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고개 사람들 |
오랜 역사와 미풍양속을 지켜 온 마을
가흥2동 배고개 가는 길
배고개는 구성의 서쪽 강 건너에 있다.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서천을 울타리로 삼아 자리 잡은 농자(農者)의 마을이다. 영주2동 영일네거리에서 영주교 다리를 건너면 법원네거리다.
풍기방향으로 직진하여 500m쯤 올라가서 도로 우측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배고개다. 그런데 마을로 가는 길이 없다. U턴하여 영주법원-하이마트-삼성디지털 앞을 지나 가흥주공3단지로 들어가서 마을로 가는 길을 찾았다.
지난 25일 오후 배고개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김정숙 통장, 김문길 노인회장, 김우현 새마을지도자, 김복식 전 노인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배고개의 역사와 마을의 전설을 듣고 왔다. 김정숙 통장은 “배고개는 선조들이 물려 준 전통과 미풍양속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마을로 40가구가 산다”고 소개했다.
▲ 배고개 큰샘 |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날이군, 신라의 내령군 등으로 불렀고, 조선 태종 때 ‘영천군’이라 했는데 ‘구성(龜城)’이라 부를 때도 있었다. 배고개 지역은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 가흥리(可興里)에 속했다.
이 때 가흥리에는 이현방(梨峴坊.배고개), 줄배방(茁排坊.줄포), 대사방(大寺坊.한절마), 반곡방(蟠谷坊.서릿골), 초곡방(草谷坊.한정) 등 8개 마을이 있었다. 당시 기록에 이현방(배고개)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배고개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배고개는 영천군 가흥면 대사리(한절마)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 할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영천군의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을 영주면으로 통합했다. 이 때 배고개는 영주면 가흥리에 편입됐다. 1940년 영주읍 가흥리가 되었다가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면서 영주시 가흥2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동수나무 |
‘배(梨)도 없고 고개(峴)도 없는 이곳을 왜 배고개(梨峴)라 했을까?’가 궁금하다.
‘배고개의 유래가 뭐냐?’고 여쭈니, 김복식(80) 전 노인회장은 “마을 이름이 배고개가 된 것은 조선 단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면서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위해 계유정란(1453년)을 일으켰을 때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 영주로 귀양 온 ‘황지헌’이란 선비가 있었는데, 귀양이 풀렸으나 한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서울 동대문 근처 이현동(배고개)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마을이름을 ‘배고개(梨峴)라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 서낭제 축문 |
영주로 귀양 왔다가 배고개에 정착한 황지헌(黃知軒)은 단종절신(端宗節臣)이다. 그는 단종1년(1453년) 계유정란 때 황보인·김종서와 그의 중형 황의헌(黃義軒)이 순절(殉節)하자 이에 연루되어 영주로 귀양 오게 됐다.
황지헌은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단종복위 거사를 실패하자 비통해 하였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승하(1457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그는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隱居)한 채 문을 닫고 학문에만 열중했는데, 당시 절의를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은 황의헌·황지헌 형제를 일컬어 “사육신과 같다”고 추앙했다.
창원황씨 황춘일(대룡산.23세손) 종손은 “지헌선조의 형님되시는 의헌선조께서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조사위 186인의 한 사람으로 영월 장판옥에 위패가 모셔졌고, 공주 숙모전에도 배향됐다”고 말했다.
▲ 배고개 마을전경 |
배고개 창원황씨는 회암(檜巖)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삼는 창원황씨 일맥의 하나다.
시조의 4세손인 지헌(1411-1462)은 서울 이현동에서 태어나 음(蔭)으로 벼슬이 예빈시사정에 올랐다. 1453년에 영천으로 귀양와 1468년(세조 14) 귀양에서 풀린 후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고 배고개에 눌러 앉았다.
그의 처음 귀양지는 창보(昌保)였으나 2년 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황지헌의 아들 황무소(黃茂蘇.1431-1481.생부 의현)는 부사정에, 손자 황진(黃璡.1451~1506)은 진해 현감을 지냈다.
증손 귀암 황효공(黃孝恭.1496~1553.7세손)은 15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춘추관편수관을 겸했다. 40세에 은퇴하여 18년 동안 배고개에 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황효공의 아들 황흠(黃欽,1512~1590)은 상주 목사를 지냈다.
