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57] 부석면 감곡1리 석남 [탐방일:2019.7.13]
250년 전 29세 익상(益相)이 망년에서 석남 이거
일제 말 70호 집성촌, 6·25 전부터 안산으로 이주
석남마을 전경
감곡1리 경로당
부석면 석남마을 가는 길
봉화통로 상망삼거리에서 부석·진우 방향으로 간다. 웃보름골 영광고 앞을 지나 마근대미재를 넘으며 조와삼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갈가리재에 오르면 대마산목장이다. 내리막길을 달려 너운티고개를 넘고, 연이어 배남쟁이고개를 넘으면 드넓은 석남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은 석남들 끝 산자락에 자리 잡았다. 지난 13일 석남마을에 갔다. 이날 감곡1리 경로당에서 권영표 노인회장, 엄봉순 부녀회장, 권기열 씨, 권혁종 씨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석남마을
삼국사기에 부석지역은 고구려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이라고 나온다. 통일신라 때 경덕왕(재위:742-765)이 인풍현(隣豊縣)으로 고치고 급산군(급山郡,옛순흥)의 영현(領縣)이 되게 했다. 부석은 고려 때는 흥주(興州)-순정(順政)에 속했고, 고려 말 순흥부(順興府)에 속하게 됐다.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 속했다가 세조 3년 정축년(1457) 금성대군 거사로 마아령(馬兒嶺,현 마구령) 개울 동쪽 지역은 영천군(榮川郡)에 이속됐다. 숙종 9년(1683) 부(府)가 회복되면서 다시 순흥부에 속했다가 1700년대 초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순흥부 이부석면(二浮石面) 성남리(城南里)가 됐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이부석면 성남리는 순흥군 용암면(龍岩面) 석남리(石南里)로 개편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 때 영주군 부석면 감곡리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영풍군 부석면 감곡리, 1995년 통합 영주시 부석면 감곡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산마을 전경
서당마을 전경
지명유래
석남마을은 순흥도호부 때는 성남(城南)이라 불렀고 조선 말 행정구역 개편 때 석남(石南)으로 개칭됐다. 1700년대 초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이곳 선비들이 모여 마을 이름을 성남(城南)이라 정했다. 성남은 성의 남쪽이란 뜻이다. 삼국 때 부석사 옆 마아령(馬兒嶺)에 신라의 성(城)이 있었다. 그 성(城) 남쪽에 있다하여 성남(城南)이라 했다한다.
경북도 지명유래총람에 「마을 앞산에 집채만한 큰 바위가 공중에 뜬 듯 솟아 있어 이를 ‘공중바위’라 불렀는데 이 바위가 남쪽을 보고 있다하여 석남(石南)이라 부른다」고 적었다.
마을 앞산은 안산(案山)이고 공중바위는 안산 남동쪽에 있다. ‘안산’이란 앞산 또는 맞은편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권영표 노인회장은 석남 여러 골짝의 지명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자골(孤子谷)은 180년동안 1가구만 살았는데 10여 년 전 없어졌다. 옛 암자가 있던 절터골 우물은 어떤 한해(寒害)나 수해에도 변함없이 수백평의 논에 물을 대주고, 부인네들 빨래터가 되기도 했다. 안성남골(內城谷) 절터는 8·15 해방 무렵 청동불상이 발견되기도 했고, 승려들이 곡식을 갈아 먹던 널따란 바위(硏子)도 남아 있다. 지금도 땅을 조금만 파면 기와조각이 즐비하고,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쓰던 우물은 지금도 끊임없이 흐른다. 바깥성남골(外城谷)은 예전에 산적들이 부녀자를 끌고 가다가 머리에 꽂은 비녀가 떨어졌다는 비녀골(婢女谷)이 있고, 도둑의 무리들이 살던 도둑골도 있다. 악양산(嶽洋山) 밑에 악양루(嶽洋樓)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100여평 가량 되던 연못은 1980년 이후 없어졌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500여 년 전 이 곳에 봉화정씨가 강력한 세(勢)를 형성하여 살다가 왕자의 난(1398) 때 사라지고, 우계이씨 일족이 크게 번성하다가 광해군 무렵(1600년경) 떠났다고 한다.
권기열 씨는 “마을 앞 논밭을 조금만 파도 주춧돌, 기와 등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상당한 세력이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며 “이곳에 봉화정씨, 우계이씨, 안동권씨 순으로 입향해 살다가 떠나고 안동권씨만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전성기 때는 7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30여 호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화수헌
원 석남마을 터
안동권씨 석남 입향 내력
석남의 안동권씨(시조:權幸)는 복야공(僕射公)파 후손들로 고려말 예의판서를 지낸 권인(權靷)의 6대손 권기수(權期壽,21세,號:花樹軒)가 1520년경 안동 서후에서 영천의 북쪽 도지촌(道智村,현 봉화망년)으로 옮겨 터전을 열었다.
