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栢巖) 종가(宗家) 길사(吉祀)
Ⅰ. 길사(吉祀)의 개념(槪念)
1. 길사란 무엇인가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길사(吉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유교(儒敎)의 예법에 따라 나를 기준으로 위로 4대 조상까지 제사를 모셔 왔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제 내가 제사를 맡아 지내야 하니 조상님들께 신고를 하게 되는데 신고의 예를 갖추는 제사를 길사(吉祀)라고 일컫는다. 길사일에는 많은 자손과 인척, 사돈 관계에 있는 후손들이 참여한다. 경비는 대부분 문중에 감당하니 길제는 문중의 큰 축제이고 이 길사를 통해 문중의 정체성과 긍지,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의식이다.
2. 길사의 의미(意味)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상복을 입고 담사(담祀)를 지내면서 마지막 상례(喪禮)가 종결 된다. 상례를 종결한다는 뜻은 상주의 임무를 마친다는 뜻이다. 담사를 지내고 한 달이 지난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게 길사 이다.
길사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다. 우선 제사를 지내는 주제자가 한 대 내려가니까 사당에 있는 신주위에 써 놓은 호칭을 하나씩 올려 써야 한다. 즉 아버지(考位)의 신주가 새로 마련되고 그 아버지신주는 이제는 할아버지의 신주로, 할아버지 신주는 증조부 신주로 하나씩 높여 다시 써야 한다. 이제까지 제일 윗대로 제사를 받든 아버지의 고조부 신주는 이제 사당에서 내와서 묘소 앞에 묻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걸 우리는 매주(埋主)라고 부른다. 때로는 조매를 하지 않고 그 기차(其次)집에서 4대의 자손이 다 죽을 때 까지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한다.
3. 길사는 종손 ․ 종부의 취임식
길사를 지냈던 집은 불천위 제사가 있는 종가이거나 적어도 10 몇 대의 주손 일 때는 큰 행사가 되는데 모셔야할 제사가 4대 미만인 집은 대게 간략하게 지내왔다.
그러니까 길사란 제사를 지내야하는 책임자가 바뀌는 행사 이다. 요즘 의식으로 보면 종손과 종부의 취임식라고 칭하면 맞을 것 같다. 길(吉)자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조상의 죽음을 슬퍼하는 상례에서 벗어난 의례로 보기 때문이다.
길사를 지내는 절차는 현대인의 시각이나 글로벌 세대에서 보면 아주 복잡하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면도 있다.
우리나라 종가의 길사를 보면 참 복잡한 의식을 거친다. 길사 자체가 상기를 다한 고인이 이제 사당으로 모셔지는 절차를 밟아야 하고 사당 안에서 불천위(원위)를 뺀 최고위 조상으로 모셔져 있던 고조위는 사당을 떠나는 의식을 치루어야 하고 상주의 신분에서 종손 자리에 오르면서 차종손으로 부르던 상주의 호칭도 길사를 마침으로 종손 이라고 부르게 된다.
4. 명문가와 전통
명문가를 자처하는 가문은 전통을 왜 그토록 지키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지켜온 사람은 누굴까? 한마디로 종택 문화는 훌륭한 선대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선대는 누구인가? 백암 종가, 그 가문의 원위(元位)는 바로 민절공 시호를 받은 백암 김륵이다.
Ⅱ. 백암(栢巖) 김륵(金玏)
1. 백암 김륵은 누구인가
백암 김륵은 1540년(중종 35)~1616(광해 8), 자는 희옥(希玉)이고 호는 백암(栢巖)이다. 아버지는 형조좌랑(刑曹佐郞) 김사문(金士文)이고 어머니는 인동장씨 장응신의 따님이다.
2.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40년(중종 35) 경상북도 영천 백암리에서 태어난 김륵은 16세에 안동의 명문 출신인 인동장씨(仁同張氏)와 혼인하고, 25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 때 함께 합격한 사람 중에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묶어 용호방(龍虎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사마시 합격 이후 생부 김사명(金士明)과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상사를 당하여 고향에 머물던 김륵은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하는 일을 주도하며 영천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고, 흑석사(黑石寺)와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지에서 학업에 열중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37세가 되던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김륵은 곧이어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 검열을 지낸 뒤 성균관 전적·예조 좌랑·사간원 정언 등 조정의 주요 문한직(文翰職)을 거치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580년 잠시 고산찰방(高山察訪)에 보임되었던 김륵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이조 좌랑 등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와 조정의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병조의 낭관(郎官) 등 핵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584년(선조 17)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부임해서 5년간 재직하는 동안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사당을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는 등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89년(선조 22) 김륵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돌아온 뒤 사헌부 집의와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며, 16세기 후반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영남 사족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큰 활약을 보였다.
