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순흥 비봉산 서낭당

단산사람 2015. 8. 5. 23:08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신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술할마시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三神堂神位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西配位神位

順興安官神位

東配位神位

 

 

 순흥 읍내 주산인 비봉산 서남쪽 순흥 안씨 세배단소 조금 지난 우측

산골짜기 안에 남향하고 있다.

성황당은 두레골 성황당 고치재 성황당과 더불어 이 고장 사람들의

도타운 믿음을 주는 본당이다.

당집 내에는 영조 30(1754)년 순흥부사 조덕상〔趙德常 계유(癸酉 1753)년

1월 - 정축(丁丑 1757)년 11월〕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정조 10년(1786)

순흥부사 정지순〔鄭持淳 갑진(甲辰 1784)년 1월 - 무신(戊申 1788)년 5월〕이 중수하였다는 이건기(移建記)와 중건기(重建記)가 걸려 있었는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다른 곳에 보관을 하고 있다.

고사는 읍내 4개 동네에서 해마다 음력 1월 13일 사시(巳時 오전 10시)에

여기 본당에 제사를 올리고 오후에 두레골로 올라가서 목욕재계하고 14일

소를 잡고 제물준비를 하여 고사를 15일 자정에 올린다.

고사가 끝나면 당집에 모두 모여 음복하고 대동화합의 장을 마련하기도 한다.

당집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납도리집으로 보기 드문 규모이다.

기단은 자연석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벽체는 판벽을 치고 전면 어칸에만 쌍여닫이 띠장 널문을 달아 출입케 했다.

내부는 통 칸에 합판을 깔고 신단(神壇)은 뒷벽에 길게 만들어 놓았다.

신위는 어칸 중앙에 순흥안관신위(順興安官神位)를 주신(主神)으로 그

좌우에 동 서 배위신위(東西配位神位)를 모셨고 좌협칸에

삼신당신위(三神堂神位)를 모셨다.

우협칸에는 술할마시라고 부르는 돌 신체를 모셨다.

상부가구는 3량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성황당 뒤편에 산신각이 있다.

본래는 잘 조성(彫成)된 목신상(木神橡)을 모셨는데 왜정말기에 어느

정신이상자가 신상(神像)을 내다가 불태웠기에 위패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표제 : 성황사 중건기(城隍祠 重建記).

분류 : 현판(懸板).

크기 : 79cm ×  30cm.

년도 : 1786(건융51 병오)년.

탁본자 : 박세우(朴世雨 1954 - ? ).

소재지 : 영주시 순흥면 읍내 1리(비봉산).


城隍祠 重建記

州有城隍神 爲之祠以安之 神主一州 而係一州之責者 甚不輕而重 是祠也 盖州伯之所管攝 自州之復設以後 卽有祠 而州伯每增修改葺 未嘗視之 以叢祠滛祠之比 相基於淨地 立祠於吉辰凡州之災沴愴異 無不祈禱而弭之 或有水早極備極無亦爲之祝儴焉 而神亦呵禁捍毆回幹旋移有朮 輒應無作神差吁 亦異哉 往在甲戌歲 知州趙公 始移是祠 堂宇口完絰矣 其後年久 風雨侵搖 棟傾瓦剝 勢若昕夕不攴 今我鄭侯 特爲民 竟使之重修 先賙役糧 繼而給村瓦許役丁 又命曰 城隍祠於州民 大有關焉 則此祠可慢乎 此役可緩乎 告之用亶故役者 亦樂爲之事 不月工訖 始終皆是我明府之力也 州之吏人 於其安神之夕 齋沐百拜 而說於神曰 我明府 爲我民而修神祠 願神體明府 而垂我民之惠 年穀使之比歲 大有厲氣 使之駈除 山左吏燮 則辟而逐之 所賜則迎而順之 使州之境 獨作百里太古 則神之德 將無疆 而我侯之惠 亦與有光焉 祝畢相率而出 天日晴暄 惠風時至 神亦若聰止焉是爲記

都監 金銀錫

     金應宅

衙薪 洞長 護軍 吳泰成

     洞任 通政 趙泰貴 都家

城下 洞長 通政 李遇春

     洞任 宋采得 木手 李禮述

有司 林口爲 崔聖淂

時公凡 戶長 申宗潝 色掌 口卜金

       吏房 林裕太 金戒元

       承發 金與得 供養主 南成昌

       都使公 申甲立 申朋伊

       首奴 太龍 山主 宋戊三

塢材所任 洪快淂 口痤 李口畚

         尹尙信 化主 伯幸大

乾隆 五十一年 丙午 孟夏浣望記


성황사 중건기(城隍祠 重建記)

고을에 성황신(城隍神)이 있으니 그를 위해 사당을 짓고 신주를 안치했다.

