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중 턱에 두둥실 떠 있는 마을 풍기읍 ‘등두들’ | ||||||||||||||||||||||||||||||||||||||||||||||||||||||||||||||||||||||||||||||||||||||||||||||||||||||||||||
우리마을탐방[62]풍기읍 교촌2리(등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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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전 계유정란 때 피난처, 6·25 전 십승지 풍기읍 교촌2리 등두들 가는 길 원룸촌 사이로 난 언덕길로 들어서면 향나무에 둘러싸인 아랫샘이 있고 조금 더 오르면 등두들 마을이 나타난다. 덩그러니 산 중턱에 남향하여 자리 잡은 마을은 전체적으로 거북이등모습을 하고 있다. 집들은 옛 스레트집에서부터 기와집, 슬라브집, 현대식 양옥집 등이 있고, 군데군데 인삼냉동창고도 있다.
골목길에서 만난 장세석(62)씨는 “지금 등두들에는 36호에 80여명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 인삼·사과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오전 등두들에 갔다. 등두들 회관에서 권혁도(62) 이장, 이태복(78) 노인회장, 이영자(63) 부녀회장, 김진석(78) 어르신 등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역사 이야기를 듣고 왔다. 마을의 구성 용의 허리에 해당되는 산중턱에 ‘개보’라고 하는 수로가 흐르고 있고, 마을 앞에는 금계천이 있어 용이 편안하게 쉴 수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길지 중 길지’라고 전한다. 풍수지리 학자들은 예부터 이곳에서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 하였으니 기대해볼만하다. 교촌2리는 등두들 단일 마을이며 작은 마을이다. 현 동양대 자리가 이 마을 사람들의 농토가 있던 곳이다. 20여년 전 동양대(산법리)가 개교하여 학교를 확장해 나가는 바람에 그 주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 마을의 역사 이곳을 교촌이라 한 것은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풍기향교는 금계동 임실마을에서 창건(1432년)됐다가 1541년 주세붕 풍기군수가 부임하여 교촌리 현 위치로 옮겼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교촌2리가 됐다.
500년 역사를 가진 등두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이 마을이 처음 열린 것은 단종 때(1543)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대감집터’또는 ‘진사집터’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안동권씨 세도가들이 살던 집터인 것으로 보고 있다.
교촌은 ‘학교촌’이라는 뜻 교촌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교육에 힘써 후손들을 훌륭히 교육시켰다. 현재 3-40대 등두들 출신 젊은이들 중에는 과학계, 언론계, 학계, 중앙부처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동양대학교와 20년 동양대 이전반대 범시민대책위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영노(51)씨는 “동양대 20년은 지역사회 위상을 높이고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등 전 영역에 걸쳐 핵심 자산으로 일조해 왔다”면서 “지난 3월 대책위를 구성하고 동두천 항의 방문, 대전 환경부 항의방문에 이어 지난 5월 15일 국방부를 항의 방문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동양대가 이 자리에 남아 교촌 이름값도 하고, 나라의 큰 인재들을 배출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개보(洑)의 전설 그러던 어느 날.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개가 꼬리를 흔들며 김 서방의 바지를 물어 당기는 것이었다. 개는 곧장 눈길을 따라 가더니 우금마을 앞 냇가에 서서 주인을 기다렸다. 개는 주인이 가까이 오자, 냇물을 가로질러 건너갔다 건너오기를 서너 차례 왕복했다. 그러더니 개는 길이 아닌 산기슭 비탈로 접어들어 주인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며 우금에서 등두들까지 숲길을 인도 했다. 그제야 김 서방은 개가 물길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 서방은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물길을 내는 공사를 시작하여 현재와 같은 보를 만들었다. 개보는 지금도 등두들, 동양대를 지나 산법리까지 흐르면서 땅을 적셔준다.
등두들 사람들 예부터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샘이 있었다. 옛 샘들은 모두 없어졌는데 등두들은 샘 세 곳을 보존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 김호열(63)씨는 “우리마을에는 아랫샘, 중간샘, 윗샘 등 샘이 세 곳 있어 물이 풍부한 마을”이라며 “지금도 관리가 잘 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이 약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 부녀회장 이영자(63)씨는 옛 마을 모습에 대해 “50년 전에는 마을 전체가 토담 초가집뿐이었으며, 담도 모두 돌담으로 돌이 많은 마을 이었다”며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물물을 여다 먹고 살았다”고 했다. 김진석(78) 어르신은 “마을 청년들이 서울에서 향우회를 만들어 고향 발전을 돕는 등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며 “해마다 고향을 찾아 경로잔치를 하는 등 애향심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재경 등두들 향우회장 김웅기씨는 전화 통화에서 “등두들 향우회는 10여년전 조직되어 회원 50여명이 있으며, 친교활동과 고향을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등두들 회원들은 대부분 풍기북부초 출신들로 우리나라 각계각층애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삼 영농후계자인 유신종(61)씨는 “옛날에는 돌담골목에 지겟길 밖에 없는 가난한 동네였으나 지금은 인삼재배로 윤택해졌다”며 “인삼 경작지가 부족하여 충북이나 강원지역으로 진출하여 인삼경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5년전에 이 마을로 이사 왔다는 이재숙(78)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인정이 많고 서로 잘 돕는다. 매일 경로당에 모여 정나누기와 밥나누기를 잘 한다”고 말했다. 이태복(78) 노인회장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0승지를 찾아 풍기로 온 정감록파의 후예다. 이 회장은 “아버지 말씀이, 공산당의 착취와 노동을 견디다 못해 전쟁 없는 평화의 땅 십승지(풍기)로 월남하게 됐다”고 하면서 “당시 내 나이 10살이 되던 해(1947) 가을 아버지를 따라 웅진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통해 인천으로 들어 왔다”고 했다. 부친은 풍기에서 포목상으로 크게 번창하였고, 청년 이태복은 수철이 고향인 강칠순(68) 부인을 만나 45년 째 등두들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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