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1500년 전, 동해를 우리 역사에 품어들이다!
동해안 패권을 잡기위한 7년의 준비기간과 130km가 넘는 원정길.
신라장군 이사부는 해상왕국 우산국을 어떻게 정벌했을까?
1500년 전 울릉도 앞바다에 나타난 신라함대. 신라군 총사령관은 이사부 장군이었다.
<동해의 수호신 신라장군 이사부>
신라장군 이사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울릉도와 독도입니다. 울릉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우산국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일본역사서엔 권겐, 우르마라는 명칭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런 울릉도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끌어들인 이가 바로 이사부 장군이죠. 헌데 여러분께선 이사부 장군이 어떤 방법으로 우산국을 정벌했는지 알고 있는지요. 우산국 정벌에 나선 이사부 장군이 내놓은 비장의 무기는 바로 이렇게 나무를 깎아서 만든 사자상이었습니다. 과연 이 나무 사자로 이사부 장군은 어떻게 우산국을 정벌했던 걸까요.
512년 음력 6월. 동해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 울릉도가 우리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신라가 우산국 정벌에 나선 이날 이사부 장군 옆엔 나무로 만든 사자가 있었다. 1500년 전 바닷길로 이틀이나 걸리는 나라 우산국은 신라인들에겐 미지의 나라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신라인들의 눈에 비친 우산국 사람들은 우둔하고 사나워 보였다.
권오엽 교수 충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우한이라는 말은 신라 입장이 아니고 우산국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용맹한 사람들라고 볼 수도 있죠. 그리고 용맹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라입장에서 볼 때는 교오(交午). 거만하다. 그 다음에 신라의 질서를 거부하기 때문에 오랑캐다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나선 이사부 장군이 준비한 것은 바로 나무로 만든 사자였다. 나무사자를 만들어 배에 나눠싣고 마침내 우산국 정벌을 위한 원정길에 나선 신라함대. 배 안에 실린 사자는 우산국 정벌을 위한 비장의 무기였다. 당시 나무 사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록엔 남아 있지 않다. 신라인들의 생활문화가 담겨 있는 토우엔 당시 사람들이 흙으로 만든 각종 동물상이 있다. 실제 눈으로 확인한 동물은 물론 상상속의 동물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사자는 없다.
천진기 과장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한반도에는 사자가 살지 않았죠. 그러면서 불교의 유입과 함께 불법수호신, 불교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사자가 한반도 문화의 유입이 되는데 불교와 함께 들어옵니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는 사자의 본고장이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아소카왕 사자주두는 인도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불교유물이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신라에도 사자상이 나타난다. 이사부의 나무사자가 만들어진지 100여년이 지난 후 제작된 사자상이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사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비스러운 동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오면 신라가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집니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동물이라고 이야기 하라면 저는 사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신라에 전혀 없던게 신라에는 갑자기 많아지는데 그 사이에 이사부 장군이 나무로 만든 사자를 활용했다라는 것이죠.”
나무 사자를 만들어 우산국 정벌에 나선 신라장군 이사부. 그는 왜 나무 사자를 만든 것일까.
“이사부 장군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과 그 새로운 사상과 함께 들어온 아주 이상하게 생긴 동물인 사자를 봤을 것이고 그 다음 바로 그 사자를 이사부 장군의 전략적으로 아마 군사적 전략으로 이용했을 것이라 예상된다.”
지난해 이사부 역사문화축전나무사자 깎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성복 씨. 그는 이사부가 만든 나무 사자를 재현하기 위해 통일신라 사자 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자 상을 깎으려면 최소한 한 달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다.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선 위협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사자 상을 만들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머리 부분이었다. 전쟁에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위용을 가진 사자 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성복 원통공예사
“(당시 우산국 사람들이 사자 상을 보고) 무섭다고 생각했겠죠. 전에 보지 못했던 동물이니까 굉장히 무섭다고 생각했겠죠.”
나무로 만든 사자였지만 사자를 처음 본 우산국 사람들의 놀라움은 컸을 것이다. 사자 상을 앞세운 이사부의 전술은 주요했고 이사부는 별다른 전투 없이 우산국 공략에 성공한다.
전경욱 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우산국 사람들을 위협할 때 ‘너희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 동물들을 풀어놓아서 다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자로 가장한 이런 것이 우리 기록에 처음 나오는 것이 이사부고 그것을 이제 트로이 목마처럼 목우사자를 활용해서 싸움에서 활용해서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이런 역할로 나오는 것이죠.”
전쟁에서 치밀한 계략으로 적의 눈을 속이는 전술은 고대로 갈수록 다양하게 활용된다. 신라 내물왕 때 신라군은 왜적이 침입하자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신라군처럼 보이게 했다.1) 이렇게 만든 수천 개의 허수아비를 토함산 기슭에 세우고 군사 천명을 매복시켜 신라군을 왜구를 불시에 기습 공격한다. 결과는 신라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지혜로운 전략이 필수적이다. 이사부는 상대의 약점을 읽는 치밀한 전술가였다. 탈해왕 때의 장수 거도가 말놀이로 인근 두 나라를 정복한 것처럼 이사부는 싸움에서 계략을 이용할 줄 아는 장수였다.
김창석 교수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그것이 일종의 기만전술인데 일단 기만을 해놓고 상대방이 방심했을 때 그때는 전격적으로 기동을 해서 적을 굴복시키는 그런 전술은 거도 때 이미 구사가 되고 그것이 이사부가 여러 차례 그런 전술을 활용한 사례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부의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통해서 신라의 어떤 고유한 전법의 전통, 군사전략의 전통이 형성되어가고 있다라는 것을 거도와 이사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무로 만든 사자로 우산국을 위협해 우산국 정벌에 성공한 신라장군 이사부. 그는 신라의 탁월한 전략가였다.
