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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전 왕이 “명문으로 새기라…” 「부석사 원융국사비」[6]

단산사람 2020. 3. 4. 17:58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6]  2020.2.20

1000년 전 왕이 “명문으로 새기라…” 「부석사 원융국사비」   


王이 “세계 징검다리요 인간계와 천상계 지도자”라 칭송
고려 문장가 고청(高聽)이 짓고 명필 임호(林顥)가 쓰다
탄생-출가-대덕-왕사-국사-부석사-입적까지 명문(銘文)

 

원융국사비 찾아가는 길
원융국사비 현재 모습
부석사 동쪽 산등성이에 원융국사비가 있다.
100년 전 원융국사비 모습
비문 글씨 자세히 살펴 보기

비(碑)는 부석사 동쪽 산등성에

부석사를 자주가본 사람도 ‘원융국사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원융국사 비문에는 ‘국사가 입적하자 부석사 동쪽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고 적혀있다.

국사(國師)의 이름은 결응(決凝)이요, 자(字)는 혜일(慧日)이며,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12세에 출가하여 복흥사(福興寺,황해도 개풍)에서 수계(受戒,계율을 받다)하고, 991년(성종10) 승과에 급제했다. 28세에 대덕(大德)이 되고 정종 때 왕사(王師), 문종 때에 국사(國師)가 됐다. 1041년(정종7) 부석사에 들어가 신라 의상(義湘)이 전한 화엄법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문종7) 4월 부석사에서 입적하니 왕은 ‘원융(圓融)’이란 시호를 내렸다.

부석사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이었는데 신라가 삼국통일(676)을 완성할 무렵 의상이 고구려의 잔존세력을 몰아내고 부석사를 창건(676)했다. 이후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 때는 인풍현(隣豊縣)이라 불렀고, 조선 때는 순흥도호부 삼부석면(三浮石面) 방동(方洞)이 됐다가 일제 때(1914년)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융국사 부도(8각원형 고려부도) 추정
100년 전 밭에 방치된 부도
원융국사비각
비각 속 원융국사비

원융국사 비(碑)와 부도(浮屠)

일주문-천왕문을 지나 관광안내소에서 길을 물었다. “삼층석탑에서 동쪽(오른쪽) 방향 지장전(地藏殿) 뒤로 가라”고 했다. 오솔길로 접어들어 50여m 가다보니 왼쪽 산등성이에 비각이 보인다. 비는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을 마련하여 비 몸을 세운 후 머릿돌을 얹은 구조다.

거북받침돌 규모는 170×130cm 정도이고 비 몸은 중간부분이 세로로 심하게 균열된 것을 철제로 꿰매 붙였다. 상단 우측과 하단 우측이 파손됐으나 본문 글씨는 또렷하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우측으로 돌렸는데 사자상처럼 보인다. 등에는 6각 무늬가 선명한데 무늬마다 ‘왕(王)’자를 새겼다. 아마도 왕의 명으로 새긴 비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인듯하다.

비신높이 1.73m, 너비 1.1m, 두께 15㎝이다. 글씨는 자경(字徑) 2㎝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부분 마멸로 비의 건립연대는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결응이 입적한 1053년이나 다음해인 1054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됐는데 역사성이나 가치에 비해 등급이 낮게 평가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면에만 비문을 새겼는데 총 글자 수가 2263자(마멸 161자)로 광개토대왕비 1775보다 488자 더 많다.

부도(浮屠)는 스님의 사리(舍利)를 모신 곳으로 스님의 묘(墓)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국사의 부도는 국사비에서 동쪽으로 100여m 지점에 있다. 예전에 동쪽 밭에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안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동부도에는 9기가 나란히 있는데 1개만 8각 원형 고려시대 부도이고 나머지 8기는 석종형 조선시대 부도다. 가운데 있는 8각 원형부도가 ‘원융국사 부도’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 비와 부도가 ‘부석사의 흥망성쇠를 함께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귀하게 보인다.

 

왕이 “절묘한 비문 지으라” 명하니

1054년 갑오(문종8) 2월 왕이 이르기를 “고(故) 원융국사는 세계의 징검다리이며 인간계와 천상계의 지도자였는데 지금 서거하였다. 부도에 황견유부(黃絹幼婦, 절묘하고 아주 뛰어난 문장)의 명문(名文)을 지어 옥돌에 새기고자 하니 훌륭한 비문을 짓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광록대부(光錄大夫,정3품) 지제고(知制誥,글을 지어 바치는 신하)이면서 자금어대(紫金魚袋, 붕어모양으로 만든 금빛주머니)를 하사받은 고청(高廳)이 짓고, 유림랑(儒林郎)을 지내고 비은어대(緋銀魚袋,은주머니)를 하사받은 임호(林顥)가 비문을 써 영원토록 썩지 않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탄생과 어린 시절

비문의 내용은 국사가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덕종이 묘지사에 주석하게 했다. 정종이 왕사로 책봉하고 문종이 국사로 책봉하였으며 부석사로 은퇴하여 입적하기까지 생애를 기술했다. 국사의 어머니는 방씨(房氏)이니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이며 내의령(內議令)인 강명(康明)의 딸이다.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서 베짜는 법, 예의범절 등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스님을 분만할 때가 거의 다가와서 가정집에 불단을 차리고 스님들을 청하여 불경을 강하도록 했다. 이날 인시(寅時) 초에 국사께서 탄생하시니 대송 건덕2년(964) 7월 20일이었다. 국사께서 어려서 아직 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겨우 형언하는 2,3살 때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외조부의 집으로 가자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아이의 뜻을 따라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가택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고 말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호’라 하였다.

