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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95] 부석면 소천1리 두들마·봉래골·물구지

단산사람 2018. 8. 30. 10:16

황해 감사 정옥의 호 우천(牛川)에서 유래된 마을 ‘소천

우리마을탐방[195] 부석면 소천1리 두들마·봉래골·물구지




소 우(牛) ‘소’자와 내 천(川) ‘천’자를 따 ‘소천’  
소천의 원조 마을로 미풍양속 지켜온 전통마을

 

두들마 전경

부석면 소천1리 가는 길
부석면 소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새천년부석사과탑’이다. 탑 우측 부석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석정주유소에서 성화사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0m 가량 올라가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마을이 유서 깊은 ‘두들마’다. 

두들마 노거수 앞에 서니 봉래골이 한 눈에 보이고, 남산성황당도 눈앞이다. 지난 8일 소천1리에 갔다. 봉래동노인회관에서 고인환 이장, 금경애 마을총무, 정후자 부녀회장, 윤종준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소천
소천리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에 속했다. 1600-1700년 무렵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예전에 인풍현(隣豊縣)에 속해 있던 단산면 지역은 일부석면(一浮石面), 용암·감곡 지역은 이부석면(二浮石面), 소천·임곡·노곡 지역은 삼부석면(三浮石面)으로 구분했다. 이 때 소천1리 지역은 삼부석면에 속했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일부석면은 단산면으로, 이부석면은 용암면으로, 삼부석면은 봉양면(鳳陽面)으로 개편됐다. 이때 소천1리 지역은 순흥군 봉양면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군·풍기군·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순흥군의 봉양면, 용암면, 도강면(도탄, 보계)이 부석면으로 통합됐다.

봉래동 전경

이 때 북지리 일부와 두들마, 봉래동, 상사문리, 하사문리를 하나로 묶어 ‘소천리(韶川里)’라 칭했다. 그 후 일제 중렵 소천리를1,2,3리로 나누었다가 1950-60년대 다시 1-6리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천의 느티나무

지명유래
옛날(470-490) 고구려 군사가 말을 타고 소백산을 넘어온 재(嶺)를 마군령(馬軍嶺)이라 했는데 지금은 마구령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 부석은 고구려 땅으로 이벌지현(伊伐支縣)이라는 고구려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의상대사가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676년 부석사를 창건하니 비로소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됐다. 이때부터 부석은 신라 땅이 됐고, 경덕왕(재위 742-765)이 인풍현(隣豊縣)으로 고치고, 급산군(급山郡,順興)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순흥의 속현으로 병합됐다. 소천이란 지명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행정구역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다.

그럼, 소천이란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궁금하다. 홍종호(90) 전 부석면장은 “소천이란 지명은 조선 숙종-영조 때 황해도 감사를 지낸 소천 출신 정옥(鄭玉.1694-1760)의 호 우천(牛川)에서 유래됐다”며 “당시 지역주민들은 우천(牛川)의 호(號) 소 우(牛)자에서 ‘소’자를 따고, 내 천(川)자에서 ‘천’자를 따 ‘소천’이라는 한글식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곳 선비들이 모여, ‘봉황은 풍류를 좋아한다’고 하여 한글 ‘소’자 대신 ‘풍류이름 소(韶)’자를 붙여 ‘소천(韶川)’이란 한자 이름을 쓰게 됐다.

청주정씨 두들마 입향
청주정씨가 처음 이곳에 터 잡은 내력은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선생의 맞며느리인 하동정씨(河東鄭氏)가 남편(윤저允著,집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계자 시영(時榮)을 데리고 소백산 아래로 낙남하여 두들마에 첫 터전을 마련하니 이때가 1580년경이다. 

이후 약포의 맏아들 윤저(允著)의 후손들이 두들마에 세거해 왔다. 윤저의 아들 시영은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시영의 아들 집(輯)은 이조참판에, 그의 아들 석제(碩濟)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석제의 아들 옥(玉,1694-1760)이 황해도 감사에 올라 명망 높은 가문으로 성장하게 됐다.

 

우천 정옥의 묘

영주의 큰선비 정옥(鄭玉)
정옥은 청주인으로 약포 정탁의 5대손이다. 정옥이 쓴 우천집에 보면 「정옥은 1694년 영천(옛영주) 소천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사마시에,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지내고, 35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41세에 황해도 도사가 됐다. 56세 소수서원의 동주(洞主)가 되어 주서(朱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했다. 60세 통정대부가 되고, 1759년 황해도 감사가 되다. 1760년 임소에서 졸하다」라고 적었다. 