천오백년 전 나무로 만든 사자를 이용해 우산국을 정벌했다니 그 전술이 놀랍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사부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책략을 썼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기록에는 이사부라는 인물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그 생몰연대조차 밝혀져 있지 않아 궁금증을 더합니다. 신라장군 이사부.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정월 대보름. 북청사자놀이는 한해의 나쁜 액을 막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백수의 왕 사자가 나쁜 액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을이 평안하고 아무 탈 없이 한해를 지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북청사자놀이. 이 놀이는 이사부의 사자로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전경욱 교수
“우리가 지금 사자놀이 하면 흔히 북청사자놀이라고 얘기 합니다. 이 북청사자놀이는 그 동안 있었던 여러 사자 춤 역대에 있었던 사자춤들의 모습을 아주 종합적으로 집약해서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자춤의 대표적인 것이죠. 그래서 고려시대 나례(儺禮)처럼 또 이사부가 적을 위협할 만큼 위엄 있고 무서운 모습, 이렇게 해가지고 집집마다 가서 귀신을 쫓아주고 복을 빌어주고 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신밟기. 이것을 사자를 앞세워서 한 것이 북청사자놀이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문인 최치원이 남긴 향악자경엔 산예(狻猊)라는 사자춤이 등장한다. 사막을 건너 먼 곳에서 흘러와 옷에 털은 다 빠졌지만 머리와 꼬리를 흔들어 어짐과 덕망을 펼치니 그 기운이 다른 동물과 다르더라.
“벽사적인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이미 이사부 목우사자로부터 암시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아까 말씀들인 것과 같이 이사부 때는 위협적인 벽사적인 존재였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 선생이 봤던 그런 사자춤은 향악자경에 있는 산예라는 사자춤은 그런 벽사적인 기능보다는 놀이적인 공연물적인 기능이 많습니다. 그래서 공연물적인 기능이 있다가 고려시대 오면 다시 나례에서 놀면서 벽사적인 것과 함께 연희적인 놀이적인 요소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오면 중국사신 영접하는 행사 이건 놀이적인 요소겠죠.”
조선 정조 때 수원화성을 완공한 후 열린 축하행사에도 사자춤이 공연됐다. 평안감사가 잔치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엔 청사자와 홍사자가 나와 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이 쓴 성호사설엔 사자놀이가 이사부로부터 유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산국을 정벌한 나무사자는 그 후 민간에 전해지면서 악을 물리치는가 하면 놀이로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다.
현재의 강릉 KBS가 자리 잡은 이곳은 강릉지역에 12신을 모신 대성황당이 있던 자리다. 여기엔 지금도 대성황당에 서냥 숲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김경남 교수 한중대학교 전통문화학부
“과거에 그 대성황당의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되겠습니다. 앉아있는 건물이 이쪽 건물이고 지금도 이 앞쪽으로 대성황당의 성황님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들이 저렇게 굵은 600년된 나무들이 아직까지 현존해 있고...”
1900년 초까지만 해도 대성황당은 강릉을 지키는 주신을 모신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돼 사라졌다. 1930년 강릉단오제를 조사한 일본학자 아키바 다카시는 조사자료에서 12신 가운데 한사람이 신라장군 이사부라고 밝히고 있다.
“동해안 지역의 해상장악력을 동시에 구축을 했고 그 과정의 하나로써 우산국을 정벌하고 또 그러한 위엄이나 이사부 장군의 업적이나 치적이 이 지역의 주민들의 관념 속에 늘 사라서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 지고 그것이 다시 민속신앙 속에 하나의 인격신화 하는 과정에서 이사부 장군을 대성황사에 모시는 즉 신격화시켜서 모시는 그러한 과정에서 이사부장군이 강릉단오제의 대성황사 주요 신으로 숭앙되는 그런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1500년 전 이사부에 모습을 그리고 있는 권오창 화백. 이사부의 역사적인 활동과 시대적인 고증을 통해 이사부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가고 있다.
권오창 화백 동강궁중회화연구소
“지금의 삼척, 강릉지역에 군주로 활동하던 시대가 이십대 정도의 나이였는데 그때로 할 것인가 아니면 병부령으로 나이 많을 시기 즉 진흥왕 시대의 인물로 할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토론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울릉도를 복속시킨 활동에 가장 전성기였던 약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로 하자는 그 연령대로 결정했습니다.”
우산국 정벌에 나설 당시 이사부의 나이는 혈기왕성한 이십대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은 김씨, 내물왕의 4세손이다.2) 박씨, 김씨, 석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가던 신라는 내물왕 대 와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며 김씨 왕조를 확립했다. 그러나 당시 왕권은 미약했고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다. 신라왕을 백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이었다는 결정적인 단서다.3) 고구려는 장수왕 대에 와서 더욱 강력한 남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신라를 거쳐 가야지역까지 깊숙이 진출한 고구려는 5세기 한반도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이명식 명예교수 대구대학교
“신라의 왕을 고구려가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가 됐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17대 왕 실성왕이라는 왕이 있는데 그 실성왕이 고구려에 의해서 세워졌다가 또 나중에 19대 눌지왕도 고구려에서 세워졌다는 그런 신라의 왕을 고구려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450년. 지금의 삼척지역에서 고구려 장수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악화된다.
