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학교 이야기/아름다운 이야기

삼여재 김태균 선생 타계

단산사람 2022. 8. 3. 16:34

고인의 장례는 문하생들의 모임인 교남서단장으로 진행돼
제자들이 직접 쓴 만장 50여기 상여 앞뒤로 펄럭이며 운구
​​​​​​​“그리도 그리시던 고향에서 평안하시길...” 제자들 통곡

꽃상여 타고 저승가는 길. 제자들이 직접 쓴 만장이 펄럭인다

우리나라 서단의 거목으로, 영남의 어른으로, 영주의 참된 선비로 소개되기도 한 삼여재(三餘齋) 김태균(金台均) 선생이 지난 19일 향년 90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김태균 선생은 의성김씨 35세손으로 1934년 안동 녹전 둔버리(遁煩)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붓과 친했으며, 자연스레 경전을 공부했다.

30세 무렵 한국 서예계의 거두 시암(時庵) 배길기(裵吉基, 1917〜1999) 선생의 사사(師事)를 받으며 성장했다.

선생의 호 삼여재는 선생의 진면목을 함축해 보여준다.

삼여(三餘)란 책 읽기에 알맞은 세 가지 넉넉한 때를 뜻하는 말로 곧 겨울과 밤과 비 올 때를 이른다. 행서와 초서를 특장으로 하지만 선생께서는 “글씨란 道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고인은 70년대 초반 영주서도회와 안동서도회를 창립해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안동대와 계명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하생들은 교남서단(嶠南書壇)이란 학술연구회를 설립해 이론적 토대와 더불어 전시회·학술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영주 소수서원 원장으로 천망되어 소수학풍 계승과 지(知)・덕(德)・행(行)의 실천을 권면(勸勉)하였고, 같은 해 11월 제1회 죽농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안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지인·후학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고인의 장례는 문하생들의 모임인 교남서단장(嶠南書壇葬, 회장 장종규)으로 진행됐다.

안동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추모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 영안실서 발인제

23일 오전 7시 30분 안동병원 영안실에서 발인제(發靷祭)를 행했다. 발인제는 전통 장례 절차에 따라 행해졌다. 집례의 창홀에 따라 상주(장남 만용)가 삼상향 한 후 신위 전에 잔을 올렸다. 축관이 독축했다. “지금부터 상여로 모시고 장지로 떠납니다. 모두 슬픔을 참고 보내드리는 예를 다하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을 고합니다”라고 고했다.

이어서 장종규 교남서단 회장이 두 번째 잔을 올리고, 고인의 조카(종구 종손)가 세 번째 잔을 올렸다. 끝으로 참제자 모두 통곡하고 재배했다. 이제 장례행렬은 영주 선생의 서재를 향해 출발했다.

영주 서재(자택) 앞 노제에서 장호중 후학이 조시를 낭송하고 있다

영주 서재에서 노제

운구 행렬은 8시 30분 영주 서재가 있는 휴천동 지천에 도착했다. 여기서 노제(路祭)가 행해진다. 혼백은 50여 년 동안 독서하고 글씨 쓰던 서재를 비롯하여 거실 작업실을 둘러보고 대나무 정원(마당)으로 나왔다. 대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고목 모과나무는 오랜 세월 선생의 손길과 함께하면서 영주서도 50년 역사를 지켜봤겠지. 상주가 영전에 잔을 올렸다.

장호중 후학은 조시에서 “나라 안에서 서예로 아름다운 이름을 떨치셨고 연치와 덕이 함께 높아 복과 영화를 누리셨네. 하룻밤에 큰 별이 떨어짐에 놀라서 문생이 우러를 곳을 잃어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라며 울먹였다.

조사가 끝나고 두 번째 잔은 김욱 장례부위원장이 올렸다. 이제 정든 집, 정든 서재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통곡재배하고 다시 차에 올라 고향 둔버리로 향했다.

장종규 위원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고향마을 앞에서 영결식

이별이 아쉬워 고향마을 앞에서 한 번 더 헤어지는 의식을 갖기로 했다. 교남서단이 영결식 형식으로 준비한 노제(路祭)다. 상여 앞에 제상이 마련되고 제자들이 직접 쓴 만장(輓章) 50여 기가 상여를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들었다.

김규진(집례) 후학의 창홀에 따라 상주가 삼상향한다. 오동섭 후학이 신위 전에 잔을 올리면 장종규 장례위원장이 추도사를 할 순서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장 위원장은 “선생님, 선생님!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로 시작한 추도사는 “저는 아직도 선생님 앞에 서면 세 살배기 철부지인데 어떻게 하라는 유훈 한 마디 주시지 않고 이렇게 떠나시면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중략-

권명자 후학이 조시를 낭송하고 있다

“지난 며칠 선생님 영정 앞에 수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의 추모 물결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나마 위안을 삼아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저희에게 감동을 주시던 우리 삼여재 선생님, 글씨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왕희지를 서성(書聖)이라 한다지만 우리에겐 글씨처럼이나 고매한 인품을 지니신 선생님이 참으로 서성이셨습니다”라며 울먹였다.

권명자 후학은 조시(弔詩)에서 “선생님 어디 가셨습니까?” “곧 오시기로 하고 잠깐 가신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길게 훈계하시지도 언성 높여 나무라지 않으셔도 언제나 두렵고 조심스러웠지만 따스함이 감돌았고, 조용하고 나지막한 말씀은 언제나 귀 기울이게 했으며, 점 하나 획 하나에도 허투루 쓰시는 법이 없으시듯 모두에게 편견 없는 사랑을 주셨지요.” -중략-

“기차를 타고 안동 영주를 오가시며 차창 밖 풍광을 보시듯 지금은 어디쯤 가시고 계신지요. 선생님께서 걸으시던 조용조용 걸음으로 힘들지 않게 천천히, 그리도 그리시던 고향에서 더없이 평안하시기를 제자 모두 마음을 모아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는 통곡했다.

고향집(둔번초당) 마당에서 마지막 노제를 지내고 있다

고향 둔번 언덕에 영면하다

또 한 번 이별의 의식을 가진 후 상여 행렬은 고향집을 향했다. 만장 30여 기가 앞서고 상여 뒤에 20여 기가 따랐다. 제자들이 직접 쓴 만장이다. 한자로 쓴 만장 글귀가 궁금해 여쭈어 적어본다. ‘산속에 저녁 경치 즐기셨고 벼슬은 나만의 여유라, 집에는 좋은 물건 없으나 다섯 수레의 책만이 남아있구나’ ‘이별의 잔 들었으나 마시지 못하고 한없이 흐르는 눈물 남풍이 씻어주네’ 한글로 쓴 만장도 보인다. ‘그리워 어찌할꼬’ ‘벌써 그립습니다’ ‘선생님의 제자여서 행복했습니다’ 등등 보는 사람들마다 눈물을 글썽인다.

하관 시토례 후 가족과 후학들이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다

상여는 500여m를 이동해 고향집 마당에 당도했다. 상주들이 절하면서 상여 앞에 저승 가는 노잣돈을 놓는다.

고향 집엔 둔번초당(遁煩草堂)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둔번초당에서 노제를 마친 상여는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앞산 언덕으로 향했다. 하관례를 마치고 상주 만용의 시토를 시작으로 성용, 소용, 지용, 미망인이 시토하고, 이어 자부, 손자손녀, 조카(종손), 4촌, 5촌, 6촌, 8촌까지 시토했다. 모두는 고향 둔번 언덕에 영면하시길 기원했다.

부산에서 온 사진작가는 “현대 장례문화에서 보기 드문 장례행렬”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