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영주의불천위

용헌 황사우의 불천위 제사

단산사람 2010. 7. 27. 14:13

용헌 황사우 선생은 중종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예조, 병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낸 분이고 황섬은 황사우의 증손자로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에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원종 1등 공신에 책봉된 분이다.

 

2010.7.26(월, 음 6.15) 용헌 황사우 (비위,부인)  불천위제가 올려졌다.

 

 

영주시 풍기읍 백리의 희여골에 있는 창원황씨 사당   숭덕사

규모:정면 3칸, 측면 칸반, 굴도리집, 전면 양단에 벽을 친 튓칸에 튓마루를 두었고 내부는 3통칸에 마루를 깔아놓았다.

기단은 견치석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굵직한 두리기둥을 세워 놓았으며 상부가구는 건실한 전퇴 5량가이고 자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어 놓았다.

건축년대:철종 4년(1853년)

 

 숭덕사는 1997 옛 자리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고 함

숭덕사가 위치한 희여골 마을은 갈대숲이 밤에보면 희게 보인다는 유래에서 전해졌다고함

흰색 허연색 희다에서 흰백자를 따서 희여골이 되고다고 증언함

지금도 마을 곳곳에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옛 가옥과정자 등이 산재해 있어 선비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용헌 황사우의 신주

 

 식암 암섬의 신주

 숭덕사로 들어가는 문(담쟁이와 숲으로 가득)

 

 

2010.7.26(월) 밤 9시 용헌 황사우 정경부인 불천위제

 진설:제관들의 어린 시절에는 지금보더 더 많이 더 높이 괴었으나 지금은 간소화 되었다고 함  

 

 신주를 모시고 촛불을 밝히고 제물을 진설함

 

 진설과 향로

 

 제관

 분향-강신

 세 번에 나누어 퇴주

 모두 재배

 초헌례-잔을 드리고

축 (축관이 축을 읽는다.)

 

아헌관

 종헌례

종헌관은 잔을 받아 첨작을 예상하여 잔의 1/3정도를 비운다.

 첨잔-개반-삽시-합문-기침-낙시저-사신-납주 

 

 

 식암이 후손들이 용헌 황사우 불천위제사후 식암 신주 앞에 음복을 드리고 있다.

 음복

 

 

수락당

 

 

 

 수락당

황섬의 종가

 

 

풍기 명문 창원황씨 집성촌"희여골"

 

-황사우,황응규,황섬 3대등 조선시대 문과 9명,사마 34명 배출-

 

풍기시내에서 죽령쪽으로 나가다 보면 얼마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보면 창원황씨들의 집성촌인 백리(일명,희여골)에 다다르게 된다.


백리(白里)는 옛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였는데 속칭 희여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마을 뒤에는 호랑이와 모양이 흡사한 두개의 바위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동호암(東虎岩),서호암(西虎岩)이라 하고 이 한쌍의 백호가 서동부서의 형상으로 위치하여 혼례식을 올렸다는 전설에 따라 백호의 "백(白)"자를 따서 백야리(白也里)라 하였는데 지금은 이 바위들이 없다고 한다.


1914년 풍기군이 영주군에 편입됨과 동시에 가운데의 "야"자를 버리고 백리로 불리워져 왔다.
이 마을은 창원황씨들의 세거지지(世居之地)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풍기 희여골에 창원황씨가 들어온 것은 조선 성종때의 일이다.
고려 공민왕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황승후(黃承厚)가 본향인 창원으로부터 순흥부 병산(屛山)에 옮겨 살았으며,아들 황처중(黃處中)이 조선초에 영일감무(迎日監務)를 지냈으며,처중의 아들 황제(黃蹄)가 서승(署丞)을,황전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냈다.

