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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29] 신영주 ‘꽃동산’

단산사람 2020. 3. 4. 20:49

영주의 새역사, 신영주 건설과 ‘꽃동산’ 마을

우리마을탐방[229] 신영주 ‘꽃동산’ 2018.12.10


1961년 영주대수해, 근대도시 발전 계기
1965년 남부초 어린이들이 꽃동산 조성


신영주 전경
꽃동산로터리
국토건설단 환영식(1962)

신영주와 꽃동산
영주 대수해 전(前) 영주시가지는 서천교-영주동주공A-서부지구대-세무서사거리 방향으로 흐르는 서천제방의 안쪽, 봉화통로 동부지구대-원마트-성누가사거리-그렌드컨벤션웨딩 방향으로 흐르는 원당천 제방 안쪽’에 있었다. 1961년 수해 후 서천 직강공사 완료 후 서천이 흐르던 모래사장과 그 주변 남산들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니 ‘신영주’라 했다. 이 무렵 꽃동산을 중심으로 콘크리트조 한옥기와집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곳저곳 마을이 형성됐다. 지난 16일 꽃동산마을에 갔다. 이날 신영주경로당에서 장석은 노인회장, 서정업 어르신, 이용우 사무국장, 박순희 총무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신영주의 역사와 꽃동산의 내력을 들었다.

1960년 영주 모습

신영주의 오래된 역사
삼국사기에 「신라 제21대 소지왕(재위:479~500)이 민심을 살피고자 날이군(捺已郡,영주)에 행차하니 군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때 태수(太守) 파로(波路)가 16살 난 딸 벽화(碧花)를 왕에게 바친다. 왕과 연(緣)을 맺은 벽화는 매일 서귀대(西龜臺)에 올라 왕을 기다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서귀대는 현 영주2동 서부지구대 남쪽 50m SK주유소 뒤 언덕이다. 당시 벽화가 살던 곳은 현 세무서 근처로 추정되며, 아버지 파로는 신라 상대 (上代) 지방 세력가로 날이평야(지금 신영주)를 소유한 큰 부자였다고 한다.

또 676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을 때는 조사당 주변에 초막 몇 채뿐인 초라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창건 후 의상이 화엄경을 설(說) 할 때 승려 수천 명이 부석사에 모였다고 하는데 이 때 날이군 정토사(淨土寺,현 영주여고) 주지가 날이들(捺已平野)에서 농사를 지어 승려들의 식량을 공급했다고 한다. 위 두 이야기에서 나오는 ‘날이들’이 바로 지금 ‘신영주’이다.

구 영주역(현 기독병원)
수해복구 준공식(박정희 장군)
가흥교 준공(1964)

영주수해와 서천 직강공사
1961년 7월 11일 새벽 3시부터 5시간동안 337mm의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서천 물이 불어 당시 영주역의 서쪽 불바우 근처 부실한 제방을 무너트리고 범람한다. 제방을 넘은 수마(水魔)는 영주역에 막혀 포교당 앞으로 내려가다가 현 오거리에 있었던 당시 영동선 굴다리(지하통)를 통해 시내로 밀려들었다. 오전 5시경부터 서서히 스며든 물은 오전 8시경 분수대, 구역 부근 한옥 추녀 밑까지 물이 차올랐다. 이에 행정당국은 시가지에 가득 찬 물을 빼내기 위해 9시 30분경 구안동통로 서쪽 100m 지점 원당천 제방 50m를 잘라 물을 남산들로 빼냈다.

수해 1주일후인 18일. 기차를 타고 영주를 찾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위 의장은 수해 현장을 둘러보고는 “저 산 자르지”라는 딱 한마디를 하고는 야무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박 의장은 이성가 장군(소장)을 수해복구 통제관으로 파견해 현장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당시 육군 제133공병대와 해병 제1상륙사단 등 700여명이 투입되어 공사를 시작한지 8개월만인 1962년 3월30일 역사적인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다음날 31일에는 박정희 의장과 이성가 장군 등 내빈과 군민 5만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준공식이 열렸다.

그 후 1964년 서천(西川)에 가흥교(可興橋)가 준공됐다. ‘가흥교’라 한 것은 조선 때 이 지역이 가흥면(可興面)이었기 때문에 이곳 지명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군민(郡民)들은 이 다리 이름을 가흥교(佳興橋)라고 돌에 새겼다.

이유인즉슨 이성가(李成佳)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성가(李成佳)의 가(佳)자를 따 가흥교(佳興橋)라 한 것이다. 그 후 언제쯤인가 옛 지명 가흥교(可興橋)로 교체되었지만 이성가 장군에 대한 군민들의 고마운 마음이 잘 나타난 역사다. 이용우(78) 사무국장은 “당시 이성가 장군이 수해복구 준공식을 마치고 영주를 떠날 때 많은 군민들이 나와 눈물로 환송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장석은 노인회장은 “당시 서천의 유로(流路) 변경은 신영주 건설의 신호탄이 됐으며, 현대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영주연초제조창 준공(1970)
옛 영교와 구성산(1937)

신영주(新榮州)의 역사
1962년 수해복구 준공식이 있은 후 신영주 건설을 위한 망치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가장 먼저 신영주에 터 잡은 것은 영주남부국민학교이다. 1962년 8월 31일 설립인가를 받아 교사(校舍) 1동 8개 교실을 준공하여 1963년 11월 1일 8학급으로 개교했다.