“481년경에 가면 이제 내륙으로 오늘날의 청주지역까지 고구려가 차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잠시에 말씀드린 대로 신라의 영토를 많이 빼앗아 가지고 오늘날의 낙동강 상류가 고구려하고 신라하고 고구려하고 국경선이 되는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중원고구려비엔 5세기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증거다.4) 470년 자비왕 때 축성된 삼년산성은 그 이름도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다는데서 유래했다. 성 높이가 무려 10미터가 넘는 삼년산성은 돌을 이용해 쌓은 대표적인 신라 산성이다. 정상에서 사방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성은 경주에서 한강유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최고의 요새였다. 바로 이곳을 거점으로 5세기 후반 신라는 한강으로 나가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북진기지였다.
양기석 교수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바로 이 삼년산성이 그런 그 신라가 고구려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려는 그러면서도 신라가 삼국에서의 중심세력으로 발돋움하려는 그런 측면에서의 의미를 가진 그런 산성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5세기 중반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고 북진을 꽤한다. 삼년산성을 내륙의 저지선으로 삼아 고구려에 맞서는 한편 동해안의 북방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당시 신라의 동해안 변경을 지켰던 이가 바로 이사부 장군이다. 신라는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동해안 지역에서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던 곳을 되찾기 시작한다.
강릉 영진리 고분군은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과거엔 많은 수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확인된 무덤은 두 곳. 돌을 쌓아 만든 이곳은 전형적인 6세기 신라식 석실분이다.
이상수 학예실장 관동대학교 박물관
“이 고분이 갖고 있는 의미는 바로 신라의 거점지역. 거점지역의 중요지점에다가 많은 사람을 이주시키고 그 다음에 거기에 더불어서 많은 고분들이 축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따라서 이 고분이 축조됐던 배경은 신라의 북진과 연관돼 있고요. 그 다음의 이 지역의 중요성은 다시 말하면 전략적인 기지로서의 중요성을 대변해준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동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는 실직주. 지금의 삼척이었다. 5세기 초 지증왕은 실직주를 설치했다. 주는 국경지역을 통치하는 신라지방 통치의 중심이었다. 삼척에 처음 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의 중요성을 말해준다.5)
김창석 교수
“삼척지역은 신라의 동해안쪽에서는 가장 북방의 전진기지라고 볼 수가 있고요. 그 북쪽의 고구려 세력들이 고구려, 동예 같은 이런 세력들이 역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척지역을 장악을 하면 삼척이 바로 바닷가이기 때문에 동해 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그런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신라가 지증왕 때 처음으로 지방에 중요한 군사 주둔지로 삼척지역을 삼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사부는 바로 이곳 실직주의 첫 번째 군주로 임명된다.
이명식 명예교수
“이때 신라의 군주는 한 지역을 고정 배치되는 것이 아니고 원정군 사령관의 성격도 가지고 있으면서 지방통치자의 성격도 겸해서 가지고 있는 그래서 그 사령부가 삼척에 있다가 다수 사령부가 강릉으로 옮겼다가 이런 식으로 변천하는 그런 모습 첫 번째 지방통치자가 이사부입니다.”
지증왕은 동해안 변방 총책임자로 이사부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왜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로 임명한 것일까.
“이사부와 지증왕은 숙질관계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증왕이 왕이 될 때 나이가 64살이라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적어도 이사부를 파견할 정도의 지증왕 나이는 거의 70이 다된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사부의 나이는 이사부는 이후에 활동을 계산해 보면 이십대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십대의 젊은 이사부를 파견할 때에는 그냥 뭐 이사부가 인물이 출중하다는 것이 아니고 왕과의 아주 가까운 친척관계가 작용했다고 보고 또 이사부 개인의 능력도 감안됐으리라 봅니다.”
지증왕은 실직군주 이사부에게 울릉도 정벌을 명한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김창석 교수
“고구려하고 왜가 만약에 손을 잡게 되면 신라 입장에서는 동북방이나 동남방향의 두 개의 강대한 적대세력을 서로 연대한 적대세력을 마주하는 셈이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초래가 되는 것이죠. 그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바로 그 중간 거점인 우산국을 신라가 복속을 시키는 것입니다.”
512년 음력 6월. 마침내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우산국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신라의 미래는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원정결과에 달려 있었다.
1500년 전 한반도는 동해 한가운데 있는 섬나라 우산국이 어떤 나라와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판가름 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우산국 정벌을 책임지게 된 이사부 장군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삼국사기를 보면 우산국 사람들을 무력으로 정복시키기 어렵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국운이 달린 해상원정 전투를 해야 하는 이사부 장군은 이 전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육지에서 울릉도까지는 가장 가까운 거리가 무려 130킬로미터가 넘습니다. 지금도 바다를 건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1500년 전 우산국까지 그 먼 곳을 정벌하러 나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사부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어떻게 이 원정길을 준비했던 걸까요.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울릉도를 볼 수 있다는 소공대. 이곳은 관동대로의 길목에 있다. 울진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육로였던 관공대로. 이 길은 지금도 쉽게 넘기 힘든 곳이다.
최동열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보다>의 저자.
“이쪽 동해안 지형이 육로교통이 굉장히 어려운 지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물자나 군사의 이동은 주로 해로를 통해 즉 수로를 통해서 이동하는 것이 굉장히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고대의 전투나 전쟁은 주로 해로를 이용해서 대규모 물자나 인력을 빠르게 수송하는 그런 방법들이 굉장히 많이 사용됐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삼척의 군사령관이 된 이사부는 가장 먼저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 하고 정비하는데 나선다.6)
윤명철 교수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이미 5세기 중후반부터 신라는 본격적인 해양활동 능력을 강화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전함의 존재가 등장하고요, 전함을 수리했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당시 국제관계로 볼 때 고구려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 신라는 북상을 했는데요, 특히 전투가 벌어진 지역 중에 하나가 바로 해안가 지역에 있습니다.”
