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한국 농촌마을 안정면 ‘대평리’ | ||||||||||||||||||||||||||||||||||||||||||||||||||||||||||||||||||||||||||||||||||||||||||||||||||||||||||||
우리마을탐방[76]안정면 대평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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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평화의 마을 대평리, ‘천하제일낙원’ 안정면 대평리 가는 길 예전에 신작로가 처음 생기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할 때는 풍기-부석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태장에서 내려 걸어서 대평까지 다녔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승합차가 운행될 때는 영주-단산행 승합차을 타고 서천교-귀내-장수고개를 지나 동촌에서 내려 걸어서 대평까지 갔다. 지금은 서천교에서 창진리, 오계2리, 오계1리를 지나 대평리로 가는 길을 제일 많이 이용하고 있다. 오계삼거리에서 좌측 대평리 방향으로 향하면 옛 오계초 담장을 따라 돌아간다. 옛 학교(2001 폐교)는 문을 닫은 지 오래 됐지만 운동장에 서있던 플라타너스는 옛 모습 그대로다.
누르스름한 들판을 바라보면서 600m 쯤 올라가면 대평리 ‘새마’이고 800m 가량 더 올라가면 본마인 대평리다. 마을을 상징하는 플라타너스 숲속에 마을회관이 있고 그 앞에 ‘천하제일낙원 대평동(天下第一樂園 大坪洞)’이라고 새긴 마을 표석이 우뚝 서 있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해바라기꽃길이 정겹다. 지난 5일 대평리에 갔다. 회관 앞 정자에서 김석규 이장, 안효선 노인회장, 홍외순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마을의 지형 마을 서쪽으로는 성주봉과 두리봉(일명 두루미봉)과 노인봉이, 북쪽으로는 우람한 자태의 소백 연봉(連峰)이 병풍을 펼친 듯 마을을 두르고 있다. 넓고 평평한 이곳은 해발 200m로 저산 지형을 이루고 있어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마을이다. 마을의 역사 순흥지에 보면 대평면은 관아가 있던 마을로 「아신리, 성하리, 봉양리, 사현정, 석교리, 죽동, 묵동[거묵골], 태장리, 한산동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대평리에 대한 기록은 없다.[옛순흥부의 대평면(현 순흥면 소재지)과 지금 대평리는 별개의 것임]
또한 풍기군지에는 「동촌면은 안심리, 일원리, 고암리[옹암], 오산리[오계], 단촌리, 우음리[핏끈], 합도리[조개섬]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나 여기도 대평리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영주지에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홍교동, 단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평리를 이루었다」고 적었다. 이에 ‘대평’이란 지명이 조선 때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처음 생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마을의 형성 이 마을 황옥(85, 평해황씨) 어르신은 “선조들이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언제 입향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고 했다. 평해황씨 검교공파 세보에 따르면 ‘9세 황연(1380-1461, 황유정의 삼남)이 영주에서 풍기로 와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과 그 후손들이 풍기, 안정, 봉현에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1500년 이후 평해황씨 일족이 대평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유래 또한 마을 앞에는 넓이가 150평 정도 되는 반석(盤石)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바위 주변에 펼쳐진 넓은 들을 넓을 광(廣)자를 써서 광석들(廣石들)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마을 뒤 청룡산은 머리를 북쪽에 두고 남으로 길게 뻗어 있다.
허리 부분에 고개가 있는데 이 재의 이름을 ‘재뱅이 고개’ 또는 ‘대평재’라고 부른다. 마을 원로 안국영(83) 어르신은 “4-50년전까지만 해도 순흥·단산지역 사람들이 풍기장에 갈 때 이고지고 이 재를 넘어 다녔다”고 말했다. 어른을 공경하는 마을
김 할머니는 “동장님과 부녀회장님과 부녀회원들이 사이좋게 의논하여 장을 보고, 무궁무궁한 정성을 다해 닭죽을 끓여서 한 그릇씩 주었다”며 “닭 배속에는 인삼, 밤, 대추, 찹쌀, 녹두 등 오곡과 약재가 들어 있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잘 하고 있어서 고향을 찾는 자녀들도 빈손으로 오지 않고 박스박스 들고 온다”고 하면서 “대평은 나이가 적고 많고 간에 노인들을 내 부모처럼 모시고 있으니 여기가 낙원이고 선비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기름진 대평들 농경사회에서는 쌀이 제일 중요했고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다. 이곳에 물이 풍부한 것은 소백산(원적봉) 깊은 골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홍교천이 있고 마을 바로 위쪽에 ‘대평저수지’가 있기 때문이다. 총18필지 5만3천㎡정도의 면적을 지닌 이 저수지는 일제가 넓은 대평들과 오계들을 수리 안전답으로 만들어 안정적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갈 욕심으로 1943~4년에 축조한 저수지다.
대평리 사람들 100세를 바라보는 송오교(97) 할머니는 정정하고 단정하시다. 사진을 찍어 보여드렸더니 “참 잘 나왔다”고 하면서 활짝 웃으신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김옥현(89)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홈달로 시집갔다가 1년 뒤 대평에 와서 살기 시작했으니 이곳에서 90여년 살았다”고 하면서 “옛날에 쌀농사, 보리, 서숙, 콩 농사 지어 놓으면 일본놈들이 다 빼앗아가고, 보리개떡에 우무가시리를 먹었고, 겨울을 나자면 팥잎 5둥치를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마을 이미대자(75) 할머니는 “청송에서 대평으로 시집 왔다”면서 “신랑이 잘생겨 신랑만 보고 멀리 시집왔다”고 말하자 방안에 웃음이 가득했다.
김창규(69) 노인회 총무는 “예전에 대평교회 앞에 단촌리느티나무보다 더 잘생긴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일제가 대동아전쟁 때 총 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베었다”고 말하자 안국영(83) 어르신은 “어릴 때 도끼로 찍어 나무를 베는 것을 보았는데 그 나무가 있었으면 문화재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김이환 전 이장이 “청룡산에 있는 토성은 언제 쌓은 것”이냐고 묻자 황옥 어르신은 “6.25전(1948-49) 빨갱이가 극성을 부릴 때 마을 청년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말했다. 마을회관을 떠나면서 김석규 이장, 홍외순 부녀회장과 함께 소백양계단지를 방문했다. 대평리 야산 속에 자리 잡은 이 양계단지는 6만수 들어가는 계사(鷄舍)가 15동이나 되고, 총 90만수의 닭이 1일 평균 45만개의 계란을 생산해 한국 최대 양계단지가 됐다. 여기서 생산된 계란은 전량 봉현면 소재 계란GP센터인 들풀에서 자동선별과 세척, 포장을 거쳐 미군부대, 대형마트로 출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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