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오늘은 기어이 무량수전에서 일몰을 보고야 말리란 다짐을 안고 오
후 4시경 부석사 浮石寺행 버스에 올랐다. 평일 오후의 한가한 도로를 신나
게 달리던 버스는 잘 정돈된 부석사의 주차장에 나를 내려놓았다. 막 주
차장을 만든 때왔을 때는 약간 황량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오늘은 저
밑의 주차장 들어오는 입구부터 늘어선 식당들을 보니 이제 완연한 관광
지 느낌이다. 폭포처럼 보이는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곳>이란 푯말
도 보인다. 아마도 물보라로 생기는 무지개가 선연하게 찍힐 것이다. 부
석사를 찾아 생각지도 못했던 배경 사진을 갖게 되다니, 전혀 다른 또 하
나의 기쁨이 추가되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화엄사상 華嚴思想의 발원지인 부석사는 참으로 많은 수식어가
붙는 절이지만,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부석사가 다른 절과는 다른 또 무
언가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사랑의 전설이 아닌가 싶다. 절의 이름이 된
부석 浮石에서도 언급되는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의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부석사
하늘에서 보면 전체 전경이
‘華’의 형상을 보인다는 부석사.
함께 화엄학을 배우러 떠난 원효
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
(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을
얻어 경주로 돌아가 버리고, 홀로 길
을 떠난 의상은 중국 등주에 도착하여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때 선
묘를 만나게 되는데, 진심어린 구애에도 불구하고 의상의 마음이 움직이
지 않자 선묘는 “세세생생 스님께 귀의 하겠다”고 맹세하고 의상이 종남
산 지상사에 머무는 동안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부석
부석사의 창건신화에 등장하는 뜬 돌.
공부를 마쳐갈 무렵, 당나라가 신라를 치려 한다는 정보를 들은 의상
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오는 길에 감사 인사를 전하러 들렀지만, 선묘가
출타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배에 올랐다. 뒤늦게 사실을 안 선묘가 선
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
으로 변해 의상이 탄 배가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화엄도량을 이룩할 만한 복된 터
전을 찾아 5년 동안 헤매다가 지금의 부석사 터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다른 잡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고민하던 중에 선묘 신룡 神龍이 나
타나 사방 10리 넓이의 큰 바위를 공중에 들어올려 위협하니 소승잡배들
이 떠나 절을 지을 수 있었다. 이것이 ‘부석 浮石’이란 이름을 짓게 된 연유
이며, 지금도 선묘는 석룡 石龍이 되어 부석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렇
게 그저 전설로만 남을 줄 알았던 이야기가 그 진실을 드러낸 것은 1919
년의 일이다.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 主佛 밑에 두고 꼬
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기록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1967년 5월에 드디어 무량수전 앞뜰에서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전설 속의 석룡이 모습을 드러내니 부
석의 존재도, 선묘각 善妙閣의실체적 의미도 다르게 와 닿는 것 같다.
매표소를 지나, 영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는 은행나무 길을 따
라 올라가자 곱게 단장한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은 천왕문과 함께 산
문山門에 해당되는 곳이다. 산문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세속의 공간과 스
님들이 사는 공간 사이에 있는 문으로, 합장을 하고 반배를 올리는 장소
이기도 하다. 이런 산문들은 조선시대 이후 배치된 공간이기 때문에 최초
창건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로 여겨진다.
당간지주
통일신라시대 세워진높이 4 28cm의부석사당간 지주는 보물 제 255호로 지정되어있다.
합장을 하고 반배를 올린 후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나무들 사이로 중
수기적비 重修紀跡碑가 보이고, 중수비를 지나쳐 조금 더 오르면 오랜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부석사의 당간지주가 보인다. 당간 幢竿이란 절에서 불
교 의식이 있을 때 불 佛 또는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
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비교적 가늘고 긴 편이면서도
아래와 위의 두께에 다소 차이를 내 안정감을 준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
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 杆臺石이 놓여 있다.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으로
보아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를 뒤로 하고 돌계단 몇 개를 올라 부석사의 첫 관문인 천왕문에 이른다.