실직주의 군주가 된 이사부는 선박을 준비하면서 우산국 정벌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7년 후 하슬라 주 지금의 강릉의 군주로 옮겨가 우산국을 정벌하기까지 이사부는 튼튼한 전선을 만드는데 큰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당시 신라 선박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오백년 후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한 고려 과선을 통해 신라 배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동해를 건넜던 이사부 함대의 신라 선박은 고려 과선과 어떻게 닮아 있었을까.
이원식 소장 원인고대선박연구소
“근데 옛날에 조선, 선박의 발달은 적어도 한 선종이 어떠한 하나 배의 선종이 선정돼서 시작됐다고 하면 그것이 적어도 2백년, 3백년 많게는 5, 6백년까지도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부 때의 과선의 형태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면 이사부 때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 조금 형태는 달라지겠지만 조금 더 일치한다든가 조금 더 발전된 상태가 아닌 전함이었을 거라고 추정이 됩니다.”
고대 선박 전문가인 이원식 박사의 도움으로 당시 신라 선박을 복원해 보기로 했다. 설계도는 이원식 박사가 직접 자료를 통해 고증을 거친 다음 작성했다. 고려 과선을 모델로 한 신라 선은 이렇게 완성됐다. 동해 먼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 배의 앞부분은 보다 날씬한 유선형이었을 것이다. 높은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배 높이도 더 높았을 것이다.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 돛대를 앞 뒤 2개를 세우고 보다 효율적인 항해를 위해 노를 이용했을 것이다.
“옛날에 배 하나의 사람을 많이 안태웠습니다. 고려 때의 원양선을 보게 되면 대개 30명에서 50명 내외를 태우는 것이 중선이고 70명 80명 태운 것이 대선으로 봅니다. 그래서 대략 과선이나 이사부 선박이라고 하면 50정도에서 80명 정도의 선원이 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이사부 장군은 병사와 무기 군량미와 식수 그리고 목우사자를 전선에 나눠싣고 7년의 준비 끝에 우산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항해 중 가장 큰 문제는 예측할 수 없는 바다 날씨다. 울릉도로 가는 뱃길은 지금도 험난하다. 최첨단 인공위성 장비를 이용하는 최신 여객선도 악천후와 뜻하지 않는 기상이변 앞에선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김태정 선장
“저희들도 항해학을 공부하면서 참 경이로운 부분 중의 하나가 옛날 고대에 항해술을 그걸 어떻게 수립을 하고 했는지 그것을 보면 배우는 입장이지만 사실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죠. 근데 그 대신 그만큼 희생이 따랐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그래서 바다에 나갈 때는 전쟁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고대항해는 바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가 동해를 건넌 시기는 6월. 기상 자료에 따르면 1년 중 동해안에서 평균풍속과 파고가 가장 안정적인 때가 바로 이 시기다.
박찬홍 소장 한국해양연구원 동해연구소
“동해 중부 그러니까 동해권에서 울릉도를 갈 때 가장 좋은 적기는 뒷바람을 순풍을 받고 갈 수 있는 4월에서 6월 사이 지금 현재 측정기록에도 있지만 바람이 서풍이고요, 그때 바람이 세지는 않고 적당한 바람에 그런 바람 때문에 파도가 아주 잔잔한 그리고 항해하기에 아주 적합한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그때가 이 지역에서 울릉도 가기에 가장 적합한 그런 시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눈으로 목표지를 확인하면서 운항했다. 울릉도로 가는 길도 육지를 기점으로 가시거리권을 유지하면서 항해했을 것이다.
“이사부가 주로 출발했던 지역이 강릉으로부터 울진사이 이 지역이었을 텐데 이 지역에서부터 항해를 하면서 조금만 나오면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것이죠. 가시거리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게 목선항해가 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조선시대에도 삼척에서 울릉도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서풍이 불 때였다. 빨라도 꼬박 하루가 걸리고 노를 저어 가면 1박 2일이 족히 걸리는 거리가 울릉도였다.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란 뜻에 대풍헌. 이곳은 조선시대 울릉도 독도지역을 순시하던 관리들이 울릉도로 떠나기 전 머물던 곳이다. 순풍이 불기를 기다렸던 이 숙소엔 3년에 한 번씩 울릉도, 독도 수토를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정기적으로 수색대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심현용 학예연구사 울진군청
“왕조실록에 보면 삼척 장호항이라든가 지금 울진의 죽변항, 구산항 3군데가 그 다음에 울진포 지금 왕피천이라고 그러는데요, 3, 4군데에서 출발했던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근데 조선후기 19세기 들어오면서 전부다 여기서 출발을 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 번의 경험에 의해서 해류의 편안함을 여기가 가장 편안하게 울릉도로 출발할 수 있다는 곳을 찾아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산국 정벌을 위해 배를 만들고 출항준비를 한 지역은 어딜까. 성공적인 원정을 위해서는 출발항구의 위치 선정이 가장 중요하다.