종중 권혁태(66,전 市행정지원국장) 씨는 “석남의 안동권씨는 도지촌에 터 잡은 화수헌(기수) 할아버지의 후손들이면서 화수헌 할아버의 손자 23세 망오재(언신) 할아버지의 후손들”이라며 “망오재 할아버지의 6세손 익상(益相,29세) 할아버지께서 망년에서 석남으로 살림을 나 석남 입향조가 되셨다”고 말했다. 이 마을 권혁종 씨는 “익상 선조님께서 석남에 터를 잡자 종중 몇 집이 더 옮겨 오면서 마을을 이루게 됐다”며 “익상 선조님의 生이 1753년(癸酉)이므로 20세에 살림을 나셨다면 1773년에 입향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망오재 후손들이 석남에 세거한지 266년이 됐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망오당
화수헌 중수비
옛 오전서당 터
화수헌과 망오당
마을 뒷산 언덕에 옛 선비들이 남긴 흔적이 보인다. 화수헌과 망오당이다. 화수헌(花樹軒)은 조선 중종 초 안동에서 영주로 입향한 화수헌 권기수가 일족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16세기 초 세운 정자다. 화수헌 앞에 2012년 세운 중수비가 있다. 종중 권혁종 씨는 “1894년에 중건된 화수헌은 중수와 퇴락을 거듭하다 2012년 市지원(8천)과 모금(3천3백)으로 중수·복원되어 선조님의 유업을 계승하는 계기가 됐다”며 “문중 종현들의 숭모(崇慕) 정신은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망오당(忘吾堂)은 망오재(忘吾齋) 권언신(權彦臣,1568-1652)이 독서하고 서식(棲息)하던 정자로 1600년대 초 건립됐다. 또 망오대와 화수헌 사이에 돈서대(敦서臺)가 있다. 예전에 이곳 선비들이 유상(遊賞)하던 곳이다.
화수헌(花樹軒)의 후손들
화수헌(官:通政大夫)의 고조 계경(啓經)은 횡성현감과 이조참판을 지냈다. 증조 개는 단종 절신으로 창신교위부사정, 조 숙형(叔衡)은 정략장군별시형사맹, 부 침(琛)은 서부참봉을 지냈다. 화수헌의 아들 인(寅)은 재용감봉사를 지냈고, 장손 호신(虎臣)과 차손 준신(俊臣)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셋째 손자 망오재(忘吾齋) 언신(彦臣)은 효행으로 공릉참봉에 제수되고 예빈시주부를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날도 망오재 후손들의 활동이 돋보인다”며 “권영표 문중회장, 권기열 소수서원도감, 권태영 교장, 권오영 봉화군의원, 권오영 경북도 서기관, 권혁태 市행정지원국장, 권혁진 육군 중령, 권혁세 단산면장, 권혁종 금성단 별유사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석남마을 사람들
석남마을 사람들
기자가 성남마을을 찾은 날은 초복 다음날이다. 삼계탕 냄새가 퍼져 나온다. 마을 회관 앞에 있는 경로당 준공 표석을 먼저 만났다. 「양백(兩白)에 흐르는 물은 악양산(嶽樣山)에 다다르고 봉황산 힘찬 기운(氣運) 우리 동네 깃들었으니 수백년(數百年) 앉은 터에 새로 지은 경로당(敬老堂)을 국모봉(國慕峰)·오두봉(晤두峰)이 마주서서 영원히 지켜주리…」
권혁세(65) 씨는 “이 글은 2007년 경로당 준공 때 권영표 회장님이 쓰셨다”고 말했다.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엄봉순(63) 부녀회장은 “오늘 60여명이 삼계탕을 먹으면서 정담을 나누었다”며 “초복을 맞아 경로효친과 마을의 화합을 위해 초복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남재순(87)·서석영(79)·박승란(82)·조춘영(85) 할머니와 한자리에 앉았다.
남재순(영양남씨) 할머니는 “여기 모두는 20여살 쯤 됐을 때 성남 안동권문의 며느리가 된 사람들”이라며 “안동권문은 지금도 시사(時祀)를 지낼 때 수십명 제관들이 도포에 유건을 쓰고 줄을 서서 간다. 보기 좋기도 하고 힘들어 보이기도 하다. 성남은 오랜 유학의 마을”이라고 말했다. 선대부터 석남에 살았다는 박종우(74) 씨는 “선친께서 석남에 사셨는데 해방 무렵 안산으로 이거 하셨다”며 “성남의 농업은 수박, 가지, 애호박 등 원예작물을 많이 재배한다”고 말했다. 석남들녘에 사는 변만식(75) 씨는 “성남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부르다”며 “벼농사는 기계화되었고, 밭에는 호박, 가지, 고추, 생강, 감자 등을 많이 재배한다”고 말했다. 석남마을 탐방하는 동안 문중 자료를 제공해 주신 권혁태 씨와 현장을 직접 안내해 주신 권혁종 씨께 감사드린다.
권영표 노인회장
엄봉순 부녀회장
남재순 할머니
조춘영 할머니
박승란 할머니
서석영 씨
권기열 씨
변만식 씨
박종우 씨
권혁세 씨
권혁태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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