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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77] 문수면 월호3리 ‘노트리’

단산사람 2018. 1. 25. 17:56

옥천전씨(이곡파) 400년 세거지 ‘노트리(蘆坪-繩坪)’

우리마을탐방[177] 문수면 월호3리 ‘노트리’

 

‘노트리’ 노평에서 유래, 노들-노드리-노트리
시냇가, 물안개, 외나무다리. 승문역의 추억

노트리마을 전경

문수면 노트리 가는 길

시내를 벗어나 농협파머스마켓 앞 적동교차로에서 문수면사무소 방향으로 향한다. 문수역 앞 적동삼거리에서 무섬마을 가는 길로 간다. 강변도로를 따라 1km 쯤 내려가면 새로 놓은 다리가 나타나고, 다리건너 보이는 강변마을이 노트리이다. 지난달 27일 노트리에 갔다.

이날 마을 회관에서 백종태 이장, 전문방 노인회장, 강춘자 씨, 강계자 씨,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노트리의 유래와 옥천전씨 세거 내력을 듣고 왔다.

400년 동수나무

역사 속의 노트리

노트리 지역은 조선 초 1413년(태종 13년)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남면(南面)에 속했다. 조선 중기(1600-1700)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개편할 때 영천군 적포리(赤布里) 노평방(蘆坪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1700-1800) 면리(面里)로 바뀌면서 적포면노평리가 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적포면 승평동(繩坪洞)으로 개칭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노트리(승평동)는 영주군(榮州郡) 문수면(文殊面) 월호리(月呼里)에 편입됐다가 해방 후 월호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트리교

노트리의 지명유래

노트리, 참 아름답고 정겨운 이름이다. 전두영 어르신께 “왜 ‘노트리’라고 하느냐?”고 여쭈니 “노트리는 옛 지명 노평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영주지(榮州誌)에 보면, 1650년경 취사 이여빈 선생과 학사 김응조 선생이 군지(郡誌)를 처음 집필할 때 이곳 지명이 ‘노평(蘆坪)’이라고 나온다. 마을 앞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자에 들 평(坪)자를 써 노평(蘆坪)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럼 ‘노트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전두영 어르신, 전문방 노인회장, 전광영 씨 등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노트리는 노평(蘆坪)에서 유래됐다. 선조들이 마을 이름을 지을 때, ‘갈대 노(蘆)’자에서 음(音) ‘노’자를 따고, ‘들 평(坪)’자에서 훈(訓) ‘들’자를 따 ‘노들’ 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노들’이 ‘노드리’가 되고, 노드리가 나중에 ‘노트리’로 발음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승평’이라고 부른다. 전문방(77) 노인회장은 “예전에 신씨, 송씨가 이 마을에 살 때는 ‘노평’이라 불렀고, 우리 옥천전씨가 세거하면서부터 승평(繩坪)으로 부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백종태(57) 이장은 “마을 이름이 승평으로 바뀐 것은 이곳 산과 들의 지형이 노끈(새끼줄)처럼 꼬여 있다하여 노끈 승(繩)자에 들 평(坪)자를 써 승평(繩坪)이 됐다”고 말했다.

 

 

문수사 대웅전

옥천전씨 집성촌 노트리

노트리 옥천전씨는 이곡파(伊谷派)다. 옥천전씨 영주 입향조는 단종 절신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1425-1522)이고, 전희철의 증손 설봉(雪峰) 전주(全宙,1501-1559)가 이산면 지동 이곡(伊谷)에 새로운 터전을 열어 이곡파(伊谷派) 파조가 된다. 전주는 1523년 무과에 급제하여 강릉 판관, 홍원 현감을 지낸 후 이곡에 낙향하여 99칸 집을 짓고 유생들을 맞아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전주의 아들 전천기(全天紀,1527-미상)는 양친 사후 6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니 원근 많은 사람들이 그 효행에 감동하여 이곡 뒷산을 빈동(殯洞,빈소골)이라 불렀다.

이 마을 원로 전두영(89) 어르신은 “옥천전씨 노트리 문중은 이곡파로 파조는 주(宙) 선조님이신데 주(宙) 선조님의 증손 대에서 (1600년대 초) 노트리로 갈려 나왔다”면서 “옥천전씨가 노트리에 세거한지 어언 400여 년이 됐다”고 말했다.

이곡파 후손 전우덕(87,이산면 지동) 어르신은 “주 선조님의 증손자 대에서 장남은 이곡에 남고, 2남은 문수 노트리로, 3남은 봉화 상운으로 갈려 나갔는데, 그 때가 아마도 162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후손 전광영(78) 씨는 “주(宙)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노트리에 터를 잡아 400여 년 간 세거해 오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40여 호에 300여 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15호에 20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노트리 승강장

내고향 노트리

기자가 마을에 갔을 때 특별히 만난 사람이 있다. 노트리 출신 전인숙(54,서울)씨다. 전 씨는 “부모님 병원진료차 왔다”고 하면서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들려줬다.