천왕문 안에서 예의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 문을 통과하는
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천왕을 만난다. 어느 절이든 입구에서 만나게 되
는 이 사천왕이 우리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
겠다.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왕 持國天王은 봄에 해당하는 방위로, 비파를 켜고
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노래하고 축복하는 비파의 아름다운 선율
은, 부모의 양육으로 모든 관심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 增長天王은 여름에 해당하는 방위로, 큰칼
을 들고 있다. 저돌적으로 자기를 확장해 나가는, 인생의 가장 뜨거운 태양이라는의미를큰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서방을 지키는 광목천왕 廣目天王은 가을에 해당하는 방위로, 용과 여의주
를 쥐고 있다. 가을이란 말 그대로 수확의 시기로, 여름을 어찌 보냈는가
에 따라 그 거두어들임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 多聞天王은 겨울에 해당하는 방위로, 보탑을 들고
있다. 보탑이란 부처님의 사리 또는 대다라니경 등을 안치하는 곳으로
부처님의 무덤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우리 인생이 왔다가 돌아가는 것을
회상해 보는 시기라고 할 수있다.
너무 끼어 맞추는 게 아닌가 싶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사천왕이
란‘불법 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라는
것만 알고 넘어가자.
부석사는 일반적인 평지 사찰과는 달리 산비탈을 깎아 평지를 만들었
기에 석축을 쌓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 석축 역시 의상대사가 추구한 화
엄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완성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석축은 우선 상
품단·중품단 ·하품단으로 나누고, 그 세 군데를 세분화하여 다시 상중
하로 나누어 총 아홉단의 석축을 만날 수 있다.이는 불교의 윤회설을
반영한 것으로, 환생할 때는 좀 더 나은 품계로 태어나길 바라는 염원이
나타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불현듯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가 생
각났다. 프랑스인이면서도 동양사상, 특히 불교의 윤회설에 심취한 그
가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1994년 작품이라 벌써 읽은 지가 15년이나 되니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다
해도 세세한 부분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
억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생의 업적 (?)에 따라 점수를
매기는부분이다.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몇 월 며칠, 어
른께자리를양보했군. +10점”, “몇월며칠, 무단횡단을했군. -5점” 뭐이
런 식이다. 그렇게 착한 일과 나쁜 짓을 플러스마이너스 하여 얻은 점수
가 그의이번 생의 점수가 되고, 그 점수에 따라 다음 생을 선택할 수 있
게 된다. 자신이 얻은 점수에 따라 부모를 고르고, 평생 함께해야 할 병을
고르고, 특기를 고르고……, 지난 생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다음 생엔 보
다 나은 환경을 얻어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1천 점인가(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하여튼 무지하게 높은 점수)를 얻으면
반복되는 삶에서 해방된다. 인간으로 태어나 영생을 얻는 것, 바로 부처
와 예수가 그 케이스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석축이 바로 그와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품단에서 중품단으로, 중품단에서 상품단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만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영
생을 얻는 부처가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물론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참
멀게 느껴지는 얘기이긴 하다.
원래 시작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하품단에서 중품단으로 가는 돌계
단은 하나하나가 참 높기도 하다. 웬만한 계단 두 칸을 한꺼번에 오르는
양 겅중겅중 힘겹게 올라 통일신라 후기에 지어진 양쪽의 삼층석탑 사이
를 지나고, 다시 돌계단 몇 개를 올라가야 비로소 중품단에 있는 범종루
를 만날 수 있다.
범종루 梵鐘樓를 올려다보니 ‘봉황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일주문에는 분명 ‘태백산 부석사’라고 쓰여 있었는데 말이다.
태백산은 무엇이고 봉황산은 무엇인가 했더니 설명은 이랬다. 이곳이 바
로 태백산맥의 끝자락이자 소백산맥의 시작이며, 소백과 태백의 양백지
간에 조그만 봉황산이 있어 양백의 기운을 모두 받은 명당자리란다. 게
다가 이 봉황산 능선은 신령스러운 봉황이 알을 품고 엎드려 있는 형상
인지라, 무량수전이 앉아 있는 곳이 바로 봉황의 기를 생성하는 단전자
리라 할 수 있다는 거다.
