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영주의 역사&인물

영주의 연혁

단산사람 2012. 8. 29. 20:51

영주역사-1

영주시의 연혁

1. 영주의 연혁

삼국시대-내기군(奈己郡), 급벌산군(及伐山郡)

통일신라시대-내령군(奈靈郡), 기목진(基木鎭), 급산군(岌山郡)

고려시대-강주군(剛州郡), 기주(基州), 순흥부(順興府)

조선시대-영천군(榮川郡), 풍기군(豊基郡),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1914.3.1-위 3개 군․부를 합병 영주군이 됨

1940.11.1-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

1973.7.1-풍기면이 풍기읍으로 승격

1980.4.1-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 영주군은 영풍군으로 개칭하여 분리

1995.1.1-영주시․영풍군 통합 영주시로 발족

 

2. 영주시의 역사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우리 영주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支石墓)와 입석(立石) 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이미 사람이 생활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시의 연혁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삼국시대

삼국시대 초에는 고구려 영토로서 내기군(奈已郡)과 급벌산군(及伐山郡)이 있

었고 내기군(奈已郡)에는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古斯馬縣)이, 급벌산군에는

이벌지현(伊伐支縣)이 각기 있었다. 그러나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 재위(在位)

: 80-112>이 이 지역을 공취(攻取)므로써 신라의 땅이 되었다.

  나.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在位) : 742-765>때 내기군(奈己郡)을 내

령군(奈靈郡)으로 개칭하고, 매곡현은 선곡현(善谷縣)으로, 고사마현은 옥마현(玉

馬縣)으로 각각 개명하였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급산군(岌山郡)으로 개칭하면

서 그에 예속된 이벌지현은 인풍현(隣豊縣)으로 다시 개칭하고 풍기지역은 기목 진(基木鎭)이 군진(軍鎭)으로 설치되었다.

  다. 고려시대

기목진(基木鎭)은 다시 기주(基州)라 개칭 하였으며, 성종 14년(995)에 내령군

(奈靈郡)은 강주군(剛州郡)으로 개칭하여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급산군(岌山

郡)은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순정(順政)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현종 9년(1018)에는 강주, 흥주, 기주가 모두 지금의 안동인 길주(吉州)에 속하게 되었으며, 인종 21년(1143)에 강주는 순안군(順安郡)으로 개편하고 흥주

는 순안군에 이속(移屬)하였다.

그 후 순안군(順安郡)에 이속되었던 흥주는 충렬왕(忠烈王)의 안태지(安胎地)가

되면서 흥령현(興寧縣)이 되었으나 충숙왕(忠肅王)의 안태지가 되므로써 지흥주

사(知興州事)로 승격되었다. 그 후 충목왕(忠穆王)의 안태지가 되면서 순흥부(順

興府)로 승격(1348)되었다.

한편 순안군(順安郡)은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고향이라 하여 지영

주사(知榮州事)로 승격 되었다. 기주(基州)는 고려 말 공양왕 때 은풍을 예속시켜 안동부(安東府)의 속현이 되었다.

 

라. 조선시대

지영주사(知榮州事)는 태종 13년(1413)에 순안군(順安郡)을 영천군(榮川郡)으 로개칭하고 군수(郡守:종4품)와 육방(六房)을 두었다. 순흥부(順興府)는 태종13년 (1413)에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되고 별호(別號)를 순정(順政)이라 하였으며 도호부사(都護府使 : 종3품)를 두었다. 한편 기주(基州)는 5대 문종의 안태지(安 胎地)가 되자 은풍(殷豊)과 기천(基川)의 양 이름을 따서 풍기군(豊基郡)으로 승 격하였다. 그러나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는 세조 3년(1457) 부사(府使) 이보흠

(李甫欽)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실패함으

로써 폐부가 되고 이 지역은 영천군, 풍기군, 봉화현에 각각 활속(割屬) 되었다.

  그 후 225년만인 숙종 9년(1683)에 다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복설되었으 나 고종 32년(1895)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를 폐지하고 순흥군(順興郡)으로 개 편되었다.

