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단종과 금성대군 명복 빌기위해 조성(동국대 유근자 교수)

단산사람 2019. 4. 8. 18:21

효령대군 등 왕실 시주 동참

명나라 영향 이국적인 상호

초암사에서 옮겨진 것 추정

①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선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은 제4대 세종(1397~1450)이며 가장 연민을 느끼게 하는 왕은 세종의 손자인 제6대 단종(1441~1457)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세조(1417~1468)는 억불숭유 정책 속에서도 불교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불교의 자비와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이다. 조선 초 단종과 세조 그리고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 이유(李瑜, 1426~1457)와 깊은 관련이 있는 불상이 바로 세조 4년(1458년) 조성된 국보 282호 영주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상이다.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단종과, 세종의 여섯째 왕자이며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됐다. 단종은 1455년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1456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후, 1457년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같은 해 9월에는 금성대군이 유배지인 경상도 순흥(현재의 영주)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10월에 금성대군과 함께 처형됐다. 

단종과 함께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1395~1446)가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형인 문종의 부탁으로 조카인 단종을 지키려다 1456년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영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해 1457년 10월에 처형당했다. 

지난해 10월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꿈꾸는 즐거움 극락’이라는 특별전이 열렸는데 이 때 대표 유물로 ‘영주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상과 복장 유물’이 있었다. 조계사불교대학 수강생들과 함께 이 전시회를 보러 갔는데 흑석사 아미타불상이 전시장 입구에 진열되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 불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난 분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②흑석사 아미타불상 복장기.

“우리나라 부처님 같지 않아요.” 

“그러면 어느 나라 부처님 같은가요?” 

“글쎄요. 중국 부처님 같아요.”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전문 지식이 없는 불자들의 눈에도 중국 불상으로 보일만큼 우리나라 불상과는 얼굴 모습이 많이 다르다. 이런 불상의 얼굴은 당시 명나라와의 교류로 나타난 중국풍이 반영된 것으로, 가장 선진적인 중국 문물의 수입처는 당시 왕실이었으니 왕실에서 발원한 불상에 도입된 것이다.

그동안 필자는 조선시대 불상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기 분석 작업을 하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불상을 조성한 목적이었다. 조선 초기 불상의 대표작인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다른 불상에 비해 불상 조성에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勸善文)과 불상 조성 후 작성한 복장기(腹藏記)가 남아 있어 불상 조성의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는 불상이다. 

불복장기는 옅은 청색으로 물들인 명주(140cm)와 그 뒷면에 이어 붙인 같은 폭의 한지(230cm)로 연결되어 있는데 의빈 권씨를 비롯한 태종의 후궁들과 효령대군과 세종의 사위 안맹담을 비롯한 왕실 종친, 제작에 참여한 장인과 스님 등 275명의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457년 2월 권선문이 작성되었고, 1458년 10월에 복장기가 완성됐으니 불상 조성 연도는 1458년이다. 왜 권선문과 불상 조성 연도가 다를까? 세조 때인데 왜 태종의 후궁들 및 아들과 손자, 세종의 딸과 사위가 시주자로 등장할까? 1457년이라는 해를 주목해 자세히 살펴보면 단종과 금성대군의 죽음과 시주자들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권선문이 기록된 것은 ‘천순원년이월(天順元年二月, 1457년)’로 되어 있지만 ‘천순원년’이 쓰여진 종이는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천순 2년’을 ‘천순원년’으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이 완성된 것은 1458년 10월이었고 이때는 단종과 금성대군의 1주기가 되는 때였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상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 복위 사건으로 1457년 10월에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권선문과 복장기에 등장하는 시주자들 중 왕실 관련 인물들이 있는데, 이들은 단종 및 금성대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종과 관련된 사람들은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 1396~1486)와 그의 아들 의성군 이채(李菜, 1411~1493), 그리고 별도의 천에 기록된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1415~1477)와 그의 남편 연창위 안맹담(1414~1462)이다. 

