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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35] 가흥1동 문전마을

단산사람 2017. 3. 6. 17:59

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 ‘문전(文田)’

우리마을탐방[135]가흥1동 문전마을

 

문전마을 전경

글밭을 일군 옥천전씨·야성송씨 세거지
개발의 소용돌이에도 문정샘 지켜내다

가흥1동 문전 가는 길
문전마을은 영주 IC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인 폴리텍대학 주변 마을이다. 영주시내에서 가흥교를 건너 강변2차A-시민운동장-「선비의 고장 영주」 표석 앞을 지나 폴리텍대학 정문 앞 100m 직전에서 좌회전한다.

마을길로 300여m 들어가서 야산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 문전(文田)이다. 옛 문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새마을주택과 현대식양옥이 어우러진 전원(田園)마을로 변했다. 지난달 14일 문전마을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정병호 통장, 도윤남 노인회장, 김난조 부녀회장, 정기순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문전의 역사와 도리샘의 유래를 듣고 왔다.

「선비의 고장 영주」 표석

역사 속의 문전마을
문정동(문전·한정) 지역은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 가흥리(可興里)에 속했다.

이 무렵 가흥리에는 이현방(梨峴坊.배고개), 줄배방(茁排坊.줄포), 대사방(大寺坊.한절마), 반곡방(蟠谷坊.서릿골), 초곡방(草谷坊.한정) 등 8개 방(마을)이 있었는데 문전은 초곡방에 속했다.

이후 리(里)가 면(面)으로 개칭되면서 영천군 가흥면 초곡리에 속하게 됐다. 조선 후기에 와서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초곡리가 상초동과 하초동으로 분리되면서 문전은 상초동에 편입됐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문정동이 되었다가 1940년 영주읍 문정동, 1980년 영주시 가흥1동(13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리샘

지명 유래
이 마을은 원래 문전(文田)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문정(文亭)으로 통용되고 있다.
“왜 문전이 문정으로 됐을까?” 이것이 궁금하다. 영주시사에 보면 「문전은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글밭’이라 부르다가 이 마을 선비들이 글월 문(文)자에 밭 전(田)자를 써 문전(文田)이라 했다」고 되어있다. 즉 문전은 글밭이란 뜻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가흥면 상초동의 문전(文田)과 하초동의 한정(寒亭)을 통합하여 문정동(文亭洞)라 했는데, 이는 문전의 문(文)자와 한정의 정(亭)자를 조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 후 ‘한정(寒亭)’은 옛 마을이름을 고수(固守)함에 따라 문전이 문정동의 중심이 됐다. 그래서 교통표지판에도 문정, 경로당도 문정경로당, 주유소도 문정주유소가 됐다.

동수샘

옥천전씨 300년 세거지
옥천전씨(시조 學浚)가 영주에 터를 잡은 것은 조선 초 단종애사 때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승하(1457년)했다는 소식을 들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1425-1522)은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처가마을인 영천 휴천(광시)에 은둔했다.

문전의 옥천전씨는 전희철의 둘째 아들 박(珀.1453-1528)-박의 셋째 아들 응두(應斗.성균생원.1496-1567)-응두의 아들 개(漑)-개의 아들 뇌(磊.1577-미상)-뇌의 아들 익희(益禧.雪月堂.1598-1659)로 이어지는 갈래 중 설월당의 5대손 상심(相深)의 후손들이다.

상심은 비달고개에 살다가 목골을 거쳐 1700년대 초 문전으로 이거하여 새로운 터전을 열었다. 그래서 옥천전씨가 문전에 터 잡은 것은 약 300여년 전으로 추정된다.

옥천전씨 문전문중 전항구(83) 어르신은 “상심 선조는 저의 9대조 할아버지”라며 “선조께서 비달고개(지천-한정)에 살 때는 천석꾼 부자였다. 뜻한 바 있어 가산을 정리하고 문전마을로 이거하여 서당을 열고 글밭(文田)의 터전을 닦으신 분”이라고 말했다.

송익선 고택

문전의 야성송씨
문전의 야성송씨는 영주 입향조 눌재 송석충의 셋째 아들 간(侃.1514-미상)의 후손들이다.
영주시사에 보면 「약 300년 전 솟대재(지금의 휴천3동 사일마을 옆)마을에 살던 송간(宋侃)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이주하여 살면서 서당을 세워 인재를 길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목골(牧谷)이라 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목골(牧谷)의 목(牧)자는 칠 목(牧)자다. 이는 ‘치다’ ‘기르다’ ‘가르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인재양성’을 염두에 둔 지명이라 사료(思料)된다.

