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꽃방(花房) 마을 문수면 ‘새뱅이’ | ||||||||||||||||||||||||||||||||||||||||||||||||||||||||||||||||||||||||||||||||||||||||||||||||||||||||||||
우리마을 탐방[60]문수면 만방2리(새뱅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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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에 꼭꼭 숨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집성촌 문수면 만방2리(새뱅이) 가는 길
시내를 벗어나 문수면 적동삼거리에서 무섬마을 가는 길로 접어들면 세상이 온통 푸르름이다. 둑방길 따라 2km 쯤 내려가면 길 왼쪽에 ‘막현’이란 표지석을 만나게 되고, 철도건널목을 건너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노라면 닫힌 듯 열린 길로 이어진다. 종릉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상목재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갓끈이못이 나타나고 조금 더 내려가면 새뱅이(신방)마을 표석을 만난다. 표석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0m 쯤 오르면 산속에 꼭꼭 숨은 새뱅이 마을을 만나게 된다. 숫돌백이 산 중턱에 꽃술처럼 자리 잡은 마을은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마와 음지마가 있고 마을 입구 고목 아래쪽에 아랫마가 있다. 마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일가친척 형님 아우가 옹기종기 지붕을 맞대고 산다. 지난 10일 오전 새뱅이 마을을 찾아갔다. 남상현 이장의 주선으로 남재기 노인회장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영양남씨 400년 역사와 빗장 열린 새뱅이의 모습을 보고 왔다. 역사 속의 새뱅이
영주시사(榮州市史)에는 「적포면의 자만동(자巒洞), 신방동(新芳洞), 어화면(於火面)의 조문동(照文洞) 일부을 합하여 만방리(萬芳里)가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방’이란 자만의 만(巒)자와 신방의 방(芳)자를 따 ‘만방리’라 하였는데 원래 만방(巒芳)이라고 적어야 하나 일제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무시하고 만방리(萬芳里)로 개칭해 버렸다. 옛 지명 ‘자만’은 산뽕나무 자(자)자에 뫼 만(巒)자를 썼다. 이상에서 보면 옛 문헌에는 ‘신방’이나 ‘새뱅이’라는 지명은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은둔의 마을이기에 나타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신방동’과 ‘만방리’가 처음 나타난다. 새뱅이(新芳)의 유래
영양남씨 집성촌 영양남씨의 시조는 신라 경덕왕 때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다. 경덕왕이 남씨로 성을 내리고 영양현을 식읍으로 살게 했다. 이 마을 남재호(86)·남영인(83) 어르신에 의하면 “영양남씨가 이곳에 은거한 것은 선조 34년(1601)년”이라며 “입향조 정남(正男) 선조는 목사공파(牧使公派) 8세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진에서 이곳 영천(영주)으로 피난 와 영은(평은리)에 잠시 머물면서 살 곳을 물색 중 은둔지로 적합한 ‘신방’에 터를 잡고 400여 년간 세거해 왔다”고 말했다. 남영성(82)·남재탁(72) 어르신은 “우리 마을은 영양남씨 집성촌으로 현재 30호가 살고 있으며, 전국 각지에 출향인 130여명 있는데 모두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말했다.
새뱅이 전국 향우회 창립 새뱅이 전국 향우회(회장 남호영)는 2014년 4월 26일 고향 발전을 위해 창립됐다. 4년 전 귀향한 남호영(75) 회장은 “우리 마을은 버스도 안 들어오는 산간오지 낙후된 마을”이라며 “고향을 발전시켜 떠나는 고향에서 돌아오는 고향을 만들기 위해 향우회를 창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창립 후 짧은 2년이지만 만수정 건립(남호영 대지기증, 남재용 헌신협조), 영주시의 지원으로 마을 진입로 500m 확포장, 시내버스 노선 개통식, 마을 표지석 세우기 등 많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지난 4월 11일 제2회 향우회 때는 조상의 택호와 이름이 병기된 명찰을 부착하여 뿌리 찾기와 고향의 자존감을 높이기도 했다. 향우회 조직은 부회장 안병호·남창동·남재옥·남종임·안병환·안옥례, 총무 남영홍·남춘희, 감사 남기선·안병욱·남종복, 회원 남재오 외 90여명이다.