3. 임진왜란 극복에 큰 공을 세우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안집사(慶尙道安集使)에 임명된 김륵은 초모문(招募文)을 집필하여 도내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집경전(集慶殿)에 봉안되어 있던 임금의 초상을 청량산에 임시로 봉안하게 하고, 의성·예안·안동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공로를 세워 이듬해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다.
김륵은 안동에 머물며 가난한 백성의 구제 대책을 마련하고 군량을 수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경상우도 관찰사에 올랐다가 곧이어 조정으로 돌아가 승정원 도승지·사간원 대사간·성균관 대사성에 연이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에는 사헌부 대사헌·이조 참판·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5년(선조 28)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올라 수원·전주·남원·거창·진주·대구·창녕 등지를 순시하며 군졸들을 위문하고 전황을 살폈다. 이때 한산도(閑山島)와 거제도(巨濟島)에 들러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한 수군의 활약상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들의 전공을 치하하였다.
1598년(선조 31) 다시 대사간과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김륵은 선조의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세(時勢)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달하였지만,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의 무고함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잠시 물러나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4.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물러나다.
전쟁이 끝난 뒤 1600년(선조 33) 병을 이유로 고향인 영천으로 물러난 뒤 김륵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찾아뵙고,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 등 벗들과 이산서원에 모여 강학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형조 참의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가게 되어 호조 참판 및 주역 교정청(周易校正廳)의 관직을 맡게 되었고,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전란 후유증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후 안동도호 부사를 거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안동에 머물며 유성룡과 더불어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의 교정에 간여하였다.
1608년(선조 41) 대사성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간 김륵은 1610년(광해군 2)에는 대사헌에 올라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된 동인(東人)의 억울함을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황과 이언적을 비롯한 5현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생모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왕후로 추존하려는 광해군의 뜻을 비판하다가 노여움을 입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고향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에는 대북(大北) 세력이 꾸며낸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은 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백암문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Ⅲ.백암(栢巖) 종가(宗家)
1. 宗宅 , 宗孫은 家門의 상징
종손 종부가 사는 곳을 종택(宗宅)이라 하며 명문가를 자처하는 가문은 종택(종손, 종부)이 전통을 그토록 지키려고 몸부림친다. 그르면 이를 지켜온 사람은 누굴까? 한마디로 종택 문화는 훌륭한 선대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2. 백암 종가 사람들
지금 우리는 오랜 농경사회에서 벗어나 산업사회에 잠시 머물다 최첨단 정보사회를 맞이했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도도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전통을 보전하고 이어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백암 종가 사람들은 달랐다. 불천위 제사에 4대 봉사까지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전수하고 있다. 종손과 종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고집하고 있고 차종손과 차종부도 선조들의 뜻을 존중하고 정성을 다해 종가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3. 시호(諡號) 와 불천위(不遷位)
우리나라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은 시호(諡號)와 맞물려있다. 시호 이외엔 다른 훌륭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없다. 훌륭한 사람이 죽으면 시호 논의가 일어나고 시호가 내리면 국가적 인물로 공식 승인된다.
시호는 압축되고 정밀한 의미가 부여된 文, 武, 貞, 恭, 敏, 襄, 孝, 莊, 敬, 節 등 120여 가지의 글자를 상호 조합해 짓는다.
백암 김륵은 민절(敏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시호가 ‘敏節公’ 이라면 그 뜻은 지혜와 총명함으로 학문을 높아 쌓았으며, 청백하고 절개를 지킨 분이라는 뜻이 틀림 없을 것 같다. 글자의 의미를 알면 시호를 보고도 그 분의 생애와 특징적인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름보다 ‘忠武公’이란 시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듯 시호의 내림은 생전의 이력으로 이미 그 가부(可否)가 어느 정도 공론화 되며, 심사제도 역시의 객관성과 투명성으로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다.