 

왕사를 거쳐 국사에 오르다

12살 때 용흥사(龍興寺)에 나아가 악수좌(악首座,맨 위 승려) 광굉(廣宏)을 은사로 하여 불전 앞에서 머리를 깎고 농사일할 때 입었던 속복을 먹물로 염색한 승복으로 갈아입고 스님이 되었다. 개보(開寶) 8년(975) 복흥사(福興寺)에서 구족계(具足戒,계율완비)를 받았다.

국사께서는 어린 나이에 세속을 떠나 스님이 되어 경전을 연마할 때 미묘한 뜻을 예리하게 해석했다. 한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알아서 푸른 지혜가 마치 두터운 얼음처럼 투철하였다. 28세 때 승과 시험에 응시하여 선발되었는데, 대덕(大德)을 거처 대사의 법계를 내린 분은 목종 임금이고 수좌를 가증(加贈)한 이는 덕종(德宗)이며 승통으로 추대한 이는 정종 임금이니 열성조의 여러 임금께서 지극한 신심으로 존경하였으므로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어느 날 임금께서 국사를 영접하여 단비가 내리도록 기우제를 지내면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하였는데 경(經)을 설하려고 책을 펴자마자 오색구름이 허공을 덮더니 기운이 하늘로 뻗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비범한 용모와 뛰어난 문장

국사의 눈동자는 마치 웅의 검푸른 눈동자와 같았고 눈의 정기는 번갯불과 같이 빛났으며, 걸음은 코끼리가 걷는 것처럼 편안했다. 거룩하고 빼어난 모습은 마치 연꽃이 맑게 갠 푸른산을 진압하는 것과 같았고, 온후하고 청화한 음성은 마치 신선이 부는 피리소리가 고요히 바람을 두들기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였다.

스님을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근감과 온화함을 느꼈다.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대중은 마치 아름다운 구슬이 즐비하게 늘어서는 듯하고, 보배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숲과 같은 진풍경이었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엄숙하였다.

국사를 친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미(道味,도를 닦는데서 얻는 재미)와 취미를 느껴 마음의 티끌을 말끔히 씻어주는 듯 했다. 국사가 붓을 잡으면 하양궁(河陽宮)의 봄나무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 나타나며, 구슬 주머니를 풀어버리면 찬란한 별이 빙빙 하늘을 도는 듯했다.

 

무량수전과 석탑, 비문에는 ‘석탑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있다.
국사비에서 바라본 천 겹 능선들(부석사 해맞이 장소)

속세를 떠나 부석사로 은퇴

국사는 1041년(정종7,78세) 부석사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의상(義湘)이 전한 화엄법통을 이어갔다. 국사는 늘 부석사로 가고 싶어 했다. “절 주변 자연경관은 번뇌를 씻을 만하고 칡넝쿨에 얽인 덩굴풀들은 몸과 세상을 던져버릴 만한 곳이니, 나는 여기에서 시작하고 또한 여기에서 종신하리라”면서 부석사로 가기 위한 허락을 빌었다.

임금은 국사의 간청을 받아들인 후 난새 방울이 달린 수레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서 석별의 아쉬움을 참으며 전송했다. 국사는 속세에 나와 늦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치 하늘을 나는 고니와 같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부석사로 은퇴했다.

비문에는 당시 무량수전의 전모(全貌)가 나온다. ‘본당인 무량수전에는 오직 아미타불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도 없으며 또한 법당 앞에 쌍탑도 없다’고 적었다.

그에 대해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스님이 대답하기를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미타불은 열반(죽음)에 들지 않고 항상 계시므로 좌우 보살을 모시지 않으며, 쌍탑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일승(華嚴一乘, 의상이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문서)의 깊은 종지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그 이유를 기록했다.

지엄스님은 이 화엄경(華嚴經)을 의상에게 전해주었고, 의상은 원융국사에 전승하였다.

비문에는 ‘부석사 앞에 탑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탑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탑은 그(1054년) 후 다른 곳에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국사는 964년에 개경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대덕, 왕사, 국사에 이르렀고, 77세 되던 해(1041) 부석사로 은퇴하여 90세(1053.5.4)에 입적하니 「五月四日 폄于浮石寺東崗 禮也(오월사일 폄우부석사동강 예야) 부석사 동쪽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고 적었다.

국사비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천 겹 능선이 장관이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국사비 앞에서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답사2020.2.1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