효령대군과 그의 아들 이채가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성에 참여한 이유는 효령대군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1394~1470)의 조카인 정종(鄭悰, ?~1461) 때문이다. 정종은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1436~1473)의 남편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금성대군과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세종의 사위인 안맹담은 세조가 단종 주변의 김종서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계유정란의 공신이지만 ‘요공(了空)’이라는 법명을 가진 불교신자였고, 정의공주는 ‘묘화(妙和)’라는 법명을 가진 신자로서 조카인 단종과 동생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의 시주자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 명빈 김씨(?~1479), 신빈 신씨(?~1435) 등은 단종보다는 금성대군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운데 의빈 권씨가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신빈 신씨는 1435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유인 신씨(孺人 申氏)’로 기록되어 있다. 의빈 권씨와 태종 사이에는 정혜옹주(?~1424)가 있었지만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혜옹주 사후에 태어난 금성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를 대신해 세종의 권유로 의빈 권씨가 보살폈기 때문에 그녀를 어머니처럼 여겼다. 신빈 신씨는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죽자 의빈 권씨와 함께 스님이 되었고 이 때문에 그녀를 의빈 권씨가 시주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③흑석사 아미타불 보권문.

현재 아미타불상이 봉안된 영주 흑석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 상태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1945년 초암 상호스님(1895~1986)이 중창했는데, 이때 상호스님이 아미타불상을 초암사(草庵寺)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은 초암사에서 주세붕(1495~1554)과 정사룡(1491~1570)의 시에서 운을 따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산바람이 나를 앞서 소나무 문을 여니/ 절 무너져 스님 없고 불상만 남아 있네/ 흰 돌 그림자는 붉은 철쭉을 흔들고/ 붉은 절벽 향초는 곤륜산서 늙어가네.”

황준량의 시에 등장하는 초암사의 ‘홀로 남은 불상’이 현재 영주 흑석사 극락전의 아미타불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458년 조성 당시에는 아미타·관세음·지장보살 삼존으로 만들어서 ‘정암산 법천사’에 주불로 봉안했다고 권선문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16세기 황준량의 시에는 ‘홀로 남은 불상’으로 등장해 이미 이때부터 아미타불만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초암사는 금성대군이 유배된 곳인 경상도 순흥(지금의 영주)에 위치하고 있고, 금성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단인 금성단(金城壇)이 있는 곳이며, 의빈 권씨는 금성대군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 근처 사찰에 봉안했을 것이다. 이 불상은 초암사에서 흑석사로 이동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황준량의 시에 등장하는 그 불상으로 여겨진다. 

흑석사 아미타삼존불상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로 구성되었다고 권선문과 복장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배치와 달리 대세지보살 대신에 지장보살이 선택된 것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로는 조선 초 대표적인 영가천도재인 수륙재를 지내던 사찰이며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건축된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아미타불상을 조성한 장인들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조각승들이 아니라 왕실 소속 장인들로 추정된다. 화원(員) 이중선과 이흥손, 금박 담당은 이송산, 각수는 황소봉, 소목 담당은 양일봉 등 분야별 장인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불상을 조성하거나 불화를 그리는 장인들을 화원이라 불렀는데, 흑석사 아미타불상 조성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화원은 ‘이중선’이다. 그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李璵, 1425~1444)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56년(세조 2)에 왕실 발원으로 조성한 견성암 약사삼존불 조성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인물로 여겨진다. 

흑석사 아미타불 왕실시주자 가계도.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머리 정상과 중앙에 장식된 원통형의 계주(珠), 유난히 뾰족한 육계(肉), 좁은 어깨와 긴 허리를 강조한 상체, 팔과 배 주변의 옷주름 등은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조 교체라는 시대적 상황과 함께 중국에서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명나라 불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또한 지면 관계상 다루지 못한 흑석사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경전과 직물 등은 15세기 서지사 및 복식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신문3273호/2017년2월15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