소천1리 김한진(80) 전 노인회장은 “정옥은 1759년(영조35) 좌승지에 올랐다가 황해도 감사로 부임하여 1760년 임지에서 졸했다”며 “정 감사(監司)는 단양 선영에 장사지냈으나 1980년 충주댐 수몰로 고향으로 이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감사의 묘소는 산양산삼 홍보관 북편 산록에 있다. 손재언(82) 노인회장은 “정 감사는 우리 소천의 자랑”이라며 “앞으로 정 감사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소천에서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물구지(수양동) 전경

소천리의 원조(元祖)
고인환(62) 이장은 “소천1리는 소천리의 원조(元祖)로 두들마(송내,10가구), 봉래동(32), 남산(3), 물구지(수향동,15) 등 5개 마을(60)로 구성돼 있다”며 “각 마을마다 오랜 역사와 전설 그리고 미풍양속을 가진 마을 들”이라고 말했다. 

유서 깊은 두들마는 마을 어귀에 두 그루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인 이 나무는 약포 선생의 맞며느리인 하동정씨가 입향(1580년)하면서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예전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수양동 성황지위

‘조선의 마을이름’이란 책에 보면 봉래동을 ‘원소천(元韶川)’이라 기록했다. 지금도 소천1리의 ‘본마’라 할 수 있고, 또 가장 큰 마을이다. 예전에 양봉래(梁逢來)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구지는 물이 맑고 양지바른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인 1965년경 이 마을 선비 김봉규·김낙진·김주팔 씨가 마을의 길복을 위해 수양동(水陽洞)으로 개칭했다. 이 때 부석면장을 비롯한 기관장을 모시고 성대한 ‘수양동개명식’을 거행했다고 전한다.

 

봉래골 사람들 부산관광
소천1리 마을사람들

 

고인환 이장
손재언 노인회장
정후자 부녀회장
금경애 마을총무
조행자 할머니
윤종준 할머니
김한진 전 노인회장

 

김계화 씨
박한연 씨
김순영 씨

소천1리 사람들
정후자(56) 부녀회장은 동해안 관광 사진을 보여주면서 “지난 4월 3일 소천1리 사람들이 버스두 대로 봄나들이를 다녀 왔다”며 “이날 행사는 경로효친과 마을의 단합을 보여준 좋은 행사였다. 고인환 이장님과 금경애 총무님의 수고가 많으셨다”고 말했다. 

금경애(60) 마을 총무는 “아람진펜션은 시청에서 건물을 짓고 소천1리가 운영하는 펜션”이라며 “노후한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주말농장을 운영해 볼 계획이다. 잘 되면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고, 마을 수익 사업으로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조행자(82) 할머니는 “손재언 회장님과 고인환 이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시고, 정후자 부녀회장, 금경애 마을총무, 마을 새댁네들 모두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윤종준(82) 할머니는 “예전에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맑아 김장배추를 저려 씻던 생각이 난다”며 “지금은 더 좋은 물을 먹기 위해 상수도 공사가 한창”이라고 말했다. 

김계화(78) 할머니는 “겨울 내내 경로당에 20여명이 모여 밥해먹고, 화투치고 윷놀이하면서 잘 지냈다”며 “밥해주고 같이 놀아준 마을 새댁네들이 이쁘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순자 씨

이순자(69) 씨는 “예전에 초등학교 다닐 때 꽃길 만들던 추억이 난다”며 “지금은 마을에서 초등학생 보기는 어렵다. 내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마을 어귀에 연산홍을 심는다”고 말했다.

박한연(76) 씨는 “보시다시피 경로당이 후지고 노후하다”며 “마을사람들이 소통하고 서로서로 돌봐주는 중요한 시설인데 재건축 또는 리모델링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김순영(72) 씨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단체가 잘 되고 인심좋은 마을”이라며 “마을에 길흉이 있을 때마다 일손 놓고 적극 돕는다”고 말했다.

박홍녀 씨

박홍녀(72) 씨는 “우리 마을은 맑은 물이 흐르고 소나무 향기 그윽하다”며 “그래서 그런지 모두 건강하시고 부부가 장수하는 집이 많다”고 말했다.

황순도(71) 씨는 “우리마을은 화합, 화목, 화기애애한 마을” 이라며 “지난 3월 28일에는 부산관광, 4월 3일에는 동해로 관광을 가는 등 친교와 친목이 잘 되는 마을” 이라고 말했다.

남산마을

 

남산성황신

 

최일늠 씨

최일늠(66) 씨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남산성황당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성황제를 올린다”며 “이날은 축제 분위기 속에 음복을 나누고 윷놀이를 한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