「얕은 산 기찻길 시내가 흐르고, 아침 해와 함께 물안개 속에서 노트리 마을이 드러난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발가벗고 얕은 물을 쫓아다니며 발로 피라미를 잡고 멱도 감는다. 아침기차 솔고개 모퉁에 고개 내밀면, 교복입은 나는 외나무다리를 곡예하듯 건너 기차를 탄다. 어느 여름날 소를 몰고 남산에 올라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본다. 바다를 들여 놓은듯 파란 하늘과 흰구름…. 은모래 가득 펼쳐진 모래사장과 강변에 높이 솟은 두 그루 미루나무가 정겹다. 초록들판은 춤추듯 일렁이고, 멀리서 흘러온 두 줄기 물(서천과 내성천)이 만나 흐르는 곳. 고목 느티나무 숲은 어릴 적 놀이터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여기서 놀았다고 한다. 이 모두가 내고향 노트리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전 씨의 이야기를 받아쓰기 하듯 적은 글이다.

전 씨는 “옛적 외나무다리 자리에 잠수교가 있었고, 지금은 높고 넓은 새다리가 놓였다”며 “새로 놓은 다리이름은 승평교가 아닌 ‘노트리교’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벼랑 끝 절집 문수사

문수사는 노트리 마을 뒷산 너머 방석마을 앞산 정상부에 있다.

의상대사가 세운 방석사(放石寺) 사지(寺址)에 문수사가 있다. 예전에 부석사, 응석사, 방석사를 3석사라고 했는데 방석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 역사성을 찾을 길이 없다.

문수사에 처음 가면 누구나 “아!-”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왜냐하면 엄청나게 큰 바윗돌 벼랑 끝에 대웅전이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대웅전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요사채에서 여승을 만났다. 스님께서 인삼차와 귤을 권해 달게 받았다. 스님은 “탑재와 기단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때 창건된 절로 추정하고 있다”며 “1974년 영주에 사는 (여성) 보살에 의해 중창되었고, 주위에 높고 큰 암벽(岩壁)이 많다”고 말했다.

전문방(77) 노인회장은 “어릴 적 동네 어른이 문수암 밭에서 밭갈다가 금부처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주변에서 나온 탑재는 문수초등학교 교정에 옮겨져 있다”고 말했다.

전복순(72)씨는 “문수암이 있어 문수사라 한다”며 “예전에 마을사람들이 절터에 가서 기왓장을 주워와 가루 내어 놋그릇을 닦았다”고 했다.

 

노트리 사람들

기자가 사전 답사 차 26일 오후 마을 회관에 갔을 때 강계자씨, 최순옥씨, 전복순씨가 김장 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강계자 씨가 “내일 김장 섞을 때 밥먹으러 오시라”고 했다.

이튿날 점심시간에 맞춰 노트리 회관에 갔다. 이날 백종태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한방 가득 모였다. 방금 삶은 돼지고기 수육을 금방 섞은 김치로 싸서 먹었다. 별미다.

백종태 이장은 “월호3리는 노트리, 방석, 원창, 돌절 등 4개의 작은마을로 이루어져 있다”며 “모두 합쳐 40여호에 50여 명이 산다”고 말했다.

옥천전씨 가문에 시집와 58년 살았다는 강춘자(76) 씨는 “예전에 산비탈 일구어 고추, 콩, 보리농사 짓고 순내기(냇가샘물) 물 여다 먹으며 어렵게 살았지만 자식 공부시키는 보람으로 열심히 살았다”면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가난한 농촌이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벼로 쌀밥 먹고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마을 강춘자 씨는 28년동안 부녀회장을 지낸 새마을역군이었다”며 “구판장 운영, 길닦기, 담쌓기, 풀베기 등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여 새마을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단산아지매로 통하는 강순자(68) 씨는 “예전에 명절날 차례지낼 때는 수십명이 마당에 멍석 깔고 참례하였고, 큰집 작은집 차례대로 제사를 올리다 보면 작은집은 오후가 됐다”고 말했다.

봉화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 노트리로 시집왔다는 최순옥(73) 씨는 “예전에 외나무다리는 좁아서 건너다니기가 어지러웠다”면서 “그 때 마을 새댁(산모)이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져 아이를 지운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강계자(74) 씨는 “우리 마을은 집성촌이라 이웃이 모두 형님이고, 동서고 아재”라며 “지금은 회관에서 집안 어르신 점심도 해드리고, 크고 작은 일 모두 회관에 모여서 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다음 날도 전두영 어르신을 만나러 회관에 갔다가 전복순 씨가 차려준 점심을 또 먹었다.

 

 

백종태 이장
전문방 노인화장

 

전광영 씨
강춘자 씨
강계자 씨
최순옥 씨
전복순 씨
강순자 씨
전인숙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