윤명철 교수
“국가의 운명을 건 군사작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게 되는데요, 이를 테면 출항시기라든가 그 시기의 자연환경도 매우 중요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대규모의 군선을 출항시킬 경우에는 군선을 건조해야 하는데 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제목을 구할 수 있는 임야가 주변에 있어야 하구요, 말 그대로 배후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대규모의 군선을 만들었을 경우에 군선을 숨겨둘 만한 안정된 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사부 장군의 출항지로 손꼽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는 강릉 안인진 일대다. 괘방산성은 6세기를 전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이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성안에선 신라토기편이 출토됐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천혜의 항구를 끼고 있다. 군선강 하구와 연결돼 편안한 포구란 뜻을 가진 안인진 포구다.
이상수 학예실장
“조선시대 때 수군기지 안인포의 수군기지가 형성돼 있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는데 물론 조선시대 초기에 양양대포용으로 수군기지를 옮깁니다만 그 전에는 안인진에 군선강 하구에 있었느냐 또는 아니면 안인진 쪽에 대포라는 지역이 있었는가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어떤 안인지역 일대에 배를 댈 수 있는 항구, 정박지의 여건을 갖출 수 있는 지역은 군선강 하구지역으로 학계는 추정을 합니다.”
또 다른 출항지로 주목받고 있는 곳은 삼척시 오분동 일대. 예로부터 이 일대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했다.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어민들은 지금도 용황제를 지내고 민간신앙을 중시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정의범 씨(삼척시 오분동 어촌계장)도 마찬가지다. 배가 정박하는 오분항 옆엔 마을 사람들이 모시는 성황목이 있다. 이 나무엔 바다에서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있다. 해마다 이곳에선 3신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용황신과 성황신 그리고 이사부 장군신이다.
“매년 마을 제사를 두 번 치릅니다. 제사상에 제삿밥을 세 그릇을 올립니다. 그 제삿밥 중 하나가 이사부 장군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삼척시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 하구 오분동 뒤쪽엔 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오화리 산성이다. 문헌에 따르면 이 산성은 고려 우왕 때 축조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학술조사 과정에서 그 이전부터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신라시대 토기편들이 곳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오화리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 6세기 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파편이 대량 발견됐다. 오화리 산성은 오분항과 연결돼 천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사부 장군의 출항지로 삼척이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6세기 때의 성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유일하게 오화리 산성밖에 해당이 안됩니다. 그래서 그 자료를 놓고 볼 때 이사부 장군이 실직주의 군주로 왔을 때 역시 수군하고 관련해서 연결시키면 이 오화리 산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실직군주가 되어 선박정비를 하고 수군을 정비한 지 7년. 군함을 만들고 항해하기 가장 좋은 때를 골라 출항에 나선 신라 장군 이사부. 512년 음력 6월. 마침내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함대는 우산국 원정길에 오른다.
지금까지 울릉도에서 발견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청동기시대부터였습니다. 그 후에 우산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우산국, 이 우산국은 동해 한 가운데 자리를 잡은 강력한 해상왕국이었습니다.
동해안에서 울릉도까지의 거리는 130여 킬로미터. 초고속 쾌속선을 이용하면 두 시간 반 만에 닿는 거리다. 매년 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즐겨 찾는 울릉도는 대부분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바위엔 숱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 중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바위가 있다. 투구바위는 이사부에 굴복한 우산국 왕이 벗어 놓은 투구가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우산국을 정벌한 뒤 바다에 던진 나무 사자가 바위로 변했다는 사자바위까지. 1500년 전 우산국의 역사는 전설로 전해진다. 울릉초등학교 교장 손영규 씨는 1885년 울릉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던 증조부가 남긴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구전되던 울릉도 역사를 직접 기록한 책이다. 여기엔 우산국의 마지막 왕에 대한 얘기가 전해진다. 이사부에게 굴복한 우해왕에 대한 전설이다.
울릉초등학교 교장 손영규 씨
“우산국의 제일 마지막 왕이 제가 알기로는 우해왕입니다. 이 왕은 아주 용감하고 그 당시에 살고 있는 우산국 주민들을 위해서 아주 선정을 베풀던 그런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울릉도에도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우해왕은 직접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대마도에서 담판을 지운 후 우해왕은 대마도주의 딸 풍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한다.
“풍미녀가 왕비가 된 이후에 아주 사치를 많이 즐기고 말하자면 요즘 된장녀 같은 아주 심한 사치를 즐겼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정도로...”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 정벌에 나선 시기가 바로 이 때였다. 한 나라를 장악할 수 있는 절묘한 기회였다. 신라에 복속된 후 우산국은 신라의 질서에 편입됐다. 울릉도 사동리에서는 도로 공사 중에 발견된 고분 발굴이 한창이다. 돌로 만든 이 무덤은 울릉도에서 발견된 100여기의 신라식 고분 가운데 하나다. 울릉도에서 발견되는 무덤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이재완 학예연구사 독도박물관
“울릉도에 특징이라고 하는 이 기단부를 평평하게 만든 다음에 그리고 벽체에 활석을 쌓아서 벽면을 만들고 그리고 울릉도에 풍부한 돌을 이용해서 봉분을 만들었다는 구조가 울릉도의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닷가 경사면에 위치한 현포리 고분군. 이곳엔 40여기의 돌로 된 고분들이 밀집해 있다. 산경사면에 기단을 쌓고 돌로 봉분을 만든 남서리 고분군은 현포리와 함께 6~7세기 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들 고분에서 흥미로운 유물들이 발견됐다. 말장신구가 그것이다. 말장신구는 우산국의 기마문화 가능성과 문화수준을 짐작케 한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4조각의 금속파편이다. 정확한 형태를 알 순 없지만 그 주인은 누굴까.