설명을 듣고 태백산과 봉황산이라는 두 개의 부석사 현판에 대한 의문
은 풀렸으나, 범종루를 바라보며 드는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범종루
는 부석사의 주요 건축물이면서도 가로로 놓이질 않고 세로로 놓여 있는
데, 그렇다면 여기에도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부석사의 한가운데 가로로 건물이 놓이게 되면 하품단에서 상품단으
로 오르는 길의 흐름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로로 건물을 놓아 상품단과
하품단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함이란다. 과연, 나무 한 그루뿐만이
아니라 숲 전체를 볼 줄 아는 지혜가 자랑스럽다 싶었다. 그 마음은 범종
루 밑을 통과하여 올라섰을 때 더욱 고조에 달했다.
범종루의 처마 형태가 밑에서 본 앞부분과 올라선 다음 본 뒤가 달랐
는데, 앞쪽은 화려한 매력의 팔작지붕(처마가 八자형), 반대편은 단아한 맞
배지붕(A자형)이었다. 앞에서 보면 화려하고 웅장한 멋을 느끼도록 팔작
지붕을,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면 팔작지붕은 시야가 답답해 보
이니까 시원하게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다. 한 건물에 앞뒤 다른 지붕을
얹어 그 위치에 따라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도록 꾸미다니, 정말 경탄의
감탄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내질 못했다.
또하나의 특징을 꼽자면, 부석사의 범종루 안에는 법고 法鼓.목어 木魚.운
판雲板은 있어도 범종이 없다. 대원군시절 경복궁을 재건한다며 당백전 當百餞
을 만든다고 절에있는 모든 쇠붙이를 떼어갔다고 한다. 그때 여기 범종도
떼어가 한동안 부석사에는 범종이 없었다고 한다. 순종 때 다시 범종을 제작했지만,
무게의 하중이나 소리의 울림판 등 여러 이유로 다시 범종루에 모시지 못하고 따로
범종각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이제무량수전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안양
문安養門 계단 앞에선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
시고, 무량수전 앞에는 안양문을 세웠으니 부
석사는 바로 극락세계를 이 땅으로 옮겨놓은
사찰이다.
석등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양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보
이는 것이 마당 중앙에오롯이 서있는 석등이
다. 무량수전의 정면에서 살짝 왼편으로 빗겨
서 있는 석등은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사면에 화창 火窓을 내었
고, 창 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석등은 궁궐이나 저택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단다. 주로 사찰
과 능묘 같은 유적지에서 발견되며, 불교 전래 이전의 능묘에서도 발견되
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석등이 불교에서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와 함께 들어온 석등은 불전 혹은 탑 앞에 설치되어 그곳을 밝혀 주
는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였고, 공양의 의미와 부합하여 ‘헌등’ 또는 ‘광
명등’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아름다운 석등이 비추고 있는 게 그 유명한 무량수전 無量壽殿이다. 부
석사는 어디 있는지 몰라도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
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기둥 사이의 거리가 넓고 기
둥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무량수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온 공민왕의 친필이란다. 676년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고 의상대사가 창건한 건물은 비록 불타 없어졌어도,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창건 연대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으로, 1308년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비해 무량수전은, 1916년 해체 보수 시
에 발견된 묵서명 墨書銘에 의하면 1376년에 중수하였다 하였으니, 창건은
이보다 100년 이상 앞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지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이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선 1363년에 중수
한 기록이 발견되어, 창건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는 한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건물 ’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
미가 있으랴. 무량수전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타이틀이 굳이 필
요 없을 만큼 우리나라 목조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건물이지 않은가 말
이다.
고풍스러움을 자아내는 법당으로 들어서자 특이하게도 부처가 서쪽에
모셔져 있었다. 남향하는 건물의 서편에 불단을 만들고, 아미타여래상을
동향으로 안치한 것 이다. 그 이유로 두 가지설이 등장 한다.