신은 한 고을을 주관하니 한 고을의 책임과 관련된 것이 심히 가볍지 않고

무겁다.

이 사당은 고을 순흥부사가 관장하는 것이나 고을이 복설된 뒤로 사당이

있었는데 고을 순흥부사는 증수하고 보수해서 이것을 보기를 여타 음란한

사당과 비할 바가 아니다.

깨끗한 곳에 터를 잡고 좋은 날을 가려 사당을 세우니 고을의 모든 재난과

나쁜 일이 이 곳에서 빌어 그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은 가뭄이 들어 이 곳에서 빌 면은 신이 또한 비를 내리고 재난을

그치게 했다.

아! 또한 기이하구나!

지난 갑술(甲戌 1754)해에 고을 순흥부사 조덕상〔趙德常 계유(癸酉 1753)년

1월 - 정축(丁丑 1757)년 11월〕이 비로소 이 사당을 옮기고 깨끗이

단장했다.

그 후로 오래되어 바람과 비에 기둥은 무너지고 기와는 벗겨져 그 형세가

아침저녁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제 우리 순흥부사 정지순〔鄭持淳 갑진(甲辰 1784)년 1월 -

무신(戊申 1788)년 5월〕께서 특별히 백성들을 위하여 마침내 중수하게 하니 먼저 일꾼과 양식을 대어주고 이어서 재목과 기와를 제공했다.

영을 내려서 이르기를

성황당이 고을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관계가 있으니 이 사당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이 일을 늦출 수 있겠는가?

라고 고하니 이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 즐겁게 일을 함으로써 한 달이 안

되어 공사가 끝났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현명한 군수님의 힘인데 고을의 아전들이

그 신주를 모시는 저녁에 목욕재계하고 백 번 절을 올리면서 신에게

말씀을 올리기를 우리 현명한 부사님께서 우리 백성들을 위해서 성황당을

수리했습니다.

원컨대 신께서는 우리 현명한 부사님을 본 받아서 우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그리고 해마다 풍년이 들게 하고 전념 병이나 나쁜 기운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또한 산이 무너지고 재앙이 일어난다면 이를 물리치게 해 주십시오.

내려주시는 은택을 맞이하여 이를 따르겠습니다.

고을의 경내로 하여금 홀로 작은 고을 순박한 백성들로 만들어 준다면

신의 덕은 장차 끝이 없을 것이요.

우리 군수님의 은혜도 그와 더불어 빛날 것입니다.고 하였다.

빌기를 마치고 서로 끌면서 나오니 하늘의 해는 맑고 깨끗했으며 온화한

바람은 제때에 불어왔다.

신도 또한 이 말을 듣고 비를 그치게 한 것이다.

이에 기록한다.

도감(都監) 김은석(金銀錫)

           김응택(金應宅)

아신(衙薪) 동장(洞長) 호군(護軍) 오태성(吳泰成)

           동임(洞任) 통정(通政) 조태귀(趙泰貴) 도가(都家)

성하(城下) 동장(洞長) 통정(通政) 이우춘(李遇春)

           동임(洞任) 송채득(宋采得) 목수(木手) 이예술(李禮述)

유사(有司) 임口위(林口爲) 최성득(崔聖淂)

시공범(時公凡) 호장(戶長) 신종흡(申宗潝) 색장(色掌) 口복금(口卜金)

               이방(吏房) 임유태(林裕太) 김계원(金戒元)

               승발(承發) 김여득(金與得) 공양주(供養主) 남성창(南成昌)

               도사공(都使公) 신갑입(申甲立) 신붕이(申朋伊)

               수노(首奴) 태룡(太龍) 산주(山主) 송무삼(宋戊三)

오재소임(塢材所任) 홍쾌득(洪快淂) 口좌(口痤) 이口분(李口畚)

                   윤상신(尹尙信) 화주(化主) 백행대(伯幸大)

건융(乾隆) 51년 병오(丙午) 맹하완망(孟夏浣望)에 기록(記錄)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표제 : 성황사 이건기(城隍祠 移建記).

분류 : 현판(懸板).

크기 : 87cm ×  26cm.

년도 : 1754(건융19 갑술)년.

탁본자 : 박세우(朴世雨 1954 - ? ).

소재지 : 영주시 순흥면 읍내 1리(비봉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