1937년 놓인 영교(榮橋,현 세무서사거리) 다리가 서천 유로 변경으로 철거되고, 1964년 가흥교가 준공됐다. 1964년 휴천동성당 서편에 공영주택 20여 채가 지어져 민간에 임대되고, 꽃동산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에 한옥기와집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7일 남부초와 경북전문대 사이(현 148아트스퀘어)에 영주연초제조창이 준공되어 당시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 연초제조창 준비요원으로 활동했던 장석은 회장은 “1970년에 준공됐지만 준비요원들은 1968년부터 개창준비를 해왔었다”고 말했다. 1971년 12월 23일 영주전문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아 1972년 3월 5일 제1회 신입생 입학식을 가졌다. 1941년 영주동에서 영업을 시작한 영주역은 1973년 12월 23일 지금의 휴천동 역사로 이전했다. 1980년 4월 1일 영주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영주동 군청사에서 휴천동 신청사로 이전 개청식을 가졌다. 1984년 원당천 물길을 외곽으로 돌리는 유로 변경공사를 하여 도시균형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서정업(81) 어르신은 “수해 후 국토건설단이 수해복구 현장에 투입되어 신영주지역 허허벌판에 도로를 건설하고 제방을 쌓는 등 많은 일을 했다”며 “당시 신영주 역 인근의 땅값이 평당 3천원에서 5천원, 변두리 지역은 평당 300원, 500원에 거래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주시청 개청(1980)

신영주의 이정표 꽃동산
지금 꽃동산은 성탄트리가 설치되어 화려하다. 이 꽃동산은 50년 전 남부초등학교 학생들이 조성했다고 영주시사에 나온다. 당시 학생들과 꽃동산을 만든 전 동부초 김창룡 교장을 만나 그 때 이야기를 들었다.

김 교장은 “당시(1965-68추정) 남부초 교사로 근무할 때다. 학생들과 가흥교 부근 도로변 꽃길조성 차 갔는데 길 중간에 모래무덤 같은 게 있었다. 아이들과 대충 땅을 고른 후 이곳에 코스모스, 백일홍, 채송화를 심었는데 이것이 꽃동산의 시초”라며 “다음해는 원형경계불럭을 둘렀고, 1970년경 영주읍에서 높이 1m가량 되는 옹벽을 두르고 꽃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은 ‘꽃동산로터리’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장석은 회장은 “꽃동산의 내력은 70대 이상인 영주사람은 다 알고 있다”며 “꽃동산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신영주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4년부터 신영주에 살았다는 이유진(78,경로당 감사) 씨는 “당시 영주역은 신영주로 이전했으나 시청은 아직 오지 않았을 때”라며 “그 때만해도 신영주 곳곳이 벌판이거나 밭이었고, 띄엄띄엄 한옥 기와집이 10여 채씩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했다.


장찬덕,박학서,강팔성 씨

황위금,유재분,강희숙 씨
신영주경로당 사람

신영주 꽃동산 사람들
2008년 문을 연 신영주경로당은 꽃동산 주변에 사는 어르신들의 배움터요 친교의 장이다.

박순희 총무는 “우리경로당 회원은 100명이 넘지만 적극 활용하시는 분은 30-40명 정도된다”며 “오후 2시경부터 모여 교육활동과 친교활동을 한 후 저녁을 같이 먹고 집으로 간다. 모두 화합하고 협력하기에 늘 화기애애하다”고 말했다. “뭐가 제일 좋으시냐?”고 여쭈니 김영구(81) 부회장은 “우선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게 즐겁다”며 “건강체조도 하고 10원짜리 화투도 치면서 즐겁게 지낸다”고 말했다.

강성희(89) 할머니 “영주수해 당시 보름골에 살았는데 그 때는 원당천이 시내 가운데로 흘렀다”며 “비가 엄청 많이 와서 곳곳이 잠기고 무너지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했다.

강차연(89) 할머니는 “집과 경로당 간 거리는 멀지만 친구 좋고 분위기 좋아 신영주경로당으로 간다”며 “늘 수고 하시는 박순희 총무님과 새댁네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본 경로당이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총무로 활동했다는 서금필(82) 전 총무는 “79년부터 신영주에 살았다”며 “신영주에는 1960년대 공영주택, 재건주택, 시멘트불럭 한옥에서부터 70년대 지붕이 뽀족한 이태리식 지붕, 80년대 슬라브 지붕 등 시대에 따라 지은 가지각색 단독주택 밀집지역”이라고 말했다.

임차순(88)할머니는 “우리 경로당은 역사도 깊고 모범경로당이다. 모범경로당이 저절로 된 게 아니고 회장님을 비롯한 회원 모두 맡은바 책임을 다했기 때문”이라며 “늘 수고하시는 장석은 회장님, 이용우 사무국장님, 박순희 총무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장석은 노인회장
서정업 어르신
이용우 사무국장
이유진 감사
박순희 총무
사금필 전 총무
김영구 할머니
강성희 할머니
강차연 할머니
임차순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