첫째로 부처님은 원래 서방정토 西方淨土에 계시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
미에서 서쪽에 모셨다는 설, 둘째는 건축구조 특성상 긴 직사각형의 터
가 나와 공간 활용 측면에서 부처님을 한쪽으로 모셨다는 설이다. 무량
수전 앞의 석등이 정면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 무의식중에 사람
의 발길을 오른쪽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도 직사각형의 터를 좁아 보이지
않게 활용한 한 방법이라 하겠다.
실은 무량수전뿐 아니라, 부석사는 가람 배치 자체가 그저 감탄을 자
아낼 수밖에 없는 경지이긴 하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이 둘을 다 생각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이 무량수전에 대한 염원의 강도인 것 같으
니 말이다.
이는 무량수전의 바닥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마룻바닥이라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남아있는 녹유전 綠釉塼의 흔적또한 후설 後設된목
조 불단으로 인해 가려져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세계의 땅은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장엄한 극락세계의 수
승殊勝(세상에희유하리만큼 아주 뛰어남)을 표현한 것이란다. 무량수전 역시아미
타불이 상주하는 극락정토라는 생각에서 그 내부 바닥을 녹유전으로 깔
아 극락세계를 그대로 연출했다.
여기서 녹유전이란 법당 내부에 까는 벽돌로, 표면에 0.3cm 정도의 유
액을 발라서 녹색의 광택이 나도록 한 것이다. 무량수전의 녹유전은 법
광사지 法光寺址에서 출토된 것 (27.5cm×27cm) 보다는 작지만, 유약 처리가 훨
씬 두꺼운 것이특징이다.녹유전을 통해 극락정토를 희원 希願하는 신라인
의 깊은 불심과 그들의 높은 문화 수준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무량수전에 주불로 모신 소조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높이
278cm, 광배 높이는 380cm이다. 여기서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황금빛 몸과 풍만한 얼
굴에 양쪽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으며, 머리는 육계(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돌기한 살의 혹)가 뚜렷하고 검은색을 입혔다.
통일신라시대불상 조형을 계승하였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면에서
시대적인 양식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하겠다. 불상의 뒤로는 금빛
을 입힌 독립된 목조 광배가 놓여 있고, 위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닫집이
세워져 있어 장엄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미타불께 예를 올리고 무량수전을 나와 보니, 동편 뒤쪽으로 선묘의
화상이 안치되어 있는 선묘각이 보인다. 선묘각 자체는 오래 전부터 있었
으나 화상을 안치한 것은 최근의 일이라 한다. 그래도 사랑의 전설의 주
인공인데 싶은 마음에 걸었던 기대는 막상 화상을 보자 단숨에 무너졌
다. 그야말로 부처에 선녀 옷을 입혀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던 거다. 본심을 말하자면,
아무리 전설에서 여성성이 배제된다고는 하더라도 그래도
‘낭자’일진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맘이랄까. 귀부인과 같은 모습
을 한 범천 梵天(우주 만물 조화의 신)이나 제석천 帝釋天(십이천의 하나로 동쪽의 수호신)
보다도 훨씬 늠름하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소조여래좌상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이라 칭할 만한
거대한 소조불상으로, 국보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타까움만 남긴 채 선묘각의 문을 닫고, 무량수전보다 조금 위쪽에
위치한 부석사의 삼층석탑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2중 기단 위에 3층 몸
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범종루 앞의 삼층석탑인 쌍탑이 원래는 부석
사 안에있는 것이아니었다(쌍탑은 절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서 1967년에이건한 것이
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부석사 삼층석탑 무량수전의 동쪽에 자리 잡은 높이 526cm의 삼층석탑은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 사바세계의 상징이라는 이 삼층석탑을 지나 의상대사의 진영 眞影
을 안치하고 있는 조사당으로 향한다.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201년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후 고려공민왕 때의
병화兵火로 소실된것을 1377년에원응국사 圓應國師가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
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조사당 처마 밑에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철장 속에갇혀있는데,이것
이 그 유명한 선비화이다. 의상대사가 천축(지금의 인도)으로 떠나면서 석단
위에 지팡이를 꽂으며 “이 지팡이가 살아 있음을 내가 살아 있음으로 알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처마 밑이라 비나 이슬을 맞지 못하면서도
지금까지작고 노란 빛의 꽃을 피워내며 신비롭게 살아서 의상의 영험함
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당과 선비화 고려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조사당은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사당 벽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벽화가운데
가장 오래된작품으로 국보 제 46호로 지정되어있다.