이청규 교수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금동관을 소지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경주중심세력 신라중심세력으로부터의 인정도 받아야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체 내에 그런 수장 층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거나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외부로부터의 인정도 그런 관점으로 볼 수 있지만 거꾸로 안에서 그런 상당한 집단이 성장을 해서 그 우두머리가 위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자체적으로 제작은 못했더라도...”
또 하나 목이 긴 항아리를 비롯해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울릉도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이사부 정벌 이후 울릉도에 신라의 영향력이 계속 되고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다.
“이사부 이후에 결국은 오히려 육지와 울릉도 간에 교류는 더 활발해지고 더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정착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사부의 정벌은 아마 동해의 해상교통의 거점을 신라 측에선 확보하면서 동시에 동해가 해상활동에 중심지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 이후 신라의 대외 관계도 큰 변화가 생긴다. 건국 이후 끊임없이 왜구에 침입을 받았던 신라에 왜구 침입이 줄어든 것이다. 우산국 정벌 후 150년 동안 역사기록에서 왜국의 침입기사도 사라졌다.
손승철 교수 강원대학교 사학과
“다비왕 소지왕 때 약 50년간 왜구가 약 10여 차례 약탈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우산국 복속을 계기로 해서 딱 끊어졌습니다. 그것은 왜구들이 더 이상은 동해바다를 약탈의 대상지역으로 삼을 수 없다하는 것이 이사부의 우산국 점령으로 증명이 됐다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로 우리 역사에 편입된 울릉도, 독도. 동해바다는 이렇게 우리 역사가 됐다.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이 동해상에서 기승을 부리던 왜구 침입이 그 후 150년간이나 뚝 끊어졌다니 이 우산국에 지정학적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지금도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3358개의 섬들 가운데에 울릉도와 독도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섬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산국 정벌과 함께 이사부 장군에 대한 기록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바로 법흥왕 제위 26년간의 일인데요, 그러나 540년 진흥왕의 즉위와 함께 이사부는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지증왕 때 우산국 정벌에 성공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이사부 장군은 법흥왕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역사상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무려 26년 동안의 공백이었다. 그러다가 일곱 살에 왕이 된 진흥왕이 즉위하면서 이사부는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한다. 진흥왕 2년 이사부는 당시 핵심관직이었던 병부령에 임명되면서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된다.
김창석 교수
“군사 분야를 장악하는 관부가 병부인데 그 병부에서 선박, 그 다음에 선박을 이용한 여러 가지 유통경제 부분도 병부에서 장악을 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사부가 당시의 병부령에 재임하고 있었을 때 선박에 관련된 선박운송이랄지 항해랄지 아니면 유통 분야 그런 일에 관여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요, 그리고 그렇게 이사부가 활동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험을 쌓았던 것이 바로 그 전에 그러니까 지증왕 때에 이 실직군주하고 하슬라 군주를 역임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습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사부 장군이 다시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진흥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진흥왕의 어머니였던 지소부인이 태후였는데 태후가 섭정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진흥왕 초반부에 정권을 주도했던 최고의 실력자는 이사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왕정을 보필하던 최고의 신료가 이사부였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본격적인 대외정복활동에 이사부가 나서게 되지요.”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한 접전으로 교란상태에 빠지자, 이사부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두 나라가 공방전을 벌이던 금현성(백제)과 도살성(고구려)을 함락시켰다. 병부령을 맡은 이사부 장군은 본격적으로 신라 대외팽창정책에 전면에 나섰다. 이 무렵 신라는 남한 강변에 위치한 단양에 적성을 쌓았다. 산능성을 따라 있는 성은 고구려를 대적하기 위한 신라의 전진기지였다. 적성은 한강유역진출을 위해 신라가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해서 고구려하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이 대치선을 돌파를 해서 적성지역을 장악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고구려하고 영서지역에서도 맞설 수 있는 그런 거점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적성 안에 세웠던 단양 적성비에는 적성지역을 점령한 후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을 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비문에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바로 이사부 장군이다.
이명식 명예교수 대구대학교
“단양적성비라고 하는 비에 제일 첫머리에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남한강을 점령하는 주체세력이 바로 이사부다라는 것을 단양적성비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흥왕 때 이사부의 역할이 이제 동해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내륙으로 남한강유역을 점령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100여 년 동안의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신라는 백제와 함께 고구려 땅으로 북진해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는 서해 바다로 까지 그 영역을 넓히면서 6세기 한반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남양만 등에서 바로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교통로가 확보가 됐습니다. 이게 신라한테 신라 국력에 굉장한 역할을 했고 또 백제하고 고구려의 국경을 서로 떼어놓는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결과적으로 신라가 후일에 삼국 통일하는 토대를 만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신라의 확장은 곧 가야지역으로 이어진다. 강력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한때 신라를 압박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6세기말 대가야는 더 이상 신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신라는 가야를 압박하면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562년 마침내 진흥왕은 가야토벌을 결정했다. 대가야 정벌에 나선 장군은 바로 이사부. 대가야 정벌은 신라의 세력팽창에 또 하나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창석 교수
“가야가 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은 대외교역인데요, 그 대외교역권을 신라가 장악을 했고 또 하나 중요한 의미는 백제가 신라하고 같이 가야를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백제의 그 입김 그리고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길을 완전히 차단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증왕 대부터 진흥왕 대 이르기까지 무려 70여 넌 동안 신라의 영토 확장에 앞장섰던 신라장군 이사부. 신라가 통일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었다.