황흠의 아들 황언수(黃彦樹)는 배고개에서 종가를 지키고 둘째 아들 황언주(黃彦柱,1553~1632)는 대룡산 순흥안씨 딸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 마을로 옮겨 갔다.
황춘일 종손은 “지헌 선조의 후손들은 배고개에서 400여 년 간 세거해 오다가 조선말(1890년경) 저의 고조부(相鉉.1835-1898.19세손)께서 대룡산으로 이거 하셨다”며 “지헌 선조의 후손 중 문과급제 4인, 생원·진사 급제 24인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말했다.
청도김씨 입향내력
배고개 청도김씨(시조 金之岱)는 병산(병山) 김난상(金鸞祥,1507-1571)의 후손들이다. 김난상은 시조의 12대손으로 1537년(중종 3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절충장군충무위상호군에 올랐다.
후손 김복식(80) 어르신은 “병산 선조의 손자 효선(孝先) 선조께서 1586년 서울에서 영주로 이거하여 한절마에 터를 잡아 영주 입향조가 되셨다”며 “1800년경 후손 일부가 한절마 뒷산 넘어 배고개로 이거하여 200여년 간 세거해 왔다. 1960년경에는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몇 집만 남았다”고 말했다.
전통을 잇는 사람들
배고개노인회관은 마을 뒤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김문길(79) 노인회장은 “배고개는 창원황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청도김씨와 안동권씨가 입향하여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면서 “예로부터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하여 사람 살기 좋은 마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말했다.
김계창(83) 어르신은 “마을 앞 들 가운데 동수나무가 있었다.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서낭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생닭과 백설기를 썼고, 제관은 헌관, 축관, 도가 등 3명이 지냈다”면서 “보름날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나누고 윷놀이를 했다”고 했다.
김영제(77) 영농회장은 “서낭제를 지낼 때 제관은 흠이 없는 사람으로 정했고, 제기(祭器)는 해마다 새것으로 사서 사용했다”며 “지금도 예전에 썼던 서낭제 축문 등 문서가 회관에 보존돼 있다”고 말했다. 이해수 전 통장은 “어릴 적 ‘단오날’이면 밤나무에 그네를 매고 ‘어허라 운디야!’라며 그네를 탔다”며 “그 때 시내에서 총각처녀들이 마을로 와서 그네를 타면서 단오를 즐겼다”고 말했다.
박문규(77) 노인회부회장은 “배고개는 해마다 전통 농경문화인 풋굿(호미씻이)잔치를 열었다”며 “집집마다 술버지기가 나오고,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화합의 대축를 열었다”고 말했다. 김정숙 통장은 “지금도 풋굿날이면 마을 안길 풀베기를 한 후 음식을 나누는 등 옛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옥자(78) 노인회부회장은 “오늘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점심을 함께 해먹었다”며 “동짓날은 팥죽 먹고, 정월보름날은 찰밥을 나누고 이름 있는 날이면 별식을 해먹으면서 화목하게 지낸다”고 했다.
윤옥순(72) 할머니는 “새댁시절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버지기 물 긷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여, 밥짓고 빨래하고 길쌈하는 고달픈 나날이었다”면서 “지금 그렇게 살라 하면 살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해질 무렵 회관에서 나와 김우현 새마을지도자와 큰샘으로 갔다. 뚜껑을 열자 맑은 물이 넘실거린다. 한 바가지 떠서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하고 달다. 김 지도자는 “여기에 마을이 생긴 것은 좋은 샘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이 물을 생수로 먹는집이 많다”고 말했다.
김복식 어르신은 “큰샘 남쪽방향 200m 가량 지점에 창원황씨 종가집이 있었다”며 “그 부근에서 기왓장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가흥2동 배고개 마을 사람들>
▲ 김정숙 통장 |
▲ 김문길 노인회장 |
▲ 김우현 새마을지도자 |
▲ 김복식 전 노인회장 |
▲ 김계창 어르신 |
▲ 박문규 노인회부회장 |
▲ 이옥자 노인회부회장 |
▲ 윤옥순 씨 |
▲ 김영제 영농회장 |
▲ 이해수 전 통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