 글을 짓고, 진성 이원태(李源台)는

삼가 글씨를 쓰다.

선생의 이름은 덕홍(德弘)이오, 자는 굉중(宏仲)이며, 이씨의 본관은 영천이다.

참판 이충량(李忠樑)의 아들로서 호와 자와 이름은 다 스승이 지어 주었고

1541년(중종 35) 10월 14일에 출생하여 1596년(선조 29)에 돌아갔으며 묘소는

예안현 북쪽 우계(愚溪)의 간좌(艮坐)에 있다.

아! 지금은 1541년(중종 35)으로부터 393년이 지났지만 정중한 사림의 공의가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이 일을 보게 하였으니 참으로 추모하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느낀 바를 간략하게 이른다.

10대손 운연(運淵)은 삼가 기록한다.

- 운연(運淵), 비석에서.

 

 청소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구룡암

 

 

 

 반구 성황당

동민의 길복을 축원하고 흉화의 방제를 기원하며 동제를 지내기 위해 건립하였다.

 

 

 군수 손상준 청덕선정비

 

군수 홍병도 청백선정비

 

 

단풍과  가랑잎이 아름다운 장수초등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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