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박성진추천 0조회 8312.06.18 15:3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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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자료정리 성과ㆍ현황ㆍ과제 이 광 우 (영남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1. 소수서원의 연혁 개략 紹修書院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安珦․安軸․安輔․周世鵬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로 국왕이 이름을 지어 내린 賜額書院이다. 소수서원이 건립되던 시기는 官學이었던 鄕校가 교육기관으로서의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향교의 기능을 보완하고자 지역의 재지사족들에 의해 대체 교육기관이 건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서원이었으며, 소수서원은 이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것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에 의해 처음으로 慶尙道 順興(훗날 단종복위운동으로 풍기군에 병합)에 건립되었다. 원래 소수서원이 건립된 위치는 그 이전까지 宿水寺라는 사찰로 안향이 어린 시절 공부하던 곳이었다. 당시 주세붕은 고려말 성리학을 보급했고 평소에 흠모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건립하여 했다. 이에 1542년(중종 37) 숙수사 자리에 그의 영정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晦軒祠堂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사당 동쪽에 學舍를 지어 서원의 골격을 갖춘 다음, 안향의 영정을 서원의 사당에 봉안하고 최초의 서원인 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소수서원이 명실상부한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고,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된 데에는 퇴계 이황의 역할이 매우 컸다. 퇴계는 일찍이 서원을 향촌교화와 인재 육성을 위해 가장 적합한 기관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1548년(명종 3)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그 이듬해인 1549년(명종 4) 경상도관찰사 沈通源에게 소수서원이 사림의 교육과 풍속의 교화에 효과가 크기 때문에 사액이 필요함을 청원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백운동서원은 지금의 소수서원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조정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퇴계의 노력은 사액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실천 도장으로 운영하기 위해 각종 제도들을 마련해 나갔다. 그는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보이는 受學, 居齋, 교수실천요강, 독서법 등을 규정한 院規를 만들어 훗날 세워지는 다른 서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즉 퇴계가 소수서원에서 마련하였던 각종 시스템은 우리나라 서원의 기분 운영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최초 소수서원 창건 시 배향자는 안향뿐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배향자는 추가되었다. 먼저 1544년(중종 39)에는 순흥 출신으로 안향의 후손인 안축과 안보를 배향하였다. 이들은 각각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 대의 유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어 1633년(인조 11)에는 소수서원을 창건한 공로를 인정받아 주세붕이 마지막으로 배향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라는 위상은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興宣大院君 집권 시 있었던 서원철폐령(1864~1871) 때에도 소수서원은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남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소수서원에는 조선시대 때 건립된 여러 건물과 각종 자료들이 보존될 수 되었으며, 1963년에는 그 일대가 사적 제55호로 지정 되었다. 한편, 소수서원의 공식 명칭은 2011년 11월부로 ‘영주 소수서원’으로 변경된 상태이다. 2. 소장 자료의 전래와 현황 1)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었던 만큼 서원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다른 영남 지역의 유력한 서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자료가 소장되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상당수의 자료들이 유실된 상태이다. 그러한 까닭에 소수서원 관련 자료의 경우 원소장처가 아니라 여러 기관에 분산 보존되어 있는 것들이 많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러한 분산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과 파악이 일차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2) 소수서원은 건립과 사액부터 조정과 지역의 사림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이에 따라 비교적 후기의 그 어떤 서원보다 교육적 기능을 성실히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와중에 많은 서적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수집되거나 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액 이전 白雲洞書院 시절의 소장 전적 자료는 서원 창건 이듬해인 1544년(중종 39) 간행된 『竹溪誌』에 그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竹溪誌』의 「白雲洞書院藏書錄」에는 43종 525책의 책자가 소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리학 경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향촌사회에 성리학이 한창 보급되던 시기의 도서 소장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목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서 목록이다. 1550년(명종 5) 사액된 소수서원은 국가적인 정책에 따라 나라에서 印出된 서적 중 일부를 頒賜 받을 수 있었다. 사액 이후 서적의 증가는 1602년(선조 35)에 작성된 『紹修書院書冊置簿』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 책자는 107종 1,678책을 수록하고 있으며, 소장 서적을 ‘內賜’와 ‘道上院備’로 나누고 있다. 전자는 사액 후 국가로부터 頒賜 받은 것이고, 후자는 도에서 기증된 서적이다. 당시 내사본 중에서는 『續綱目』『朱子大全』『精忠錄』『朱子語類』『四書諺解』 등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조선후기의 소수서원 소장 서적 현황은 서원에서 간행된 여러 종의 書目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1653년(효종 4)의 『院中書冊置簿』에는 122종 및 追錄 21종, 1698년(숙종 24)부터 1761년(영조 37)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書冊目錄」에는 서적 168종과 책판 7종 및 추록 27종, 1796년(정조 20)의 『兵陣八月三十日修整紹修書院冊都錄』에는 서적 129종과 책판 6종이 수록되었고, 1891년(고종 28)까지 서적 16종이 증가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소수서원은 많은 서적들을 수집할 수 있었는데, 서원 측에서는 藏書 每冊 表紙裏面에 “來讀院中 勿出院門”이라 墨書하였으며, 傳掌記 등을 작성하여 그 보관과 인수인계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1917년에 작성된 『丁巳九月日現存書冊目錄』에는 129종과 책판 6종이 수록되어 있으며, 1951년(단기 4284)에 작성된 『辛卯五月十六日書冊引受現存目錄』에는 94종 574책만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969년 國會圖書館에서 간행한 『李朝書院文庫目錄』에 따르면 상당수의 서적이 落帙本으로 141종 563책이 조사되었음이 나타난다. 