400년 역사를 간직한 석정 마을 입구 우측에 ‘석정(石井)’이란 이름을 가진 오래된 샘이 있다. 주변은 반석(盤石)으로 둘러싸여 있고 샘 위에는 수령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샘을 품고 있다.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이 샘은 이 마을 개척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니 400년 역사와 함께 한 유서 깊은 샘이다. 이 마을 남기선(72) 씨는 “예전에는 마을 사람 모두 이 샘물을 먹고 살았으며, 샘은 하루 종일 물 긷는 사람으로 줄을 이었다”며 “1960년 지하수 개발 전까지는 주민 모두 식수로 이용했다”고 말했다. 손옥순 할머니는 “새벽에 물길로 가면 줄을 서야 하고 한참 기다려야 순서가 돌아 왔다”면서 “하루 종일 물 긷는 일이 제일 힘들고 큰 일이었다”고 했다.
숫돌백이와 갓끈이못 숫돌백이산(해발 334m)은 마을의 주산으로 숫돌이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내성천이 한 눈에 들어오고, 문수면과 평은면 일대를 조망할 수 있어 해맞이 명소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마을 뒤 산골짝에는 70여년 전 신은사라는 절이 들어섰는데 창건한 노 스님은 입적하시고, 지금은 도행스님이 중생들을 보살피고 있다. 남호영 향우회장은 갓끈이못 유래에 대해 “상목재를 넘으면 종릉이다. 능으로 가는 선비가 이 못가에서 갓끈을 바로 매고 갔다고 하여 못 이름이 ‘갓끈이못’이 됐다”고 했다. 기자가 새뱅이에 갔던 날 갓끈이못 사진을 찍은 후 상목재 인근에서 땅콩을 심고 있는 박춘자(78)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여기는 고추, 수박, 땅콩, 생강 농사가 제일 많은 편”이라고 했다.
새뱅이 사람들 만방2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남상현 이장은 젊은 40대다. 젊은 이장과 함께 하는 새뱅이는 마을 전체가 젊어 보이는 것 같다. 남 이장의 아버지 남영호(67) 어르신은 15년간 이장직을 수행해 왔다. 그 후 몇 단계 거쳐 2015 남상현 이장이 대를 이어 이장직을 맡게 됐다. 남 이장은 “우리 마을 동훈은 존중, 칭찬, 사랑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자랑거리가 많다”면서 “남재기(82)·손옥순(83) 부부어르신은 결혼한 지 63년이 되어, 이번 선비문화축제 때 선비촌에서 회혼식(回婚式)을 올린다”고 자랑했다. 남 이장은 또 “지난 가을 안대용 반장이 병원에 입원하자 마을 할머니들이 느린 손길이지만 고추, 땅콩 등 가을걷이를 대신해 줘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400년 전 입향조(正男)께서 마을을 개척하면서 “세상으로 나가지 마라, 학덕(學德)을 닦되 절대 벼슬하지 마라”고 신신당부 했을 것이다. 당시로는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새뱅이 출신들이 학업에 열중하여 국가적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어르신들이 기억을 더듬어 불러주는 이름을 무순으로 받아 적었다. 일정 때 건설과장을 지낸 남창헌, 80년대 통일주체대의원을 지낸 남재호, 최근에 판사로 임용된 남준우(의정부), 사무관 이상 남영재, 남병우, 남재완, 남창남, 남재용, 남영근, 남종근 등이 있고, 교육계 남영창·남영삼 교장, 남정희 교수, 안병두 역장 등의 이름이 거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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