목골은 문전과 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목골을 개척한 송간의 후손 일부가 문전으로 이거하여 글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문전마을 사람들

야성송씨 문전문중 송익선(80) 어르신은 “저의 4대조 되시는 규연(奎淵) 고조부님께서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셨다”며 “고조부께서는 ‘가문을 일으키려면 학문을 중시해야 한다’며 집집마다 사랑방마다 글 읽기를 장려했다”고 말했다.

이 마을 박정숙(86) 할머니는 “시부(媤父. 송홍준)께서 생전에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訓長)이셨다”며 “사랑방에서는 온 종일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100년 판담집

마을 사람들이 지킨 문정(文井)
문전(文田)은 글밭이란 뜻이고, 문정(文井)은 ‘문전마을의 샘’이란 뜻이다. 문전에는 문정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도리샘’이고 다른 하나는 동수샘(洞守井)이다.

이 마을 정기순(78)씨는 “도리샘이란 바위틈에서 나온 물이 빙글빙글 돌아서 흐른다고 ‘도래샘’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도리샘’으로 굳어졌다”며 “이 샘은 예로부터 경상도에서 2등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고 말했다. 정병호(68) 통장은 “동수샘은 마을을 지켜주는 샘으로 마을사람 모두 신성시 했다”며 “정월대보름 서낭제 때 헌관은 이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말했다.

이 두 샘이 도시 개발로 땅에 묻힐 위기를 맞이했다. 정병호 통장, 김난조 부녀회장 등 마을 지도자들은 부동산업자들에 맞서 “샘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했고, 정기순 씨 등은 시청 등 관계 기관을 찾아가 “동수샘은 마을을 지키는 동신(洞神)”이라며 “보존해 달라”고 청원했다.

마을 사람들의 끈질긴 요구가 관철되어 두 샘은 개발의 소용돌이를 잘 넘기고 본래 모습을 보존하게 됐다.

문전마을회관

문정마을 사람들
지금 문전마을은 안마(본마), 거랫마, 새마 등 3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이 마을 전종하(79)씨는 “마을회관이 있는 거랫마는 영주로 들어오는 관문이어서 예전에는 주막이 많아 ‘주막거리’라고 불렀다”며 “지금은 차가 많아 주유소거리가 됐다”고 말했다.

옛 주막거리에 2010년 문정경로당이 준공됐다, 문정경로당이 다른 경로당과 다른 점은 외부 지원 없이 자율적 선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윤남(80) 노인회장은 “정병호 통장님께서 어렵사리 경로당을 마련해 주시고, 김난조 부녀회장님은 3년 넘게 점심상을 차려주어서 고마운 마음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송성익(88) 할머니는 “한 두 달도 아니고 3년씩이나 점심 봉사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그 외에도 안마와 한방침 등 건강에 좋은 활동을 많이 할 수 있게 해줘서 행복한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새마에 사는 권옥하(65)씨는 “문정경로당은 ‘1천원 점심’이 호응을 얻고 있다”며 “마을 어르신은 누구나 1천원을 내면 점심을 먹을 수 있어 부담 없이 참여 한다”고 말했다.

문정 연못

오후 4시경 경로당을 나와 정병호 통장, 김난조 회장, 정기순 씨와 마을을 둘러봤다. 마을에는 기와집 고택이 한 채 있다. 지은 지 150년 이상 되어 보이는 이 고택은 야성송씨 문전문중의 대표적 건축물로 문화재 가치가 있어 보인다. 주변에는 100여년 전에 지은 집으로 추정되는 토담집도 한 채 있다. 이 토담집은 양쪽에 합판을 대고 진흙을 비벼 넣고 다진 ‘판담집’으로 방 한 칸 부엌 한 칸 오두막집이다.

정병호 이장은 “선비촌으로 옮겨 보존해야 할 귀한 문화재”라고 했다. 일행은 도리샘 앞에 섰다. 김난조(50) 회장은 “이 샘물은 천년샴푸”라며 “샴푸 없이 머리를 감아도 윤기가 흐른다”고 했다. 다시 동수샘으로 갔다. 예전에는 동수샘 앞에 수백년 수령의 동수나무(洞守木)가 있었다고 한다. 정 이장이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렸다. 한 모금씩 마셨다. 참 달다.

정기순 씨는 “이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한절마 사람들이 무지게로 물을 길러갔다”고 말했다. 마을을 떠나면서 김난조 회장께 “정말 큰일 하신다”고 했더니 “아니요, 작은일”이라며 “이는 문전마을 선조님들로부터 물려받은 효(孝)에 대한 작은 실천”이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가흥1동 문전마을 사람들>

정병호 통장
도윤남 노인회장
김난조 부녀회장
송성익 할머니
박정숙 할머니
전항구 어르신

 

송익선 어르신
정기순 씨

 

 

전종하 씨
권옥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