사대부 최고 영예는 생전에 대제학(大提學) 벼슬이고 사후엔 시호 내림이었다. 또한 시호는 ‘영예로움의 표창’ 만으로 끝나지 않고,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 시호가 내려진 인물은 국가 원로나 공훈자로 추대되므로 존경과 더불어 영원히 추모 받을 권리가 합법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봐야하며,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4. 종택(宗宅)의 연원(淵源)
시호가 내리면 묘비의 글을 다시 쓰고 고유(告由)한다.
황색교지(黃色敎旨)를 태워 그 연유를 고(告)하기 때문에 분황고유(焚黃告由)라 한다. 이 때 자손들은 간혹 ‘이 할아버지에 대해서만’ 이라 전제하에 은연 중 추모 논의를 한다. 훌륭한 조상을 추모하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불천위 옹립 여론이 일어나면, 여론이 향촌(鄕村)의 동의와 유림들의 공론(公論)을 얻게 되면 추모(追慕)의 집을 짓고 고유를 한다.
그 집을 사당(祀堂) 혹은 별묘(別廟)라 하며 그 안에 감실(龕室)이란 공간을 만들고 신주를 모시게 된다. 이렇게 모신 신주는 살아계신 듯 경건하고 신성하게 보호된다. 사당을 짓고 신주를 모시면 자손들은 정해진 날 추모 의식을 하며,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게 된다. 추모의 예(禮)는 “제사”고, 손님 접대는 접빈이다. 이를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라 하며, 이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이 종손이고, 그 아내를 종부라 한다. 나머지 자손들은 지손(支孫)이라 하며, 적손으로 내려오는 손자가 종손이고, 종손을 지원하는 자손이 지손이다. 이를 조직화 한 단체가 문중(門中)이며 이로써 한 가문(家門)이 탄생한다. 종손의 집은 다른 집과 다르게 솟을 대문의 집을 짓는데 집성촌(集姓村)에 솟을 대문이 있는 집이 종가며, 다른 명칭으로 종택 이라고도 한다. 종택은 가문 탄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한편으로 자손 모두의 의지와 문화의 중심체이기도 하다.
5. 종택의 구성 요건
종택의 구성요건은 누구나 알만한(인정하는) 훌륭한 인물(조상:시호와 불천위)이 있어야 하고, 이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 있어야 하며, 사당을 지키는 수호(守護) 주체의 공간(큰 집, 재실 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당 수호를 전담하는 즉, 맏아들로 이어온 직계후손 종손(宗孫)이 있어야 하고, 이 후손을 외곽에서 보호하는 후손(지손)들이 있어야 하고 이 지손들로 구성된 단체(문중)가 있어야 한다. 즉 불천위 종택이 되기 위해선 조상, 사당, 큰집, 종손(宗孫), 지손, 문중으로 구성된 유기체가 갖춰야 한다.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상, 사당, 종택은 하드웨어 격이고, 종손, 지손, 문중은 소프트웨어 격이다.
이런 구성 요건 속에 작동이 원활히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천위 종택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 종손(宗孫)과 종부(宗婦)가 있다.
6. 종부는 길사(吉祀)의 꽃이다.
종부는 이날 원삼을 곱게 차려입고 족두리를 쓰고 좌우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사당(祠堂)에 나아간다. 종부가 입는 원삼(圓衫)은 부녀(婦女)의 예복(禮服)으로 앞길이 둥근데서 온 명칭으로 옆이 터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족두리는 여러 가지 보석으로 꾸며 예식용으로 사용하던 관의 하나이다. 조선 영조 이전에는 가채로 인한 사치(보석장식)가 심해 영조가 가채금지령을 내리자 족두리가 유행했다고 한다.
이날 종부(황앵상 黃鶯相, 창원황씨)는 원삼 예복에 수놓은 댕기와 어깨에 수를 놓은 저고리를 입었다. 여기에 새겨진 수는 행운과 권위, 부부애, 영원한 삶 등을 담고 있다고 한다.