윤명철 교수
“우산국 정벌을 성공시킨 다음에는 그 여세와 그런 힘을 바탕으로 해서 신라는 다시 황해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을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신라는 경기만을 장악해서 황해 중부의 항로 해상권을 확보한 다음에 국제질서에 본격적으로 진입을 했고요, 이런 걸 바탕으로 해서 끝내는 나당동맹을 완성시키면서 백제를 쓰러트리고 나중에는 고구려마저 쓰러트리면서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삼국통일의 사업을 달성시키게 된 겁니다.”
나무로 만든 사자를 이용해 울릉도 독도를 우리 역사에 기록한 이사부. 512년 그가 지켜낸 것은 동해바다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김유신 장군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100여 년 전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신라를 한반도의 강자로 만든 것에는 이사부 장군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밖으로는 유능한 장군이자 안으로는 신라의 역사편찬을 건의해서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토록 했던 그는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시킨 신라 장군 이사부. 그는 동해를 우리 바다로 개척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는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1)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 와 이를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명을 매복시켰다. 내물왕 9년 (364년) 삼국사기
2) 삼국사기 열전 이사부전.
3) “왜인(倭人)이 신라 영토내에 가득해 성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신라왕을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 광개토왕릉비
4) 寐錦之衣服 … 賜
5) “지증왕 6년(505년) 봄 2월, 왕이 직접 주군현을 정하고 실직주를 설치했다.” 삼국사기 열전 이사부전
6) 삼국사기 신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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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만행!
일본 정부가 2008년 7월 중학교 사회교과서 ‘신 학습지도 요령 해설서’와 지난해 12월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표기한데 이어 내년 초등학교 5학년 사회교과서 지도에 독도를 일본영해에 포함토록 검정 통과시켰다.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 귀복하다. 우산국은 강주의 정동(正東)에 있는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이름하여 울릉도라 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왕편>中
그러나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 삼국사기에서는 우산국(울릉도와 독도를 칭함)을 이사부 장군이 신라에 복속시켰음을 나타내고 있다. 제작진은 1500년 전, 한반도 동해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추적해본다.
▲ 일본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수록될 일본지도
2. 우산국 정벌을 위한 비장의 무기를 품다! - 한국판 트로이 목마
512년 음력 6월. 이사부 장군이 이끈 신라군이 울릉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우산국은 신라가 쉽게 정벌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인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위력으로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계략을 써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왕편>中
이사부 장군은 전면전이 아닌 나무사자를 이용해 우산국 정벌에 나선다. 불교 유입과 함께 불교의 수호신인 사자를 보게 된 이사부 장군. 군사 전략가로서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생소한 동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위엄이 서려 있는 표정의 여러 마리의 나무 사자를 싣고 우산국을 향하여 출격을 한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왕편>中
신라시대 최초로 사자상을 만든 이사부 장군. 우산국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이사부 장군이 만든 나무사자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3. 동해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해상왕국 우산국!
6세기 신라는 본격적으로 변방에 주를 설치하며 영역을 넓혀 간다. 동해 바다에 우뚝 서 있는 섬나라 우산국은 신라에게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우산국이 어떤 세력과 결합하느냐는 동해 해상권의 지배권을 좌우하는 변수였다. 고구려와 왜가 손을 잡게 되면 신라 입장에서는 두 개의 적대 세력이 서로 연대하여 더 강대한 적대 세력과 마주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바로 중간 거점인 우산국을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 울릉도
4. 신라, 한반도의 강국으로 우뚝 서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 이후 동해안에 더 이상 왜의 신라 침입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 신라는 동해안을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하고,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며 영토를 확장해 간다. 그리고 한강 중부의 항로와 해상권을 확보한 후 국제질서에 진입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나당 동맹을 체결,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려 삼국통일을 달성시킨다.
5. 신라 최고의 명장 이사부!
내물왕 4대손으로 신라 왕족이었으며 훗날 미실의 시아버지가 되는 인물 신라장군 이사부. 그는 505년 지금의 삼척인 실직주 군주가 되어 선박이용 제도를 정비한다. 7년 후 512년 지금의 강릉지역의 하슬라 군주로 옮겨가며 우산국 정벌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5세기 초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신라를 한반도의 강자로 만든 이사부 장군. 그는 밖으로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안으로는 신라의 역사 편찬을 건의해 국사를 편찬하도록 했던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이사부 장군 상상화 ▲성호사설 천지문에 적힌 異師夫(이사부)
참고 사이트 주소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43194_30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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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장군 이사부 꿈 항해 ‘돛을 올려라’
최동열 기자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 보다’
지방시각 담은 심층 취재 / 동해·독도 명명 이유 기술
동해와 독도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운 역사 대장정, 신라장군 김이사부와 동해의 미래에 지방시각을 담은 심층 취재기록을 한권으로 엮은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 보다’가 출간됐다. 지은이 최동열 강원도민일보 편집부국장 겸 삼척본부 취재부장은 “역사를 배운 것은 행운이었다”고 밝히며 책의 첫 장을 연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지은이는 또 “동해안에서 기자라는 직업에 종사한 것은 더 큰 행운이었다”며 지난 2년간의 취재 기록에 대해 애써 겸손해 한다. 동해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동해 역사 교양 입문서란 수사에 걸맞게 지은이의 취재 기록과 작고 량은 동해처럼 방대하다. 우리가 저 바다를 동해라고 불러야 하고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다시 확인시켜주는 이 책은 동해의 격량을 헤친 개척과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명명하고 있다.
역사를 주로 다룬 책이기에 사건을 연대순 편년체로 엮었다.
