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지에 ‘고적 무신탑’이 ‘서구대 위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서기 500년 소지왕 영주 행행(行幸) 벽화를 만난 사건의 무대
왕을 기다리던 벽화가 서구대에 올라 왕을 원망하며 세운 탑
동구대에서 본 서구대 모습(1950) |
동구대와 서구대 모습(1940) |
현재 동구대와 서구대 모습 |
집에 막히고 잡목에 덮힌 서구대 |
서구대와 무신탑터
지금 영주의 중심은 지천(至天)이다. 영주시청이 지천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500년 전 삼국시대 때 영주의 이름은 날이군(捺已郡)이었고, 군의 중심은 구성산(龜城山) 아래에 있었다고 여러 문헌이 고증(考證)하고 있다.
여지승람에 「郡舊號龜城(군의 이름이 구성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제민루 기문에는 「榮之爲郡 昔在新羅 大都護 人物富庶(영주가 군이 된 것은 옛날 신라 때 대도호였고, 인물이 많이 났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구성산(龜城山)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산이 구수산(龜首山,현 삼판서고택 뒷산)이다. 두 산은 거북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 항공촬영 사진을 보면 거북과 흡사하다.
구성산 서쪽에 동구대(東龜臺)가 있고, 구수산 동쪽에 서구대(西龜臺)가 있다. 이 양대는 거북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1961년 영주 대수해 때까지는 동구대와 서구대 사이로 서천이 흘러 영남 제1의 경관을 자랑했으나 수해가 나자 구수산 등줄기를 끊어 서천의 물길을 돌리는 ‘직강공사’로 옛 모습은 사라졌다. 1625년 취사 이여빈이 쓴 최초의 영주지 고적편에 「무신탑(無信塔), 군의 서쪽 4리에 속설의 탑이 서구대 위에 있었다」고 썼다.
소지왕과 벽화(TV 천일야화) |
서구대는 어떤 곳인가?
서구대 위에 있었다는 ‘무신탑’은 영주지(榮州誌) 고적편에 첫 번째로 나온다. ‘무신탑’이 영주의 주요 고적이 된 것은 1500년 전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날이군(영주)에 행행(行幸,임금의 행차)하여 국색(國色) 벽화(碧花)를 만난 사건의 무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도 잊히지 않고 전해오는 것은 놀라움과 흥미로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삼국사기, 여지승람, 영주지 등 기록을 바탕으로 소설이 나오고, TV에 야화(野話)로 방영되기도 했다.
‘무신탑’이 없어진지는 오래됐지만 탑의 터인 ‘서구대’는 원래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도시 개발로 집(건물)에 막히고 잡목에 덮여 찾아보기 어렵다. 오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서구대가 방치되고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잡목을 제거하고 서구대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세무서 사거리에서 시민회관 방향으로 100여m 올라가다가 대순진리회 영주회관 쪽으로 좌회전하여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대순진리회 건물을 우측으로 끼고 담장을 돌아가면 건물 뒤로 보이는 작은 동산이 서구대다. 규모는 높이 10m쯤 되고, 남북 10m, 동서 60m 가량 되어보이는데 거북머리 형상이다.
소지왕과 벽화의 짧은 사랑
소지왕(재위:479-500)은 신라 21대 왕이고 벽화는 날이군 통치자 파로(波路)의 딸이다. 당시 소지왕은 예순이 넘은 나이였고, 벽화는 열여섯 살 난 낭자로 국색(國色)이었다.
소지왕이 변방 순시 차 날이군으로 행차하던 날 왕을 보기위해 군민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한다. 파로는 왕을 극진히 대접했다. 왕이 떠나는 날 벽화를 곱게 단장시켜 색비단 포장수레에 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괴이히 여겨 받지 아니하고 환궁길에 올랐다. 궁으로 돌아온 왕은 벽화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결국 몰래 날이군으로 가서 벽화를 만났고 이는 거듭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군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고타군(지금 안동)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는데, 왕이 노파에게 묻기를 “요즘 백성들이 왕을 어찌 생각하오?”라고 물으니, 노파는 “지금 왕은 날이에 있는 벽화에 반해 변복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용이 물고기 옷을 입고 다니면 어부한테 잡히는 법인데 높으신 몸으로 자신에 신중하지 못한 왕을 어찌 성군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노파의 훈계를 들은 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소지왕이 벽화를 몰래 궁궐 별실로 데려와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했다. 하지만 영주에서 전해지는 속설에서는 소지왕이 결국 벽화와의 만남을 그만둔다. 벽화는 왕을 기다렸지만 왕은 끝내 오지 않자 크게 상심하여 “못 믿을 사람(無信)”이라며 왕을 원망하다가 서구대 위에 무신탑(無信塔)을 세우고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삼국사기 소지왕 본기에 보면 「소지왕 22년 가을 9월. 왕이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나다」 「22년 겨울 11월. 왕이 죽다」라고 기록했다. 기록대로라면 벽화는 왕을 만난 후 2개월 만에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소지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고, 음흉한 상상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삼국사기 원문과 역문