민절공(敏節公) 김륵 종가의 종손(宗孫)과 종부(宗婦)
대 (代) |
종손 휘(諱) |
자(字), 호(號) |
관직 |
배위(配位) |
비고 |
1 |
김기선(金幾善, 1568~1613) |
원길(元吉), |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 |
ᐧ반남박씨(父,박 록,外祖 허사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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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김겸(金겸, 1590~1626) |
응구(應久), |
생원(生員),이괄(李适)의 반란에 의병참모(義兵參謀) |
ᐧ의인(宜人) 경주이 씨(父,교리 이광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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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김종준(金宗準, 1616~1666) |
경칙(景則), |
통덕랑(通德郞) |
ᐧ공인(恭人) 풍산류 씨(祖,류성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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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김정하(金鼎夏, 1643~1722) |
중숙(重叔), |
|
ᐧ남양홍씨(祖,두 곡 홍우정) ᐧ고령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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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김비연(金斐然, 1665~1689) |
문백(文伯), |
통덕랑(通德郞) |
ᐧ공인(恭人) 인동장 씨(父, 장령 장진)
|
|
6 |
김홍운(金弘運, 1711~1753) |
응보(應甫) |
|
ᐧ진성이씨 |
|
7 |
김일련(金一鍊,1733~1799) |
순칙(純則), |
효릉참봉(孝陵參奉) |
ᐧ의인(宜人) 의성김 씨(曾祖, 김성구) ᐧ의인(宜人) 수성라 씨(祖, 나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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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김영희(金永羲,1769~1833) |
일소(逸少)/서계(西溪)ᐧ정좌재(靜坐齋) |
문행이 있어 사림에서 삼도(三道)의 소수(疏首) |
ᐧ청주정씨(曾 祖, 정옥) ᐧ나주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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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김락호(金樂浩, 1798~1835) |
선오(善吾) |
|
ᐧ청주정씨 ᐧ평해황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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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김휘태(金輝泰, 1826~1867) |
대래(大來) |
통덕랑(通德郞) |
ᐧ공인(恭人) 의성김 씨(父,승지 김용락) |
|
11 |
김경규(金慶奎, 1846~1879) |
시응(時應) |
|
ᐧ의성김씨 |
|
12 |
김택진(金澤鎭, 1874~1960) |
원중(源仲)/동려(東黎) |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사람로 서명 |
ᐧ완산최씨 ᐧ야성송씨 |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음. |
13 |
김제동(金濟東, 1892~1938) |
치민(致民)/가전(可田) |
|
ᐧ진성이씨(曾祖, 이휘녕) ᐧ의성김씨 |
|
·14 |
김만영(金萬榮, 1926~2009) |
응일(應一), |
|
ᐧ풍산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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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김양묵(金養黙, 1950~) |
호연(浩然), |
|
ᐧ창원황씨 |
|
16 |
김준모(金埈模, 1976~) |
맹범(孟範), |
|
ᐧ천안전씨 |
|
Ⅳ. 길사
1. 길사를 준비하는 손길들
가. 길사 전날
편에 떡을 괴는 시각 옆방에서는 종녀가 적환에 제물을 괴고 있는 데 이 또한 정성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떡은 편대에 괴고 고기는 적환에 괸다. 먼저 적환 바닥에 명태 아홉 마리를 깔고 그 위에 배추적 세 채를 괴고 그 위에 전(명태전) 세 채 얻은 다음 돼지고기 꼬지 다섯 채를 놓고 마지막으로 쇠고기 꼬지 다섯 채를 올려 마무리 한다. 꼬지를 꿰고 한 채 한 채 올리는 정성이야말로 효심이 아니면 할 수 없고 종가 사람들만이 해내는 일이다. 저녁 식사 후 사랑방에서는 남자들이 과일을 괸다. 밤과 대추, 호두와 땅콩을 괼 때는 제물과 편을 괼 때와는 또 다른 집중과 세밀함과 인내를 요한다.
대추를 괼 때, 먼저 대추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정종과 설탕을 조금 넣어 섞으면 윤기가 나고 접착이 잘 된다. 목기 가장자리에 대추를 빙둘러 놓고 가운데 대추하나를 놓아 높이를 맞추고 빈 공간은 쌀로 채운다. 그 위에 복지를 놓고 다시 대추를 빙둘러놓고 채우고 또 복지를 놓고를 반복하여 일곱채를 괸다. 밤과 호두 땅콩 등 다른 과일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괴는데 밤 대추 호두는 일곱채, 땅콩은 열한채를 괴어서 높이를 맞추는데 모두 홀수로 괸다고 한다. 호두와 땅콩은 더욱 시간이 많이 걸려 한 접시 괴는데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 각각 여섯 접시를 괴야 하니 모두다 괴고 나면 날이 샌다고 한다.
