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연구회 2012년 4월 답사가 4.21(토) 13:00-17:00 우중에도 강행됐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한나절이 지나도 계속 내린다. 그래도 답사는 강행됐다.
13:00 시민회관 전시실 앞에 모였다가 마침 천연염색 전시회 구경도하고
13:30 단산면 사천리에 있는 구고서원으로 향했다.
빗물을 가르며 달려 20여분 후 구고서원에 도착했고 청소도 하고 거미줄도 걷었다.
30여분동안 문화재지키미활동을 하고 선비문화수련으로 갔다.
선비문화수련원 한옥방에서 선비문화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하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문제점과 대책에 대해서도
깊은 논의를 했다.
한옥 기와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는 해가 저물 때까지 주룩쭉쭉 흘렸다.
구고서원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선비문화연구회2012-0421답사
소백산자락길 문화재
1. 풍기향교
풍기향교는 1432년(세종 14)에 현유(賢儒)를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원래 군 서쪽 8리에 있던 것을 1542년(중종 37)에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현위치로 이건한 후, 1692년(숙종 18)에 다시 구기(舊基)로 환이(還移), 1735년(영조 11)에 다시 구지(舊址)로 이건한 풍기향교이다. 현재는 풍기 항공고등학교 구내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의 배치형태는 알 수 없으나 내삼문, 대성전, 동·서무로 이루어진 묘의 공간 우측에 명륜당, 헌관실, 관리사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기와집이다. 평면은 전면 퇴간형식인데 퇴칸 좌측에는 벽체를 설치한 후 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문은 어칸에만 설치하였는데, 가운데에 쌍여닫이를 두고 양쪽에 외여닫이를 두었다. 중앙의 쌍여닫이문은 인방 바로 밑에 설치하였으나 양측의 외여닫이문은 인방 밑에 부재를 덧대어 키를 작게 하였는데, 이는 문비가 어칸에만 있기 때문에 양측의 문을 중앙의 문보다 낮게 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협칸에는 광창이 낮게 붙어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돌 원형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는데,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은 전면에만 3개를 설치하였다. 원주는 약한 배불림이 있으며 기둥의 하단부에는 예를 표하기 위해 백칠을 하였으며 주상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접시동자주와 양동·서무는 정면 3칸의 맞배기와집인데, 주고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내부는 통칸으로 처리하였으며, 어칸에만 쌍여닫이문을 설치하였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1979년에 해체복원하여 원형이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헌관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평면은 2칸 온돌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면에는 퇴를 두었다.봉이 종량을 받고 그 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게한 5량가이다.
2. 소백산자락길
소백산 자락길 중 제1자락길은 선비길-구곡길-달밭길이다. 이 길은 선비가 다니던 선비길이며 죽계구곡 따라 오르는 구곡길이고 다닥다닥 달밭 사이로 걸어가는 달밭길이다. 달뙤기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달밭골이라 불렀다니 그 이름 또한 재미있다. 여기는 소백산 12자락길 중 제1경이요 소백산의 숨겨진 비경이다.
옛날 화랑도들이 유오산수(遊娛山水, 산수와 노닐고 즐김)하던 길이며 구한말 의병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몰래 다니던 길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돌다리와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힘겹게 계곡을 올랐으나 자락길로 개발되어 아담하고 예쁜다리들이 놓여져서 편하게 오를 수 있다. 고즈넉한 오솔길을 따라 죽계를 오르노라면 과수원길, 야생화길, 신록길, 단풍길, 터널길, 낙엽송길, 가랑잎길, 억새길 등등 계절에 따라 다른 이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소백의 정기는 계곡따라 흐르면서 탐방 온 아이들에게 영재의 기를 팍팍 넣어준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에 오는 수가 주말과 일요일에는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앞으로 갓바위 명성에 도전할 소백산 제1자락길을 기대해 주시기 바란다.
3. 초암사
신라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초막을 짓고 임시로 기거하던 곳으로 요즘 말로 하면 Base camp 역할을 하던 곳이다. 명당 자리를 찾아 부석사를 세우고 이 자리에 절을 지어 초암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층석탑과 동부도, 서부도 등은 경북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6,25 때 전소된 후 최근 중건하였으며 당대에 사용된 축대와 주춧돌이 천년고찰의 증표로 남아있다.
4. 비로사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산사로 680년 문무왕 2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의 고찰이다. 그 후 서기 931년 이전에 진공대사가 중건 한 후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공대사보법탑비와 석조당간지주 등 경북유형문화재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6호) 등 주요 유물들이 남아있다.
5. 죽계구곡
고려 후기 문장가인 안축의 죽계별곡의 주 배경이며 이황, 주세붕 등 유현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현재 바위에 새긴 구곡은 영조 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주희의 무아구곡을 본 다 이름 붙인 장소이다.
6. 배순의 정려비(旌閭碑)
조선 중기 이 지방에서 대장간을 하던 충신 배순의 정려비이다. 광해군 7년(1615)에 정려되어 인조 27년(1449) 손자 배종이 비석을 세웠고 영조 31년(1755) 그 7대 외대손인 임만유가 충신백성이란 말을 넣어 고쳐 세웠다. 원래 배점초 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던 것을 남쪽 도로변 저수지 근처로 옮겼다가 최근 다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대장장이 배순은 천민 출신이라 공부를 할 수 없었다. 10여리 길을 걸어 소수서원 강학당 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퇴계 선생이 안으로 불러들여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였고 그로인해 배순은 성리학의 거성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됐다. 배충신이 매월 삭망으로 한양을 바라보면서 선조께 3년동안 제사를 지내던 장소라 하여 국망봉(國望峰)이 되었고 배충신 대장간 점포가 이었던 마을은 배점(裵店)이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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