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의 정의와 두레정신
사전에 의하면 “두레는 상부상조의 원시적 유풍인 품앗이에서 발전한 공동노동체 조직으로, 두레가 이행하는 공동노동의 형태는 모내기·물대기·김매기·벼베기·타작 등 논농사 경작 전 과정에 적용이 되었으며, 특히 많은 인력이 합심하여 일을 해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거의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었다.” 혹은 “농촌 사회의 상호 협력, 감찰을 목적으로 조직된 촌락 단위의 원시적 유풍인 공동노동체 조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두레란 전통적으로 농사를 생업으로 삼았던 우리 선조들이 힘든 농사짓는 일을 서로 품을 나누어 가볍게 하고, 농악과 연희를 곁들임으로써 삶의 곤고함을 흥겨움으로 승화시켰던 아름다운 생활풍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도입되고, 고려말 유교가 도입되면서 점차 그 기능이 변질되어 왔으며, 유교정책이 국시가 된 조선시대와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감시 혹은 식민약탈 수단으로 변질되고 퇴색되어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레정신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민족의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의 근간이 되는 정신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왜일까? 그 답은 상부상조하던 원시유풍이라는 단어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면 두레정신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두레하면 막연히 우리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라는 사실과 농악과 풍물놀이를 떠올릴 뿐, 두레정신이 우리 고대의 선비문화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새마을 정신과 화랑정신 또한 두레정신을 이은 것이며 홍익인간의 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우리 고대 삼한시대 초기의 우리선조들은 홍익의 신인(神人)이 되는 홍익인간을 삶의 목적으로 삶고 그 도를 익히는 것을 생활지침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이들을 선인(仙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함께 모여서 하늘을 향해 소도를 쌓고 공동목표인 홍익인간의 신도를 이루기 위하여 고행과 수련과 나눔을 행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갈망하였던 홍익인간의 신도에서는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사회, 희망찬 사회를 삶의 이상으로 여겼고, 그것이 자신도 건강해지고 행복해지는 길이며 홍익인간의 신도를 이루어 선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들 선인의 무리들을 선비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꿈인 홍익인간의 도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힐링하였고, 마을일을 돕고 질병을 치유하고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고 소도제천하면서 사회를 힐링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의 선행과 소도제천의 유풍은 널리 퍼져서 사람들은 이들의 덕행을 칭송하였고, 모두가 소도에 들어 선비의 일원이 되어 홍익인간의 길을 걷기를 희망하였다. '두레'라는 말은 본래 소도를 중심으로 하는 선비지역공동체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들이=들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 집안에서 두레에 들어가는 사람이 나오면 그것은 집안의 자랑이었고 긍지였으며, 한 혈연집단이 두레에 속하게 되면 그것은 집단의 자랑이고 긍지가 되었다.
이러한 두레의 유풍은 삼한시대 사람들을 교화하는 바탕이 되었으니, 우리 삼한밀기에 “소도제천은 구려의 교화하는 근본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책하고 이웃과 잘 지내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며 문명이 개화하고 평등하니 온 세상이 제사의 예법을 숭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에도 “삼한사회三韓社會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고 하여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두레정신의 철학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두레정신은 공동체적 철학이다.
두레정신은 우리 고대의 한(환) 사상에서 비롯된다. 한(韓) 또는 환(桓)은 하나이고 변화하는 주체로서의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선조들은 고대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순환의 원리이고 생명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민족에 있어서 삶의 근원이 되는 자연과 선조와 이웃은 ‘우리’로 뭉쳐진 하나의 홍익공동체이며, 한사람한사람이 모두 홍익인간이 될 때 홍익세상은 이루어진다.
두레정신을 윤리적으로 보면 “나”와 “네”가 합쳐져서 “우리”로 함께한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있다. 다시 말하여 “네”안에 “내”가 있고, “내”안에 “네”가 있다. 그러므로 독립되고 고립된 나와 너는 없고, “우리” 속에 통합된 나와 네가 존재한다. 바로 이런 정서가 일상생활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누며, 친구사이에 신의를 지키고, 가족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부추기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나라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버리는 공동체적 삶의 정신을 가져왔다.
두레정신에서는 크게는 천, 지, 인이 모두 하나의 생명체로서 상생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며, 우주공동체가 하나이므로 사람들은 모두가 하늘에서 나서 태어나 하늘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산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은 우리가 돌아갈 자리를 없애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를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뜻하는 바를 빌기 위해서 산으로 가고 자연과 만나기 위해서도 산으로 간다. 산으로 간다는 것은 ‘ 땅에서 나서 땅으로 되돌아 간다’ 또는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되돌아 간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우리가 자연환경을 지키고 자연주의 삶을 지켜야 하는 까닭이다.