조사당 건물이나 선비화도 선비화지만, 조사당을 진짜 유명하게만든 것은
조사당 벽화가 아닌가 싶다.
조사당 벽화는 현존하는 사찰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18년에 일본이 본국으로 가져가려고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득 일본의 나라 奈良에 있는 호류지法隆寺가 생각났다. 깜깜한 건물
안, 어둠에 싸여 있는 담징의 벽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관상의 문제로 햇빛은 물론 어떤 인공적인 빛도 차단시킨 채, 손
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철망 안에 갇혀 있는 담징의 그림을 심
한 떨림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직접 가서 그린 그림
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가슴이 시렸는데, 조사당 벽화를 일본
의 어딘가에서 보았다면 어떤 기분 이었을까 싶었다.
우리나라 회화사에서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사당 벽
화는, 조사당 건물이 완성될 무렵인 1377년 그 내벽에 그린 6폭짜리 그림
이다. 길이 205cm, 폭 75cm 정도의 크기로,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 하였다.양쪽의 범천 梵天과 제석천
帝釋天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
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고려 불화풍이 꽤 간직되어 있는 편이다. 양식적으로는
12~13세기의 불화 양식과 비슷하며, 생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보장각 내의 유리장에 보존되어 있지만 이제 곧 현대식 건물의
<부석사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하니, 지금의 나처럼 후세의 누군
가에게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본다.
조사당을 내려와 숲길안쪽으로 더들어가야 오불회괘불탱 五佛會掛佛幀이
안치된 응진전과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된 자인당이 나온다. 부석사의 가
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셈이다.
응진전에 안치된 오불회 괘불탱은 부석사에 전래되어오던 1684년 괘불(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의 도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비로자나
불을 첨가하여 1745년에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괘불이란 야외 의식을 위
해 제작한 큰 불화를 가리킨다.
오불회 형식은 조선시대 이르러 단행된 종단의 통폐합에 따른 삼신불 三
身佛과 삼세불 三世佛 사상의 결합으로 나타난 도상이다. 대형의 군도 형식의
불화지만 안정된 구도를 보여주며, 인물 묘사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
치를 보이는 등18세기 중반의 불화양식이 잘 나타나있다.
응진전 옆의 자인당에는 3좌의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중 좌우
의 양편에 모셔진 두 불상이 바로 석조여래좌상으로, 원래 부석사 동쪽
폐사지 廢寺址에 있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이 두 불상은 9세기 후반기
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불교 사상의 특징과 불상 양식을 알
려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른편의 불상은 나발 螺髮(나사 모양으로 돌돌 말린 머리형태)에육계의형태가
불분명한데, 눈은 뚜렷하지 않지만 입가에 미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 얼
굴은 둥근 편이지만 어깨가 너무 뒤로 젖혀지고 가슴과 배가 평편하게
표현되는 등 신체의 볼륨은 없는 편이다. 왼쪽의 불상은 오른쪽 불상과
비슷하지만 신체가 좀 더 풍만하여 부드러운 편이다. 왼쪽 불상의 광배
나 팔각대좌의 모양 조각이 아름답게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오른쪽 불상
의 광배나 대좌에는 조각 문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한눈으로 보기엔
왼쪽 불상이 훨씬 화려해 보인다.
