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맑고 물푸레나무가 무성하여 수청(水淸)
일제 때 수청거리, 지금은 복선전철공사 한창
수청마을 전경 |
휴천3동 수청거리 가는 길
수청거리 마을은 남부지역에서 영주시내로 들어오는 관문 마을이다. 남산육교사거리에서 파머스마켓 방향으로 간다. 조암교-수청과선교를 지나 (파머스 가기 전) 수청정미소 앞에서 동쪽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철도건널목 건너 수청휴정(水靑休亭) 주변 마을이다. 지난 3일 수청거리에 갔다. 이날 수청(조암)노인정에서 김재곤 통장, 이재학 노인회장, 안국진 노인회총무, 서수호·송병훈 씨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수청 경로당 |
역사 속의 수청거리
영주는 조선 태종13년(1413)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당시 영천은 관아(현 영주초) 주변에 4개리가 있었는데, 현 시내지역을 봉향리(奉香里)라 하고, 서부지역을 망궐리(望闕里), 남부지역은 가흥리(可興里), 동부지역은 산이리(山伊里)라 칭했다.
수청거리 지역은 165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으로 정비할 때 산이리 초곡방(草谷坊)에 속했다가 175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산이면 초곡리에 속했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천군 산이면 초곡동에 편입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조암동에 속하게 됐다.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영주시 휴천3동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재곤(67) 통장은 “수청거리는 초곡(사일)과 함께 휴천3동 6통에 속하게 됐다”며 “농협파머스마켓, 수청정미소, 황소걸음(한우전문식당), 영남자동차학원, 사랑어린이집이 본 통에 속해 있다. 수청거리는 지금 고속전철화 공사가 한창”이라고 말했다.
수청휴정 |
지명유래
수청(水淸)의 사전적 의미는 물이 맑고 경치가 좋음을 이르는 말이다. 지명유래편에 보면 「강물이 너무 맑아 산수가 물속에 투명하게 비쳐서 마치 동양화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수청’이라 했다」고 했다. 또 영주시사에 보면 「옛날 마을 앞으로 서천이 흐르고, 주변에 물푸레나무(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가 무성하여 물 수(水)자에 맑을 청(淸)자를 써 ‘수청(水淸)’이라 했다」고 적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도 살고 있는 이재학(81) 노인회장은 “이곳은 전계(箭溪)에서 오는 물과 노현에서 오는 물, 그리고 구서원(舊書院)에서 내려오는 물 등 세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물이 지극히도 맑아 수청이라 했다”면서 “조선 때 영천(영주의 옛이름)의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계회(契會)를 열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말했다.
“왜, 수청거리가 됐느냐?”는 질문에 안국진(74) 노인회총무는 “이곳은 이산, 평은, 문수지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이라며 “1920년경 신작로가 신설되고 5일장이 서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나다녔다. 이렇게 사람이 모여들자 자연스레 주막집이 한 집 두 집 들어서면서 주막거리가 생겼고,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수청’에 ‘거리’가 붙어 ‘수청거리’가 됐다”고 말했다.
퇴계가 장가가던 길
수청거리 서쪽은 퇴계(李滉,1501~1570) 선생 처가마을 초곡이고, 동쪽은 퇴계의 수제자 장수희(張壽禧,1516-1586)가 살던 마을 전계(箭溪)이다. 퇴계연보에 보면 「19세에 영주의 의원(제민루)에서 의서 공부를 했다. 21살 때 초곡(사일) 허씨부인에 장가들다」라고 적었다.
퇴계 선생이 남긴 시(詩) 중에도 초곡(草谷)이 나온다.
「이사당환도지영천 병발철행초곡전사(以事當還都至榮川 病發輟行草谷田舍) ‘일이 있어 곧 서울로 갈제 영천(榮川)에 이르러 병을 얻어 푸실(草谷) 밭집에서 묵다」라고 썼다. 이와 같이 퇴계 선생은 도산과 영천(옛 영주)을 자주 오갔고,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갈 때도 초곡에서 묵었다. 그 때마다 수청(水淸) 맑은 물가 정자에서 머물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오병락어르신 |
초곡에 사는 오병락(83) 어르신은 “퇴계 선생이 초곡에 장가들어 신혼 때 살던 새초방(新初房, 새신랑방)이 초곡 굴다리 밖에 있었는데, 1965년 경북선 철도공사로 헐렸다”면서 “퇴계 선생이 장가 갈 때 (말타고) 도산을 출발하여 녹전-원천-외두들-멀래-창팔고개-두월에서 내성천 건너 박봉산 동창재를 넘고-용상골-둘구비-전단-수청을 지나 초곡으로 왔다. 이 길을 ‘퇴계 선생이 장가가던 길’이라고도 하는데, ‘퇴계로’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죽은 선생의 묘 |
죽유 오운의 묘와 그의 후손들
수청거리에서 전계방향 영남자동차학원 뒷산에 죽유(竹유) 오운(吳澐,1540-1617,문신,의병장)의 묘가 있다. 비문에 보면 「죽유(고창인)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의령으로 이거해 살았다. 1561년 생원이 되고, 25세에 퇴계의 제자가 됐다. 156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충주목사, 경주부윤, 공조참의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를 도왔다」고 기록했다. 그가 영주에 입향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1592년) 때 가족을 처가(장인 허사렴)가 있는 초곡에 피난 시켰다가 그대로 눌러 살게 됐다. 죽유문집과 동사찬요(東史纂要)를 남겼다.