  마. 일제강점시대

1914. 3. 1 부령 제111호(1913. 12. 29)로 행정구역 개편(府․郡制 통폐합)에

의하여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 영주군(11개면)으로 개칭하였으며, 이당시

풍기군의 관할이었던 상리(上里), 하리 (下里)는 지역적인 관계로 예천군으로 편

입되고 순흥군의 수식(水息), 수민단면(壽民丹面)은 봉화군으로 각기 편입이 되었 다. 1914..4.1 영천군은 영주군으로, 영천면은 영주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0.11.1 부령 제221호(1940.10.23)로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하였다.

  바. 대한민국

1955년에 영암선(영동선)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충지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읍

인구는 약 2만8천여 명으로 증가되었으며, 1961년 7월의 대홍수는 영주발전의

획기적 대전기를 가져와 남원천의 유로변경이란 역사가 이루어져 신영주 시가지 가 형성되었으며, 1966년 경북선이 개통되므로써 인구가 크게 유입되어 1968년 에는 읍인구가 5만명을 초과하게 되었다. 한편 1973.7.1 대통령령 제6542호

(1973. 3. 12)로 봉화군 상운면 내림리, 두월리가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되고, 대 통령령 제6543호(1973. 3. 12)로 풍기면이 풍기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4.1법률 제3188호(1979.12.28)로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이산면의

원리 일부와 조암리, 문수면 적서리, 안정면 아지동이 영주시로 편입되고 풍기읍

등 1읍 9면을 행정구역으로 영풍군(榮豊郡)이 분리되었다.

1983.2.15 대통령령 제11027호(1983.1.10)로 이산면 원리2리가 영주시로, 영풍

군 평은면 수도리가 문수면으로, 안정면 파지동이 장수면에 각기 편입되었으며

1989.1.1 대통령령 제12577호(1988.12.22)로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 일부가 영

풍군 장수면 소룡2리에 편입되었다. 영주시·영풍군이 분리된 지 15년 만에 다시

도․농복합형시설치에관한법률 제4774호(1994.8.3)에 의거 1995.1.1. 영주시와 영

풍군 1읍 9면 13동을 행정구역으로 하여 통합 영주시로 새롭게 발족 하였으며, 지방행정 구조 조정에 따른 인구 과소동 통폐합에 의거 1998. 10. 15 영주시 조

례 제267호(1998.10.9)로 상망동과 하망1동을 통합하여 상망동으로, 하망2동과

하망3동을 통합하여 하망동으로, 영주1동과 영주2동, 영주3동을 통합하여 영주1

동으로, 영주4동을 영주2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1읍 9면 13동에서 1읍 9면 9동

으로 행정동이 통합되었다.

 

백과사전

삼한시대에 날이국(捺已國)이었던 이 지역은 신라의 파사왕이 점령하고 군(郡)을 설치함으로써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내령군(奈靈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선곡현(善谷縣:지금의 禮安)·옥마현(玉馬縣:지금의 봉화)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강주(剛州)로 개칭했다가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안동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으나, 1143년(인종 21)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승격되어 독립했으며, 1259년(고종 46)에 영주(榮州)로 승격했다. 조선초인 1413년(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영천의 별호는 구성(龜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1895년(고종 31)에 안동부 영천군,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입지인 임지면이 봉화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풍기군과 순흥군이 영천군에 합병하여 영주군을 이루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영천군의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이 영주면으로, 두전면·호문면이 장수면으로, 적포면·권선면·진혈면(일부)이 문수면으로, 천상면·진혈면(일부)이 평은면으로, 산이면·어화면·말암면이 이산면으로 통합되었으며, 풍기군의 10개면이 5개면으로, 순흥군의 6개면이 3개면으로 폐합되었다. 1923년에 상리면·하리면이 예천군으로 이관되었다. 1940년에 영주면, 1973년에 풍기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에 영주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영풍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영풍군과 중심도시 기능을 담당해왔던 영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영주시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