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원단촌 ‘청다리마을’ | ||||||||||||||||||||||||||||||||||||||||||||||||||||||||||||||||||||||||||||||||||||||||||||||||||||||||||||
우리마을 탐방[38] 순흥면 원단촌 청다리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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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과 금성단이 있어 ‘원단촌’이라 불리워져 순흥면 청다리 가는 길
아주 옛날에는 징검다리가 있었고 그 후에 통나무로 세운 다리가 있었으며 다시 돌로 교각을 세워 다듬은 돌을 얹어 만든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1967년 처음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졌고 지금 다리는 2004년에 준공된 다리로 다리난간 머릿돌에 ‘제월교’라고 새겨져 있다. 왼쪽 다리목에 강희경인오월입(康熙庚寅五月立), 죽계제월교(竹磎霽月橋)라는 다리비가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은 퇴계가 붙혔으나 오랜 세월로 비가 낡아 숙종 36년(1710)에 다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리 이름은 ‘제월교’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청다리’라고 부른다.
원단촌의 유래 청다리 지역은 조선시대 때 순흥부 내죽면 원촌 지역으로 소수서원이 있다고 해서 원촌(院村)이라 했다. 그 후 금성단이 있는 마을을 단촌(壇村)이라고 분리하여 부르다 나중에 두 마을을 합해 ‘원단촌’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변경을 강행할 때 죽계를 사이에 두고 남쪽은 내죽면 옛지명 그대로 내죽리(內竹理)라 하고 북쪽은 청다리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청구리(靑邱理)’라 했다. 현재 행정구역상 내죽2리·청구1리로 나뉘어져 있으나 보통 ‘원단촌(院壇村)’이라고 하는 이유는 마을 안에 소수서원과 금성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청다리 마을에는 80여호에 120여명이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사과, 복숭아 농사로 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여럿 있다고 한다.
청다리의 전설 어릴 적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는 말을 한두 번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는 이와 비슷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원조는 순흥 청다리이다. 이 전설이 생겨난 것은 소수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수서원은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祀廟)를 세운 후 이듬해에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서원의 시초다. 그 후 1550년에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임금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체계적인 사립대학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처럼 최초의 사액서원이 설립되자 영남의 선비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순흥은 학문의 도시로 번성했다. 그런데 여기로 모여드는 선비들은 주로 젊은 유생들이었는데 이들이 이 지역의 기생 또는 처녀들과 정분이 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교사회였던 당시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당사자 집안에서는 비밀리에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서 그들이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갓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밤중에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버려진 아이는 누군가가 데려다 키웠는데 이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자 이번에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선비 신분의 핏줄을 데려다 기르는 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운이 좋으면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아이를 얻어서 돌아가고, 운이 안 맞으면 몇 달씩을 기다려서 아이를 얻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실패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희생됐다. 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이들이 청다리 밑에서 거지들의 구호를 받다가 아이 없는 집에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청다리의 ‘청’자의 해석 옛날 이곳은 숲이 우거지고 물이 맑아 선비들이 기생을 불러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물이 깊어 푸르게 보인다고 해서 푸를 청(靑)자를 써 ‘청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의미있는 언어만 가려서 사용했던 선조들은 여성의 다리를 흰 무에 비유하여 무 청(菁)자를 써 ‘菁다리’라 했는데 일제가 창지개명하면서 ‘靑다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다리이름의 청(靑)자는 청루(靑樓)를 뜻하는 것으로 그 부근에 기생집이 많았던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찌됐든 청다리는 기생과 선비 그리고 버려진 아이와 관련이 있는 다리이다. 유학(儒學)의 마을 원단촌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던 조선 왕조는 유학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제사였다. 즉 유학은 곧 제사다. 원단촌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유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제사 받드는 일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금성단·소수서원·순흥향교 제향은 향촌 유림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올린다. 금성단 주민들은 압각수(鴨脚樹)를 성황목으로, 서원마을 주민들은 영귀봉 정상 토축단을 성황신으로 또 청구리 마을사람들은 서원 동쪽 군자산 아래 있는 숲더미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대보름날 자시(子時)에 동제를 올린다. 이곳 사람들은 성황제를 통해 유학의 정신(仁義禮智)을 이어가고 있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소지(燒紙)를 올린다.
압각수(鴨脚樹)는 충신수(忠臣樹)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라고 부르는 이 나무가 유명한 것은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경이로운 이력 때문이다. 옛적에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나네"라는 참요(讖謠, 예언민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1456년)이 실패되고 순흥도호부가 초토화되면서 이 나무도 불에 타 죽었다. 세월이 흘러 밑둥치만 남아 있다가 순흥부가 복설(1682년)되자 나무에 새로운 잎이 돋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의 운명과 같이했다고 한여 충신수라고도 부른다. 원단촌·청다리 사람들 지난달 30일 송여골 마을회관에서 조진오 이장, 장사호(72) 노인회장, 이순희(61) 부녀회장, 박종순(69)씨, 김복례(54)씨 등 여러 사람들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진오 이장은 고구려식 돌방무덤인 바느레 고분에 대해 “2007년 동양대에서 발굴했는데 유물은 도굴당한 상태였고 묘실 내부에는 정교하게 다듬은 관대 자리만 남아 있었다”며 “여름이면 무덤 안에서 푸른 빛깔의 물이 흐르는데 이물로 몸을 씻으면 피부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 했다. 이순희 부녀회장은 바느레 소나무에 대해 “수령 200년 정도의 반송으로 둥치 2.4m, 폭 8m, 높이 2m이며 밖에서 보면 초가지붕이고 안에서 보면 용트림하는 것 같다”며 “찾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튿날인 1일에는 청다리(청구1리) 마을회관에서 안창호 이장, 조일복(78) 노인회장, 류옥주(81)할머니, 민원계(78)할머니, 류복순(74)씨, 진성이씨 할머니 등 여러분을 만나 옛 이야기를 들었다. 조일복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안창호 이장님을 중심으로 협동·단결하는 좋은 마을”이라며 “정월대보름날 군자산에 가서 성황제를 올리고 마을의 평안과 부자되기를 빈다”고 했다. 진성이씨 할머니는 “소수서원에 가면 경자바위가 있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도 이 경(敬)자는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공경할 경(敬)자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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