 

황전의 손자 황희성(黃希聖)이 그의 고숙(姑叔)되는 사직(司直) 노계조(盧繼祖)가 사는 희여골에 옮겨 자리잡게 된것은 고숙인 노계조가 자식이 없어 시양(侍養)을 하려고 함이었지만,창원황씨들이 희여골에 정착하자 인물이 쏟아져 문운(文運)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창원 황씨들이 희여골에 들어오자 희성의 아들 황사우(黃士祐)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예조,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으며,손자인 황응규(黃應奎)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밝은 다스림으로 칭송을 받았고 임진왜란시 사재를 바쳐 군량을 도왔으며 향병대장(鄕兵大將)에 추대되어 공헌함이 지대하여 영돈령(領敦寧)에 이르렀다.

 

황응규의 아들 황섬(黃暹)이 대사간(大司諫),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등을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에 왕을 호종(扈從)하여 호성원종(扈聖原從)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황섬의 아우 황시(黃是)도 문과로 우승지(右承旨),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지냈으며,선조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은 황응규의 사위이며,효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李時白)은 황섬의 손주사위였다.

 

황여규(黃汝奎)가 상주목사와 임란의병대장,황섬의 아들 황유중(黃有中)이 문과급제로 관직에 있다가 물러났으며 예조참의 벼슬을 받고도 임하지 않았다.

 

황유중의 아우 황유길(黃有吉)은 사마(司馬)로 종친부도정(宗親府道正)을 지냈고,황유길의 아들 황입신(黃立信)은 인조때 문과로 현감을 지냈으며,황유길의 후손 황인하(黃仁夏)는 헌종때 문과중시로 좌부승지를 지냈다.

 

이밖에도 많은 이들이 문명을 날렸는데 희여골에서는 문과급제 9장이 났으며,사마급제 34장이 나기도 했다.

 

희여골에는 풍기에서 처음으로 중산서제(中山書齊)가 창건되어 후세교육을 담당하였는데 황응규가 세웠었다.

 

현재 희여골에는 그리 많지않은 고가들이 남아 있는데 숭덕사(崇德祠)는 우찬성겸 이조판서를 지낸 황사우의 사당으로 철종4년(1853)에 창건한 건물이고,정암(正庵)은 돈녕부 돈녕 황응규의 정자이다.


또한 수락당은 증 이조판서,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황섬이 만년에 학문을 강구하던 곳이다.

이밖에도 경주 최씨 정려각이 있다.


열부(烈婦)경주 최씨는 남편 황응규를 지극히 섬기다가 선조31년(1598)에 사별하자 흰옷을 입고 굳은 절개를 지켜오던중 집처마에 있던 제비 한쌍이 숫제비가 죽고 암제비만 외로이 있어 자기의 처지와 같음을 생각하여 아껴주자 암제비도 열부를 따라 굳은 절개를 지키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이런 최씨의 정절을 흠모하기 위하여 후손 황섬이 의연시(義燕詩)를 짓고 고장유림에서 정려각을 세워 놓았다.

 

현재 희여골에는 몇 안되는 고가(古家)들이 남아 있을뿐 지난날 번성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가 없다.


희여골 마을 뒷산은 노적봉(露積峰),앞들은 안골들이며,1942년 이들판을 가로 질러 중앙선이 개통되어 마을 주민들은 이철길 굴다리를 이용 출입을 하고 있으며, 마을 뒷골짜기는 오리골 또는 서젯골로 이곳에 옛 중산서제가 있었다.


이와 함께 이 골짜기에는 1943년 저수지가 2개소가 조성되어 있고 서편에는 장수골로 통하는 오솔길이 있다. 마을 동쪽에 자수(紫水)고개는 윗자수고개,아랫자수고개가 있으며 옛날 이마을 주민들은 향교와 금계마을쪽으로의 출입은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특히 자수고개에는 현재 김순한 시인이 사과농사를 지으며 시심을 일구고 있다고 한다.
또한 남방골 참나무숲 밑은 씨름터로 해마다 8월 보름 추석날이면 면민들이 모여 동서로 편을 갈라 씨름을 했는데 희여골을 비롯 금계동과 산법동이 주동이 되기도 했다.


또 희여골 서쪽 산너머에 위치한 장수골은 옛부터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전설과 마을 뒷골짜기가 길어 그곳에서 물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장수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