독립투사 오하근의 비 |
수청정미소에서 시내방향 50여m 우측에 현충시설이 있다. 이곳에 항일투사 농고(聾故) 오하근공(吳夏根公,1897-1963)의 기념비가 있다. 공은 죽유의 후손으로 초곡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날 때 영주·봉화지역 동지 규합에 나섰다. 영주장날을 이용하여 하망동(중앙초 부근) 미곡상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광복운동과 후진양성에 힘쓴 영주의 선비다. 또 초곡 마을 앞에 박헌(璞軒) 오세근(吳世根,1909-1985)의 사은비가 있다. 제자들이 세운 비다. 박헌은 “나라의 기반은 인재양성에 있다”며 서당을 열어 많은 문하생을 배출했다.
구로암 |
수청정과 구로암
예전에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에 ‘수청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마을 가운데 있는 수청휴정(水淸休亭)은 최근 세워진 정자다. 구로암(九老岩)은 파머스마켓 맞은편 중앙선 철길 바로 아래에 있다. 구로암이란 1930년대 이곳 선비 아홉분이 조직한 유계(遊契) 이름을 자연석 바위에 새긴 것이다. 예전에는 서천 물길이 한정마을 앞을 돌아 이곳에 부딪혀 호수를 이루었는데 하얀 백사장과 버드나무숲이 어우러져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구로암 위에 있는 경대동유록(鏡臺同遊錄) 표석에는 오세근(吳世根,고창인,사일) 외 1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18 마을총회 |
수청마을 사람들 |
김재곤 이장 |
이재학 노인회장 |
안국진 노인회총무 |
김분희 할머니 |
송춘미 할머니 |
송경익 할머니 |
서수호 씨 |
손진종 씨 |
송병훈 노인회이사 |
김덕겸 사장 |
수청마을 사람들
기자가 마을회관으로 들어갔을 때 손진종(75) 씨가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다. “영주시민신문에서 왔다”고 하니 “아이구! 반갑다”며 방으로 안내해 다과상을 챙겨주셨다. 옆에 있던 송춘미(82) 할머니는 “영주시민신문에 나오는 마을탐방을 빠짐없이 챙겨 읽고 있다”며 “초곡도 나오고 노현도 나왔는데 우리마을 수청은 ‘나올라나?’ 혼자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마을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합동세배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재학 노인회장과 안국진 총무가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날랐다. 김재곤 통장은 휴천 3동 안윤근 동장과 남정순 영주농협조합장을 소개했다. 다함께 큰절로 세배했다. 이혜수 휴천3동부녀회장과 김금자부회장, 송봉랑 수청부녀회장은 축하떡을 후원하고, 봉사활동도 했다. 회관 뒤에 살다가 복선화공사로 초곡으로 이사한 서수호(76) 씨는 “수청거리에는 70여호가 넘게 살았는데 중앙선복선공사로 30여 채가 헐리는 바람에 이웃마을로 이사했다”며 “수청은 중앙선철도와 국도가 마을 앞을 통과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나들목마을”이라고 말했다. 수청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수청정미소가 있다.
김덕겸(58) 사장은 “56년 전 선친께서 설립하신 정미소”라며 “옛날 ‘탕!탕!탕!’ 원동기 소리 요란하던 시절에 설립되어 오늘날 자동화시설까지 50여년이 걸렸다. 지금은 ‘수청의 상징물’이 됐다”고 말했다. 송병훈(71) 노인회이사는 “어릴 적 보았다”며 “어른들은 수청제방 버드나무아래서 화전놀이를 하고,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씨름, 축구, 달리기를 했다”고 말했다. 송경익(79) 할머니는 “마을에 경로당이 있어 참 행복하다”며 “점심을 함께 해 먹고, 오후에는 고스톱도 치고 윷놀이도 한다”고 말했다.
김분희(85) 할머니는 “새댁시절 수청거리에는 주막이 예닐곱집 있었다”며 “시어른께서 주막거리 주변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지금 수청거리 사람들은 “수청거리는 ‘선비의 고장 영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남대문을 닮은 ‘영주 남문(南門)’을 세워 ‘영주의 상징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하기도 했다.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