나. 길사의 새벽
음력 시월 열엿새날(양력 11.21) 새벽은 어둡고 춥다. 노종부가 기침을 하니 종부와 차종부가 자리를 떨고 일어나 부엌 일을 시작한다. 노종부는 제기를 만지고 종부는 탕과 채를 장만한다. 차종부와 친인척 부녀자들은 아침 식사 준비와 200명이 넘는 제관들의 음복례 준비를 해야 한다. 제상에는 삼채와 오탕이 올라가야 한다. 삼채는 나물인데 콩나물과 무우, 고사리와 도라지와 토란, 오이와 배추와 시금치를 담는다. 탕은 오탕을 만드는데 소탕(두부)탕, 육탕(쇠고기)탕, 육탕(돼지고기)탕, 어탕(명태), 알탕(계란) 이다. 이 얼마니 잔손길 많이 가는 음식인지 종가 사람이 아니면 모를 일이다. 예부터 백암 종가에서는 음식을 많이 잠만하여 제관과 마을 사람들이 넉넉히 먹을 수 있도록 했고 이웃과 마을에 어려운 사람들까지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고 하니 적선과 나눔에 익숙했던 백암가의 정신을 오늘에 본받아야 할 것 같다.
다. 시도석(時到席)과 집사분정(執事粉定)
길사 예정 시각이 오전 10시다.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종가로 걸어서 들어오는 종친도 있고 승용차에서 내리자마자 도포에 유건을 쓰고 오는 제관도 있다. 친인척 관계와 사돈 관계에 있는 사람 등이 서로 악수로 인사를 나누는데 원로 종친에게는 읍하기도 하고 허리 깊숙이 굽혀 절을 하기도하는 모습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면이다. 의관정제하고 상견례를 마친 종친들은 시도석에 들려 접수를 하거나 부조를 내기도 하고 방명록에 등록하기도 한다. 등록을 마친 제관은 분정에 참여한다. 집사분정은 전날 선성김씨 종친회관에 모여 이미 마쳤고 길사 당일 참석자에 대해 추가로 집사분정이 이루어지는데 분정 마지막 부분에 추가 참여자의 이름을 붓글씨로 써나가는데 그 필력이 예사롭지 않고 보기드문 장면이다. 집사분정한 한지(韓紙) 두루마리는 긴 현수막(懸垂幕)이 되어 구학정(龜鶴亭) 난간 아래에 걸었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15m나 된다.
[시도석 사진 19] [집사분정 당일 사진 20]
이날 집사분정은 다음과 같다.
丙寅十月十六日 吉祀時執事
相禮 金永鎭
初獻官 金養黙
亞獻官 宗婦
終獻官 金肅鎭 金濟晩 金漢珽 金暻鎭 金栢 金濟大
祝 金濟德 金聲浩 金明鎭 金周鉉 金昌濟 金善愚
贊者 金宗煥 外一人
陳設 金東元 外四人
奉香 金濟九 外五人
奉爐 金濟江 外五人
奉爵 金大鉉 外四人
奠爵 金濟旭 外四人
司尊 金濟卓 外六人
時到 金喜榮 外二人
直日 金光昊 外二十人
2. 진설(陳設)
종가 내당 대청(마루)에 보관된 제수는 집사분정 진설 담당자들이 제청(구학정)으로 운반한다. 떡과 제물은 편적대 통째로 들고오고 채와 탕 등 잔 그릇은 소반에 담아 옮긴다. 종가와 제청 사이의 거리가 100m 넘고 여섯 위에 차려질 제수의 양은 (편대 적대 국쟁반 접시 종지 등) 한 위당 33개 정도 되고 퇴주기와 향로 등 제기는 모두 200개가 넘는다. 그러기에 운반하는 인력도 남여 20여명이 넘는다. 옮겨진 제물은 정자 마루에 위별로 정렬해 두고 미비한 제수가 있나, 빠진 것은 없는지 점검한다. 점검이 끝나면 원위부터 진설을 시작한다. 앞줄 과실부터 진설하고 채와 탕을 놓은 다음 전과 적, 제물(고기), 면, 편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밥과 국을 진설하는데 조율이시(棗栗梨柹), 좌포우혜(左脯右醯), 면서병동(麵西餠東)의 격식이 적용되고 있다.
