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신축 수해 후 영일초등 주변에 형성된 영일촌(榮一村)

단산사람 2020. 8. 31. 21:57

우리마을탐방[258] 영주2동 영일촌  [탐방일"2019.7.18]

 

제민루와 삼판서고택

 

1962년 공설운동장, 1964 대한생사공장 설립
1974년 영일초 개교, 서천둔치와 솔숲이 자랑

 

영일촌 전경

영일둔치와 구수산

 

영일촌의 위치
영주2동 영일촌은 구성산(龜城山) 서쪽 구수산(龜首山)에서 서천교 방향 영일초등학교 인근에 형성된 마을이다. 영주동주공아파트에서 영주시민회관-강변·동진A-영일사거리-영일초-서천교에 이르는 지역으로 서천둔치와 솔숲길이 자랑이다. 지난달 18일 영일촌에 갔다. 이날 영일경로당에서 김창희 노인회장, 권경분 16통장, 전영하 어르신, 정종수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영일촌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속의 영일촌
우리 사는 영주는 신라의 날이군(捺已郡),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知榮州事)로 부르다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영일촌 지역은 영천군 망궐리(望闕里) 두서방(斗西坊)에 속했다가 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망궐면 두서리가 됐다. 조선 말(1896년) 망궐면 노상동(路上洞)으로 개칭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 편입됐다. 1940년 영주읍 영주리에 속했고,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여 영주4동이 됐다. 1998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주1,2,3동은 영주1동으로 통합되고, 영주4동은 영주2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설운동장과 생사공장

 

지명유래
본래 서천(西川)은 서천교-영주동주공아파트-서부지구대-세무서사거리-영주역-남부초-전문대 방향으로 흘렀다. 1961.7.11 영주대수해(辛丑水害) 후 수해대책으로 구수산(제민루가 있는 산)을 끊어 서천의 물길을 돌리는 직강공사가 진행됐다. 이 때 구수산 북편 서천이 흐르던 자리(현 영주동주공A)에 공설운동장을 조성했다. 영주 최초로 건립된 이 운동장은 1962.3.31 역사적인 수해복구 준공식이 거행된 곳이다. 1964년 공설운동장 뒤편에 한국생사공장(현 강변A)이 설립되고, 1973년 논 가운데 영일초등학교가 설립됐다. 이 때 영주의 지도자들이 영주에서 제일가는 선진학교를 설립한다는 뜻에서 교명을 영일(榮一)로 정했다.

1953년 동구대와 서구대

 

서구대와 구수산
구수산은 영주동주공A 앞산이다. 구수산 동쪽(현 SK주유소)에 거북머리 모양을 한 바위언덕을 서구대(西龜臺)라 한다. 옛 사람들은 거북머리로부터 지맥(支脈)이 이어진 산이라 하여 ‘구수산(龜首山)’이라 불렀는데 하늘에서 보면 그 형상이 거북과 흡사하다.

수해 전 서천이 동구대와 서구대 사이로 흐를 때 그 경치가 영남 제1경으로 꼽을 만큼 수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해 후 물길을 돌리는 바람에 도시계획에 따라 철길에 막히고 건물에 가려 본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신라 소지왕이 날이군(영주)에 행차했다. 이 때 왕을 보기위해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고 하는데 그 곳이 ‘서구대’ 아랫마을(한절마)이라고 전해온다. 삼국사기에 「소지왕 22년(500) 가을 9월 왕이 날이군(捺已郡:영주)에 거동하여 죽령을 살폈다. 고을의 세력가 파로(波路)가 딸 벽화(碧花,16살)를 비단옷으로 단장시켜 왕에게 바쳤다. 이를 물리친 왕은 궁궐로 돌아갔으나 그리운 생각을 가누지 못해 두 세 차례 몰래 그 집에 가서 벽화를 침석에 들게 했다. 어느 날 왕이 고타군(안동)을 지날 때 한 노파로부터 “왕이 고기옷을 입고 다니면 어부에게 잡힌다”는 말을 듣고는 벽화를 다시 찾지 않았는데 왕은 곧 죽었다」고 기록했다. 동국사에 「파로는 대사촌(大寺村,한절마) 사람이다. 벽화는 왕이 오지 않자 안타까운 심사로 돌을 모아 탑을 쌓으니 ‘무신탑(無信塔)’이라 했다」고 적었다.

 

제민루와 삼판서 고택
구수산 서쪽에 제민루(濟民樓)와 삼판서 고택이 있다. 제민루는 조선 때 약재를 관리하던 곳으로 오늘날 보건소와 같은 구실을 하다가 나중에는 사대부들이 유영(遊詠)하던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래 고려 공민왕 20년(1371) 군수 하륜이 구성산 동남쪽(현 영주감리교회)에 창건했다. 오랜 세월 중수와 퇴락을 거듭하다가 영주수해 후 이곳에 복원했다. 그 후 2007년 중건하여 현재 모습을 갖췄다. 황해도 감사(監司)를 지낸 정옥(鄭玉,1694-1760)의 중수기에 보면 「백성들의 병을 다스린다하여 ‘제민루(濟民樓)라 한다」고 썼다. 삼판서 고택은 세 분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구성산 남쪽(현 아카데미모텔)에 있었는데 수해 때 무너진 것을 2008년 이전 복원했다. 삼판서고택의 첫 주인 염의 정운경(鄭云敬,1305-1366)은 고려 때 형부상서를 지냈다. 둘째 주인은 고려말 공조판서에 오른 미균 황유정(黃有定,1343~?)으로 정운경의 사위이다. 셋째 주인인 무송헌 김담(金淡,1416-1464)은 황유정의 외손자로 1463년 이조판서에 올랐다. 삼판서고택은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생가이기도 하다.