둘째: 두레정신은 힐링의 실천철학이다.
두레정신에서는 홍익인간의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개인을 힐링하고 사회적 힐링을 실천한다. 홍익인간이라는 공동체정신 속에서는 전체가 건강하고 행복해지지 않고는 개인의 건강하고 행복하고 희망찬 삶 또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레정신에서 추구하는 희망찬 개인의 삶과 희망찬 사회의 미래는 현재의 행복한 삶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현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개인의 심신이 건강하여야 하고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한다. 심신이 병든 사람의 삶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고, 병든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 지켜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질병은 하나에서 천지인으로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기운의 흐름이 막히고 정체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흡을 통하여 소통하고 조화함으로써 의식주를 바꾸고 생활습관을 바꾸고 환경습관을 바꾸는 것을 실천하고, 그것을 통하여 개인을 치유하고 사회를 치유함으로써 건강하고 행복하고 희망찬 개인과 사회로 나아간다. 우리가 두레정신을 실용주의, 실천주의적 정신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두레정신에서 의미하는 개인적 힐링은 단순히 육체적˙정신적으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을 넘어서 육체와 정신이 가진 능력을 100% 활용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나눌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삶에 있어서 교육은 늘 삶과 하나로서 실타래처럼 공존해왔다.
사회적 힐링 또한 단순히 사회적으로 재화가 넘쳐나는 풍요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가 막히고 정체됨이 없이 고루 퍼져서 모두가 의식주의 걱정없이 건강한 생활습관과 환경습관을 유지할 수 있는 나눔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의 정신은 환난을 함께 나누고 함께 극복하는 상부상조하는 미덕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우리민족과 함께 해왔다.
셋째: 두레정신은 신명철학이다.
신명 혹은 신바람은 즐거움이다. 삶의 순간들이 행복하고 죽음조차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참다운 즐거움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참된 즐거움과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영혼의 감동일 것이다. 즐거움도 행복도 기쁨도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깨달음의 법열은 스스로로 느끼는 영혼의 전율과 감동 속에 있을 것이다. 우리 영혼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귀하고 높은 뜻 앞에서 순수하게 전율한다. 그리고 그 고귀하고 높은 뜻은 바로 홍익에 있다. 그 까닭은 우리의 뇌는 우리가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하였을 때, 스스로에게도 유익한 호르몬을 생산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홍익이라는 큰 꿈속에서 스스로의 영혼이 전율할 때, 우리 영혼은 남에게도 감동을 줄 수가 있다. 나의 영혼과 남의 영혼이 소통하여 공명하고 전율하는 상태를 우리 전통철학에서는 율려라고 하는데, 이 율려야말로 인간이 느끼는 진정한 즐거움과 행북이요, 우주의 에너지순환 법칙인 신바람이다.
또 신명은 개인적으로는 건강한 삶 행복한 삶, 죽음조차도 넘어서는 초월한 삶의 전율을 의미하며, 사회적˙집단적으로는 건강한 사회, 행복한 사회, 희망찬 사회의 영속을 의미한다.
두레정신은 어려움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고 함께 울고 웃으며 정으로 이겨내고, 삶의 질곡을 흥으로 승화하는 역동적인 삶의 정신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신명나는 삶의 즐거움을 소도제천의 행사를 통하여 함께 나누었으며, 이 신명은 오랜 세월을 흐르는 동안 우리 가락과 민요의 토대가 되었다.
살펴본 것처럼 두레정신은 선비정신이며, 선비정신은 홍익인간의 이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신명나는 삶과 신명나는 사회, 즐거움으로 전율하는 두레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답은 두레정신이 지향하는 홍익인간의 사상에 있다.
홍익인간의 사상과 두레정신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이며 주체성의 근원이다.
기(氣)는 이(理)에 의해서 움직이며, 인간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고귀하고 높은 뜻 앞에서 순수하게 전율하며 스스로에게도 좋은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가 홍익이라는 큰 뜻으로 전율할 때 우리 개개인의 삶은 신명을 되찾을 것이고 우리 사회 또한 신명을 되찾을 것이며, 우리 두레정신과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이 되고 우리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도하여 세계 속에 우뚝 선 글로벌리더국로서의 자랑스러운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예로부터 파라다이스를 그려왔고 동경해왔다. 그리고 인류가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는 파라다이스는 바로 우리 두레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세계가 두레정신 속에서 함께 전율하고 홍익의 이념이 지구를 가득 메울 그날, 건강한 세상˙행복한 사람˙희망찬 인류의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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