진설도
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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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사(吉祀)의 시작
가. 출주례(出主禮)
출주는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 내는 의식이다. 집사분정에 의해 선정된 축관 여섯명이 백암 선생 불천위 묘우(廟宇, 사당)으로 가서 사당 앞에 선다. 종손이 잠금장치를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면 축관들도 모두 입실한다. 모두 묘전에 재배(再拜)하고 일어섰다가 꿇어앉는다. 축관이 신주를 모셔 간다는 고축(告祝)을 읽는다. 축이 끝나면 모두 일어나 재배(두 번 절함)하고 일어선다. 축관들은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원위를 선두로 고조고, 증조고, 조고 순으로 제청(祭廳)으로 향한다. 원위 신주는 제상 안쪽 교의(交椅,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모시는, 다리가 긴 의자)에 모시고 다른 5대조 신주는 제상 가운데 안쪽에 모시면 출주례가 끝난다.
나. 취위(就位)
종손과 종부를 비롯한 모든 제관들은 의관정제하고 진설과 출주례를 지켜보다가 신주가 모셔지면 각자의 자리에 선다. 즉 취위란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한다. 이날 제관은 많고 자리는 좁아 여러 줄, 여러 겹으로 줄을 섰다. 종손과 축관, 헌관은 제청 안에 서고 원로들은 제청 마루에, 젊은 제관들은 정자 마당과 문간, 좌우측면에 임시 자리를 갈고 취위했다. 제관들은 불천위의 조상을 모신다는 자부심과 종손의 취임 축하하며 백암 선생을 추념(追念)하는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이 오래오래 전수(傳受) 되길 바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에 선다.
나. 청행례(請行禮)
신주가 봉안되고 제관이 취위하면 찬자(贊者 金宗煥)가 초헌관(宗孫, 金養黙) 에게 행례를 시작할 것을 청한다. 이 때부터 길사가 시작된다. 즉 청행례는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제사를 시작하자고 찬자가 제례의 주관자인 초헌관에게 청하는 예이다. [홀기사진 28]
다. 강신례(降神禮)
강신은 하늘에 계시는 혼(魂)과 땅에 계시는 백(魄), 즉 혼백(魂魄)을 인도하여 모셔오는 의식으로 옛 제례에서는 새벽(축시, 오전 1시-3시 사이)에 행하였으나 길사의 경우는 낮에 제를 올리기 때문에 제사의 첫 의식이 된다. 찬자(贊者,제향 때 홀기를 맡아보던 사람, 사회자)의 창홀에 의해 모든 집사가 위치로 나아간다. 축은 개독(開櫝, 제사를 지낼 때에 신주 모신 독을 엶)하고 제관들은 모두 재배한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신위 전에 나가 꿇어앉는다. 먼저 삼상향(三上香) 한 후 꿇어앉는다. 봉작(奉爵)이 술을 부어 초헌관에게 주면 초헌관은 술을 모사 위에 세 번 나누어 붓는다.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재배한다. [삼상향, 강신 사진29]
라. 초헌례(初獻禮)
제례에서는 삼헌(초헌, 아헌, 종헌)을 하는데 초헌관은 신위에게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순서로 반드시 주인(종손,金養黙)이 드리며 헌작, 독축, 재배 순으로 이어진다. 찬자가 “행초헌례” 창홀에 의해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한다. 초헌관은 원위(元位, 불천위) 전에 끓어 앉는다. 봉작이 술잔을 소반 위에 잔을 놓고 술잔에 가득 따르면 헌관이 받아 전작에게 주면 전작이 잔을 받아 신위 전에 올린다. 헌관이 부복하면 원위(불천위) 축관이 초헌관 왼쪽에서 동향으로 꿇어 앉아 축문을 읽는다. 축이 끝나면 모두 일어나 재배하면 원위 초헌이 끝난다. 이어서 향로와 집사가 고조위 전으로 이동하고 따라서 초헌관도 고조고위 전으로 이동하여 헌작, 독축, 재배를 하고 증조고위 전으로 이동하며 조고위와 고위 전도에서도 위와 같이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오대조위 전에서 헌작, 독축, 재배하면 초헌례가 모두 끝나고 초헌관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不遷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
孝玄孫養黙敢昭告于
효현손양묵감소고우
顯先祖考贈資憲大夫吏曺判書行嘉義
현선조고증자헌대부이조판서행가의
大夫吏曺參判諡敏節公府君
대부이조참판시민절공부군
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昭穆継序
죄역불멸세급면상세차질천소목계서
先王制禮不敢不至謹以淸酌庶羞祗薦
선왕제례불감부지근이청작서수지천