원문 「二十二年, 秋九月, 王幸捺己郡, 郡人波路有女子, 名曰碧花, 年十六歲, 眞國色也, 其父衣之以錦繡, 置轝冪以色絹, 獻王, 王以爲饋食, 開見之, 歛然幼女, 怪而不納, 及還宮, 思念不已, 再三微行, 往其家幸之, 路經古陁郡, 宿於老嫗之家, 因問曰, 今之人以國王爲何如主乎, 嫗對曰, 衆以爲聖人, 妾獨疑之, 何者, 竊聞王幸捺己之女, 屢微服而來, 夫龍爲魚服, 爲漁者所制, 今王以萬乘之位, 不自愼重, 此而爲聖, 孰非聖乎, 王聞之大慙, 則潛逆其女, 置於別室, 至生一子」 역문 「소지마립간 22년(서기 500년) 가을 9월에 왕이 날이군(지금의 영주)에 행행(行幸)하였는데, 군민 파로란 사람의 딸이 있었다. 이름이 벽화라 하고 나이는 16살이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 아버지가 비단과 자수로 옷을 입혀 수레에 앉히고 색견(色絹)으로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를 궤식(饋食,가다 먹을 음식)으로 여겨 열어 보았는데 얌전한 어린 여자가 있었다. 의아히 여겨 받지 않았다. 급기야 환궁한 뒤에 왕은 연모(戀慕)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재삼 미행으로 그의 집에 가서 그 여자를 가까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타군을 경유하여 어느 늙은 할미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묻기를, 지금 사람들이 국왕을 어떤 임금으로 아느냐 물었더니, 늙은 할미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은 말하기를 ‘왕을 성인으로 여긴다’ 하지만 나는 홀로 그를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듣기에 왕이 날이의 여자를 가까이하여 여러 번 미복으로 온다고 하니 이는 무릇 용이 고기의 탈을 쓰고 고기잡이에게 매어 지내는 격이라, 지금 왕이 만승(萬乘)의 위(位)를 가지고도 자중하지 않으니 이러고도 성인이라 하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 곧 그 여자를 가만히 맞아다가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기까지 하였다」
무너진 무신탑(無信塔)
서기 500년에 벽화가 세웠다는 무신탑은 언제, 왜 없어졌을까? 그 내력이 문헌에 나온다.
영주지에 「고려 공민왕 때(재위:1352-1374) 군수(知榮州) 정습인(鄭習仁)이 무신탑을 보며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 아래서 쉬지 않고,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은 그 이름을 미워해서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높다랗게 서서 그 형상을 온 고을 사람들이 쳐다보게 하고서는 무신(無信)을 드러내고 있는가?”라며 “날짜를 정하여 탑을 무너뜨리고 그 벽돌을 사용하여 빈관을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신돈(辛旽,?-1371)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계림의 옥에 가두었다가 전법사에 옮겨 수감했다가 죽이려고 했는데 조정 신하들이 불쌍하게 여겨 구원해 주어서 죽음은 면하고 폐하여 서인이 되었다. 이 사실이 ‘여지승람’에 나온다」고 적었다.
또 ‘고려사’에는 「영주에 무신탑(無信塔)이라는 전탑(塼塔,벽돌로 쌓은탑)이 있었으나 공민왕 때 정습인이 헐어서 객관을 수리하는데 사용한 사실이 있다」고 기록했다. 당시 군수 정습인은 무신탑을 ‘망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듯하다.
구성에서 내려다본 영교와 한절마(1950) |
구학정 옛모습(1950년대), 뒤로 서구대가 보인다. |
대순진리회관 뒤로 보이는 서구대 |
벽화가 살던 마을 ‘한절마’
한절마는 큰 절이 있는 마을로 지금의 가흥1동 세무서 주변 마을이다. 여지승람에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신봉할 때라 고을마다 절을 짓고 ‘대사(大寺,큰절)’라 이름을 붙였으며, 지금의 향교(鄕校)와 같다. 절이 폐지된 지 오래되었으나 그 터는 아직 남아있으니 지금의 구학정(龜鶴亭)이다. 쌍탑이 아직 남아있다」고 내력을 적었다.
신라 소지왕이 변방 순시 차 날이군(영주)에 왔을 때 군민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던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가흥동 한절마(대사동)로 추정된다.
당시 날이군(영주) 지배자 파로(波路)가 이곳에 살았다는 문헌 기록이 영주지 고적편에 나온다. 「世傳‘波路’ 大寺村之人(세상에 전하는 말로 파로는 대사촌(大寺村,한절마) 사람이다」고 했다. ‘파로(波路)’는 벽화의 아버지다.
또 벽화가 소지왕을 기다리던 곳이 ‘서구대’라고 했다. 벽화는 집에서 왕을 기다라다가 더 멀리 보기 위해 집 가까이에 있는 서구대에 올라 남쪽 하늘 끝을 바라보며 왕을 기다렸다고 한다. 풍기군수 주세붕도 한 말씀 남겼다. “捺已多佳士(날이군에는 훌륭한 선비가 많았는데), 羅王獨迎妹(신라왕은 유독 아가씨만 맞아들였는가?”라고 했다.
영주지 학사본에도 서구대가 나온다. 「동구대와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위에는 수십명이 앉을 수 있다. 암벽이 기이하고 가파른데 사이사이 키가 작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아래에 구학정(龜鶴亭)이 있다」고 했다. 구학정은 백암(柏巖) 김륵(金玏 , 선성인, 1540-1616)이 1558년에 서구대 아래(현 대순진리회관) 지은 정자다. 그 후손들이 400여 년 동안 세거해 왔으나 도시개발로 1988년 봉화읍 문단리(사암)로 이건했다.
지금 영주사람들은 서구대와 삼판서 고택, 제민루가 있는 구수산 일대를 ‘구학공원’이라 부른다. ‘구학(龜鶴)’이란 서구대 구(龜)자와 학가산(鶴駕山) 학(鶴)자를 상응시킨 의미다. 서구대와 무신탑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뜻있는 사람들은 서구대에 “‘무신탑구지(無信塔舊址)’라는 표석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