서천솔숲과 영일둔치

 

서천둔치의 이름과 유래
영일둔치는 영일초에서 유래 됐다. 영일은 ‘영주제일’의 준말이다. 배고개둔치는 주공3단지 서편에 있는 배고개마을에서 유래됐다. 단종절신 황지헌(黃知軒,창원인)이 1453년 계유정란 때 영천(영주)으로 귀양 왔다가 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서울 동대문 이현동(梨峴洞,배고개)을 그리워하면서 마을 이름을 ‘배고개(梨峴)라 했다. 한절마둔치는 삼국 때 있었다는 대사동(大寺洞,한절마)에서 유래됐다. 한절마란 큰절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지천둔치는 지천(현 남부초)마을에서 유래됐다. 고려 공민왕(1371) 때 지영주사(知榮州事)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남쪽이 낮아 재앙이 많다’하여 ‘이를 지(至)’자에 ‘하늘 천(天)’자를 써 ‘지천(至天)’이라 했다. 문정둔치는 문정동(文亭洞)에서 유래됐다. 일제 때(1914년) 문전(文田,현 폴리텍대) 마을에서 문(文)자를 따고 한정(寒亭,하한정) 마을에서 정(亭)자를 따 ‘문정동’이라 했다. 김창희 노인회장은 “최근 서천솔숲길에 전망대와 벤치가 설치되어 市에 감사드린다. 주민들은 서천솔숲에 정자를 세웠으며 좋겠다는 청원이 여러 번 있었다”고 말했다.

 

영일서당의 꿈
영일초 주변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영일서당(榮一書堂) 설립을 꿈꿔왔다고 한다.

권경분(70) 통장은 “영일초 주변 단독주택 지역에는 교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분들을 훈장님으로 모시고 서당을 운영하면 ‘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시장님께 ‘영일경로당’ 부설 서당을 설립하면 특색 있는 경로당이 될 것이라는 건의도 드렸다. 지난 5월 경로당은 준공됐으나 서당 설립의 꿈은 미뤄져 아쉽다.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후남, 조순영, 권경분, 임춘화 씨

이강규, 권영순, 김정교, 김숙예 씨

영일촌 사람들

영일경로당

 

영일경로당 사람들
2019.5.14 영일경로당이 준공됐다. 김창희(75) 노인회장은 “영일경로당이 준공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장욱현 시장님, 황병직 도의원님과 市의원님, 황기주 市노인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마을 어르신들께서 편히 쉬시면서 ‘건강100세 프로그램’을 완성하여 노후를 활기차게 보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전영하(84) 어르신은 “마을의 오랜 숙원이 이뤄져 기쁘다”며 “그동안 김창희 회장님과 권경분 통장님의 노력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류천우(72) 씨는 “우리 마을은 서천솔숲과 서천둔치가 자랑”이라며 “우리나라 어디에 가봐도 이만한 풍광과 좋은 시설을 갖춘 곳이 없다”고 자랑했다.

자전거공원 인근에서 40여년 살았다는 정종수(94) 할머니는 “1980년 10월 영일촌으로 이사왔다”면서 “당시는 강변아파트자리에는 생사공장이 있었고, 우리 집 주변에는 슬라브집이 띄엄띄엄 있었다. 나중에 강변·동진아파트가 들어섰다”고 말했다.

배고개에 살다가 영일촌으로 왔다는 황소환(87) 할머니는 “경로당이 생겨 너무 좋다”며 “멀리 있는 자식보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이 더 낫다는 말이 맞다. 이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권순창(86) 할머니는 “노인들이 집에만 있으면 눕기만 하는데 경로당에 와서 웃고 체조하고 밥도 같이 먹으니 정말 좋다”면서 “김 노인회장님이 바깥청소를 다해 주시고, 권 통장님이 살림을 다 살아주셔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강변아파트에 사는 정정덕(85) 할머니, 이산면 조우골이 고향인 임정순(86) 할머니, 안정 대룡산이 친정인 황옥규(82) 할머니, 단산 새터에서 자랐다는 나장춘(78) 씨 등은 윷놀이를 하면서 “윷은 놀다보면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면서 “한여름에 시원한 경로당에서 윷을 논다는 것은 신선놀음”이라고 말했다. 취재에 적극 협조해 주신 이강규, 권영순, 김정교, 김숙예, 이후남, 조순영, 임춘화 씨께도 감사드린다.

이원식 시민기자

김창희 노인회장

권경분 16통장

전영하 어르신

류천우 노인회감사

정종수 할머니

황소환 할머니

정정덕 할머니

권순창 할머니

임정순 할머니

황옥규 할머니

나장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