歲事 上
세사 상
饗
향
高祖考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
孝玄孫養黙敢昭告于
효현손양묵감소고우
顯高祖考處士府君
현고조고처사부군
顯高祖妣孺人義城金氏
현고조비유인의성김씨
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
죄역불멸세급면상세차질천
昭穆継序先王制禮不敢不至
소목계서선왕제례불감부지
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 上
근이청작서수지천세사 상
饗
향
曾祖考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
孝曾孫養黙敢昭告于
효증손양묵감소고우
顯曾祖考處士府君
현증조고처사부군
顯曾祖妣孺人完山崔氏
현증조비유인완산최씨
顯曾祖妣孺人冶城宋氏
현증조비유인야성송씨
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昭穆
죄역불멸세급면상세차질천소목
継序先王制禮不敢不至 謹以淸酌
계서선왕제례불감부지 근이청작
庶羞祗薦歲事 上
서수지천세사 상
饗
향
祖考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
孝孫養黙敢昭告于
효손양묵감소고우
顯祖考處士府君
현조고처사부군
顯祖妣孺人眞城李氏
현조비유인진성이씨
顯祖妣孺人義城金氏
현조비유인의성김씨
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昭穆
죄역불멸세급면상세차질천소목
継序先王制禮不敢不至 謹以淸酌
계서선왕제례불감부지 근이청작
庶羞祗薦歲事 上
서수지천세사 상
饗
향
考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孝子養黙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효자양묵
敢昭告于
감소고우
顯考處士府君 喪制有期追遠無及今以
현고처사부군 상제유기추원무급금이
吉辰式遵典禮隮入于廟 謹以淸酌
길진식준전예제입우묘 근이청작
庶羞祗薦歲事 上
서수지천세사 상
饗
향
五代祖考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
五代孫養黙敢昭告于
오대손양묵감소고우
顯五代祖考通德郞府君
현오대조고통덕랑부군
顯五代祖妣恭人義城金氏 今以䄻遷
현오대조비공인의성김씨 금이조천
親盡埋安神主墓側開于破瑩域
친진매안신주묘측개우파영역
不勝感愴 謹以淸酌用伸虔告
불승감창 근이청작용신건고
謹告
근고
五代祖 埋魂 考位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己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기해
五代孫養黙敢昭告于
오대손양묵감소고우
顯五代祖考通德郞府君
현오대조고통덕랑부군
顯五代祖妣恭人義城金氏
현오대조비공인의성김씨
茲以先考處士府君喪期已盡禮當遷主
자이선고처사부군상기이진예당천주
入廟先王制禮祀止四代心雖無窮分則
입묘선왕제례사지사대심수무궁분즉
有限神主當䄻將埋于墓所 不勝感愴
유한신주당도장매우묘소 불승감창
謹以淸酌庶羞百拜告辭 上
근이청작서수백배고사 상
饗
향
五代祖 山神 祝
維歲次庚寅十月庚申削十六日乙亥
유세차경인시월경신삭십육일을해
幼學宣城金養黙敢昭告于
유학선성김양묵감소고우
土地之神今爲五代祖考通德郞府君
토지지신금위오대조고통덕랑부군
五代祖妣恭人義城金氏神主親將
오대조비공인의성김씨신주친장
埋于墓所神其保護俾無後艱謹盡
매우묘소신기보호비무후간근진
以 酒果祗薦于 神 上
이 주과지천우 신 상
饗
향
축은 축문이다. 즉 제사 때 돌아가신 선조에게 드리는 글이다. 요즘 세대들은 한문으로 된 축문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시대에 맞게 한글로 번역된 축문을 원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다고 한다.
축문을 한글로 해석하면
“돌아가신 15대 할아버지 할머니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게 되니 감회가 새롭고 추모의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정성껏 마련한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드리오니 많이 드시옵소서” 라는 뜻 이다.
마. 아헌례(亞獻禮)
아헌례는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순서로 길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종부(宗婦 (昌原황黃씨氏, 鶯相)가 잔을 올린다. “행아헌례” 창홀에 의해 제청 북문 밖에 있던 종부가 좌우 시자(侍者)의 부측을 받으며 제청 안으로 들어와 신위 전에 꿇어앉는다. 봉작이 술을 부어 술잔이 종부의 손을 감은 수건(手巾)에 살짝 닿게 한 후 전작에게 전하면 전작이 신위 전에 잔을 올린다. 종부는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사배(四拜)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조고위 전과 증조고위전, 조고위전, 고위전, 오대조고위 전 등 모두 여섯위 전에 네 번씩 모두 24번의 절을 올린 후 제자리로 돌아간다.