‘바닷길을 열어야 강자가 된다’는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울릉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 ‘장군 이사부, 섬나라 우산국을 정벌하다’, ‘살육과 약탈의 바다’, ‘바다와 섬은 우리 땅이다. 수색하고, 토벌하라’, ‘동해가 없었다면 교류도 없었다’, ‘바다를 경영해야 미래가 있다’ 등으로 구성했다.
이사부에 대한 지은이의 열정은 바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한다.
‘그저 그런’ 역사 속 인물로 알고 있었던 이사부란 이름은 어느덧 지은이의 수식어가 된지 오래다. 이사부를 사랑한 그의 꿈과 도전이 담긴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 보다’와 함께 과거로의 항해를 떠나보자. 동해안에서 성장한 지은이 최동열은 강원도민일보 영동본부, 삼척·동해 주재기자, 영동본부 취재부장, 경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00년 ‘사후 55년 만에 부활한 민족시인 심연수 발굴보도’와 2006년 ‘대화퇴-일본이 명명한 황금어장’ 보도로 강원기자상 특별상을 받았다. (윤수용 기자 강원도민일보)
사이트 주소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439723
독도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우리땅’
바위 이사부 깨워 독도 다시보다 최동열 지음
독도, 시를 쓰다 한국시인협회 독도지회 지음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최근 2차대전 직후 일본 대장성이 독도를 임시로 점령했던 외국으로 분류해놓은 법령 자료를 공개해 독도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이 사료는 1946년 8월15일 발표된 것으로 전후 일본 기업의 채무 해결을 위해 제정된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을 시행하기 위한 법령으로 일본이 점령했던 영토 중 외국으로 분류한 지역을 규정한 것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다른 나라 영토를 빼앗아 점령해왔음을 시인하는 것인 동시에 반환해야 할 외국 영토임을 공개적으로 고시한 귀중한 사료다. 여기에는 조선과 대만,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를 포함해 죽도(竹島)로 표기된 독도 역시 별개항목으로 외국으로 분류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독도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동해와 독도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운 역사 대장정, 신라장군 김이사부와 동해의 미래에 지방시각을 담은 심층 취재기록을 한권으로 엮은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 보다’와 한국시인협회 독도지회에서 내놓은 ‘독도, 시를 쓰다’가 그 주인공이다.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보다’는 최동열 강원도민일보 편집부국장이 출간한 책으로, 동해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동해 역사 교양 입문서란 수사에 걸맞게 저자의 취재 기록과 작고량이 방대한 것이 특징이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동해안에서 기자라는 직업에 종사한 것은 더 큰 행운이었다”며 지난 2년간의 취재 기록에 대해 애써 겸손해 한다. ‘바닷길을 열어야 강자가 된다’는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울릉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 ‘장군 이사부, 섬나라 우산국을 정벌하다’, ‘살육과 약탈의 바다’, ‘바다와 섬은 우리 땅이다. 수색하고, 토벌하라’, ‘동해가 없었다면 교류도 없었다’, ‘바다를 경영해야 미래가 있다’ 등으로 구성했다. 이 책은 우리가 저 바다를 동해라고 불러야 하고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다시 확인시켜 준다.
이와 함께 ‘독도, 시를 쓰다’는 한국시인협회 독도지회의 시인들이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모은 책이다. 이 시집에는 오탁번 외 22명의 시인들의 시가 수록됐다. 또 독도를 다룬 에세이와 언론기사가 함께 실렸다. 모든 시가 독도를 노래했고 시와 함께 독도와 관련된 사진이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에세이들은 한국시인협회 독도지회가 독도를 탐방하면서 겪은 감회와 소감을 표현한 글로, 독도를 지키고자 하는 저자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철호 기자 광주매일신문)
사이트 주소
http://kjdaily.com/read.php3?aid=1258718909166249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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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 독도를 노래하다>
"화산암 틈에 낳은
바다제비 알에서도
물녘에 핀 괭이밥에서도
단군 할아버지가
흰 나룻 쓰다듬으며
"독도야 독도야" 맨 막내손자 부르고 있네"
(오탁번 '독도는 독도다')
한국시인협회와 독도지회 시인들이 문학으로 국토 사랑을 실천한다는 취지로 올 9월 독도와 울릉도를 찾아 노래했던 시들을 모은 시집 '독도, 시를 쓰다'(황금알 펴냄)가 출간됐다.
시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국토의 막내'로 보는가 하면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하고 나라를 싣고 날아오르는 큰 새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눈부신 섬 울릉도는 새의 다른 이름
저 광활한 우주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자세로
지금 막 동해바다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눈이 아주 큰 대한민국의 새"
(정성수 '저 눈부신 울릉도')
시인들은 또 섬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고 거친 풍파에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대견함을 시에 담았다. 섬을 넉넉한 품을 가진 모성의 근원으로 그린 시도 있으며, 평화롭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로 노래한 시들도 있다.
"잠들지 못하는 샛별처럼
밤하늘 반짝이며 천군만마
성을 쌓는 굳센 모습
아름다운 평화의 섬
너 독도여, 푸른 넋이여"
(김태호 '거기 있었네')
"아득한 어머니의 어머니, 또 아득하고 먼 어머니의
손끝이고 발끝이고 머릿결 끝이고 온몸 끝이고
눈길 끝이라는 것을,
독도의 작은 돌 하나 질경이 한 포기라도 어머니의 뼈와 살이라는 것을"
(김영탁 '몸의 독도')
(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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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11/09/0200000000AKR20091109186300005.HTML?did=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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