뜬금없이 다보탑과 석가탑이 생각났다. 나란히 있으면서 화려함과 정
갈함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엉뚱
한 방향이긴 하지만, 어쨌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움에 도취하게
만드는건 모두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부석사를 한 바퀴 돈 셈이니 해가 떨어질 낌새를 보일 때까지 잠시 자
인당의 귀퉁이에 앉아 있기로 한다. 여기가 제일 높은 곳이니 밑이 훤히
보일 거라는 기대는 여름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초록가지에 사정없이 무
너져 내렸다. 한낮에 잠시 내린 소나기 덕분인지 그저 싱그러운 초록과
촉촉한 흙냄새가 멀리 소백산의 산등성이들과 함께 내 오감을 자극할
뿐이었다. 자연이라는 게, 완전히 자연 속에 내가 있다는 느낌이라는 게
바로 이런것 이리라.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간 오늘의 진짜 목적을 놓칠 수도 있다 싶어 나뭇
잎 사이로 아직 햇살이 내리비칠 때 자리에서 일어나 무량수전으로 향한
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 했겠다, 오늘은 꼭 그 장
관을 확인하고야 말리란 각오로 말이다.
아직 물기 머금은 돌에 슬쩍 미끄러지는 듯 아차 하는 순간을 용케 넘
기고 좁은 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왔건만, 소문처럼 무량수전 앞이 영 명
당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풍성한 나뭇가지들이 말 그대로 떨어지는 해를
가리고 있는 거다. 아직 붉은 기운도 안 올라오는데, 무량수전 앞뜰은 이
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찌할까 하다 생각해낸 것이 가장 해가 오래
비추는 곳을 찾는 거였다. 자정전 앞의 철쭉이 아직 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내려가 자정전으로 가 자리를 잡는다.
어느새 태양은 산등성이 바로 위에서 오늘의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
다. 손으로 챙을 만들어 산등성이로 내려앉는 해를 실눈으로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어 연달아 사진 몇장을 찍는다. 장엄한 이 경관을 똑딱이
디카로 담아낼 수 있겠냐마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 조잡한 사진을
바라보며 오늘을 기억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부석사 은행나무 길 은행나무가로수가많은영주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부석사의은행나무 길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는 가을도 장관이지만, 초록이 가득한 여름도 싱그러움이 넘쳐난다.
북소리가 들린다.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리니 범종루에서 스님이 북을
치는 모습도 설핏 보인다. 저녁 예불이 시작되었나 보다. 범종루에 있는
법고, 운판, 목어, 그리고 범종각에 따로 놓여 있는 범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순서도 있다고 한다. 본전 本殿에서 저녁 불경을
시작으로 법고, 목어, 운판, 범종, 그리고 다시 본전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식이다.
법고는 네 발 달린 모든 축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치는 거란다. 북은
소의 암수 가죽으로 만들어야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는 음양
의 조화를 뜻하는 거란다. 나무로 된 물고기인 목어는 모든 물고기를 제
도하기 위함이요, 구름 모양의 쇠붙이로 만든 운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든날짐승을 제도하기 위함이요, 범종은 인간을 제도하기 위함이란다.
여기서 잠깐! 범종은 왜 33번 칠까 싶은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으신지?
사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치는 보신각
의 종소리다. 왜 33번일까? 독립투사 33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요즘
세상에 그런 말 하면 넘 무식하다고 친구들 다 떠난다. 나도 이 의문을
가진 건 일본에 있을 때였다. 일본에선 108번을 친다. 108번뇌의 108번이
다. 그렇다면 우리의 33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참
거대한 뜻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타종의 33번은 ‘28계 33천’이라는 우주관에서 유래한 것이
란다. 도솔천을 중심으로 하늘이 33천으로 되어 있다는 사상에서 온 것
으로, 33천에 사는 사람들은 무병장수하기 때문에 새해를 맞는 사람들
도 그들처럼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33번 타종했다고 한다. 또한
28계는 동양에서 생각하는 하늘의 별자리 28수 宿를 상징한다고 한다. 따
라서 절에서는 33번의 타종으로 아침을 열고, 28번의 타종으로 저녁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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