바. 종헌례(終獻禮)
종헌례는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순서로 길사(吉祀)에서는 초헌관인 종손이 여섯 위에 잔을 올리고 아헌관인 종부가 여섯 위에 잔을 올린 후 아헌은 각각 헌관을 정하여 잔을 올린다. 이에 먼저 원위 전 종헌관(金肅鎭)이 신위 전 앞에 꿇어앉는다. 봉작이 술잔을 내려 술을 쳐서 헌관에게 전하면 종헌관은 잔을 받아 첨작에 대비해 잔을 세 번에 나누어 비운다음 전작에게 주면 전작이 신위 전에 잔을 올린다. 다음으로 고조고위 전 종헌관(金濟晩), 증조고위 전 종헌관(金漢珽), 조고위 전 종헌관(金暻鎭), 고위 전 종헌관(金栢) 오대조고위 전 종헌관(金濟大) 순으로 잔을 올리고 재배한 후 제자리로 돌아간다.
사. 첨작례(添酌禮)
첨작이란 초헌, 아헌, 종헌에 걸쳐 세 잔을 드렸지만 더 권해 드리는 의식으로 종헌에 드린 잔에 술을 가득 채우는 예이다. 백암 종가 길사에서는 집사들이 주전자로 원위에서 오대조위 까지 술잔에 세 번 나누어 첨작했다.
아. 유식례(侑食禮)
유식례는 신이 음식을 편안하게 드시도록 하는 절차로서 삽시정저(扱匙正箸)라 하여 집사가 메 뚜껑과 메국수 뚜겅을 열고 숟가락을 메 가운데 꽂고 젓가락은 시접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모든 제관은 신이 음식을 드시는 동안 부복한다. 부복하여 기다리는 동안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유지(遺志)를 받들 것을 다짐한다. 신이 아홉 숟가락을 뜨시는 시간이 지난 후 축관은 세 번 헛기침으로 식사가 끝났음을 알리면 모두 일어난다.
자. 진다례(進茶禮)
진다례는 식사후 신에게 차를 드리는 예이다. 백암 종가 길사에서는 철갱(撤羹)이라하여 국그릇을 비우고 그 국그릇에 물을 부은 다음 숟가락으로 밥을 세 숟가락 떠서
물에 말아 숭늉을 만든다. 그리고 숟가락은 숭늉 그릇에 걸쳐놓다. 신이 숭늉을 드시는 동안 모든 제관들은 국궁하고 있다가 숭늉을 다 드신 시간이 이르면 축관의 헛기침으로 평신한다.
타. 낙시저(落匙箸)와 합독(闔櫝)
신이 식사를 다하였으므로 집사는 메에 꽂아놓은 수저를 내려 시접 위에 올려놓고 밥그릇의 뚜껑을 덮는다. 제관들은 모두 재배하고 바로 선다. 이제 신에 대한 예가 다 끝났으므로 합독한다. 합독이란 신위함의 뚜껑을 닫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축관이 초헌관에게 “이성(利成)” 이라고 고하여 길사의 모든 절차를 마친다.
그 후 신주(神主)를 복위(復位)하고 축문은 불태운다. 그러면 모든 제관과 친척빈객(親戚賓客)이 재배(再拜)하고 철상(撤床,차려놓은 제물을 물려낸다)한다.
하. 길사 음복연(飮福宴)
모든 제례 절차가 끝남에 따라 철상을 하게 되고 소반에 담은 제물은 내당 대청과 부엌 옆에 있는 과방으로 옮겨진다. 과방에서는 다시 음복상을 차려 모든 제관이 음복할 수 있도록 사당과 사랑채 그리고 임시(비닐하우스)식당로 낸다. 200여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상을 차리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이 때 제관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조상 숭배와 가문의 명예에 대한 덕담을 나누기도 하고 후손들이 학문과 예의를 존중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종손과 종부를 비롯한 집사들의 수고를 치하(致賀)하고 그 손길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제관들이 종가를 떠날 때는 종가에서 만든 음식 가지가지를 봉개로 싸서 참여자 손에 들려준다. 이렇듯 종가는 늘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는 교육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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