그 중 반 이상이 문집류이고 나머지는 경서 및 역사서로 완질본은 거의 없다.(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國會圖書館, 1969) 그런데 여기에는 1966년 石板으로 간행된 『辨整錄』도 수록되어 있으므로 1951년 이후에도 지속적인 서적 증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창기 이후 지속적으로 서적이 누적되고 있었으나, 유실과 반출로 인한 미회수의 증가로 20세기 이후에는 망실서적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특히 『紹修書院書冊置簿』에 수록된 서적은 단 32종 243책만 수록되어 있어 약 85%를 분실한 것으로 확인된다. 더구나 임진왜란 전 내사본은 21종 663책이었는데 이춘희가 조사한 1969년에는 4종 123책만 남아 있었다. 1891년까지 197종이 수장되어 있었고, 이후에도 약간의 증가분이 있었을 것인데, 없어진 서책이 많으니 소수서원의 망실 규모는 상당했던 것이다. 『紹修書院書冊置簿』에 수록된 분실본과 수장본의 비율로 전체 분실 서적수를 추측한다면 대략 2,600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이춘희, 『朝鮮朝의 敎育文庫에 관한 硏究』, 景仁文化社, 1984) 훼철 되지 않은 사액서원임을 감안한다면 유출 규모가 많은 편이다. 이러한 결과는 20세기 이후 서적의 관리가 철저하지 못해 유출이 심하였고, 유출본에 대한 회수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막심하였던 것이 수량 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적의 유실에 대한 적절한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7년 南權熙의 조사에 따르면 모두 30종 145책만 수장되어 있음이 보고되어 관리가 매우 부실했음을 알 수 있다.(南權熙, 『紹修書院 所藏 古書 및 古文書 解題(소수서원 소장자료 조사보고서3)』, 紹修書院, 1998) 현재는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등에 남아 있는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다. 3)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책판이 이곳에서 제작되어 많은 서적들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소수서원의 책판 제작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攷事撮要』가 있다. 이 책자는 조선 최초의 책판 목록으로 임진왜란 이전 출판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에는 『竹溪誌』가 수록되어 있는데, 풍기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六先生遺稿』도 소수서원에서 간행한 것이지만 1730년(영조 6) 편찬 『慶尙道冊板』과 1740년(영조 16) 편찬 『冊板置簿冊』, 1760년 편찬 『嶺湖列邑所在冊板目錄』에는 순흥판으로만 기재되어 있어 책판이 소재한 고을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한편, 1762년(영조 38)에 편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紹修書院冊錄』의 권말에는 수량을 밝히지 않은 책판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竹溪誌』『六先生遺稿』『追遠錄』『文成公神道碑』『洪荷衣草書』『岳武穆筆籍』『鳶飛魚躍』『學求聖賢』이 있다고 하였고, 『漁溪集』과 『朱書刊補』는 沙州에 있어서 찾아오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79년에 간행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韓國冊板目錄總覽』에는 『竹溪誌』『家禮諺解』『追遠錄』 등이 서원 소재지인 순흥 수장이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지금 그 일부가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수서원에서 제작한 책판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책판들 중 남아 있는 것은 소수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보관 중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1호로 지정되어 있다. 4) 소수서원이 소장했던 고문서와 각종 성책류는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가진 것이 많다. 그런 면에서 많은 고문서와 성책류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가 않다. 다른 서적자료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이후 관리 소홀과 6.25 전쟁 등으로 유실된 것이 많다. 다만 서적과는 달리 고문서와 성책류의 경우 작성지가 뚜렷한 관계로 유출된 것 중 일부는 소장 위치가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유출된 것으로 여겨지는 상당수의 소수서원 고문서 및 성책류와 소수서원의 사료관에 전시 또는 보관되어 있던 고문서 및 성책류는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자료가 집적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경로로 인근 문중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한편, 2007년 간행한 『紹修書院誌』에는 소수서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고문서와 성책류를 조사하여 수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소수서원의 것이나 타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 소수서원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것, 소수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분류해 놓았다. 소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기탁한 기관이나 문중도 명기하였다.(嶺南文獻硏究所, 『紹修書院誌』, 소수서원, 2007)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자료조사 현황과 기타 기록자료 1) 소수서원 소장 자료는 20세기 이후 적지 않게 유출되었다. 관리 소홀로 인하여 많은 서적과 고문서, 성책류가 유출된 것이다. 이 중 고문서와 성책류의 경우 자료의 특성상 내용 분석을 통해 작성처가 소수서원인 것을 알 수가 있기에, 이에 대한 활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일반 서적은 유출 이후 원소장처를 규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괄 정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2) 소수서원이 과거 소장했었던 서적의 규모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간행되었던 『竹溪誌』(1544)를 비롯한 각종 書目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이 書目은 현재 성책류로 소수박물관 등지에 보존되어 있어 과거 서적의 규모를 확인 할 수가 있는데, 지금과 비교한다면 그 유실 상태가 매우 심각한 편이다. 20세기 이후 간헐적으로 書目이 작성되었으나 본격적인 소장 전적에 대한 조사는 1969년 李春熙에 의해 이루어졌다.(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國會圖書館, 1969) 이 조사에서는 모두 141종 563책이 조사되었음이 나타나나 거의 대부분이 落帙本이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鑄字本으로 『朱子大全』 등 乙亥字本 5종 128책, 甲辰字本 『儷語編類』 15책, 丙子字本인 『朱子語類』 27책, 그 밖에 戊申字本 2종 2책, 丁酉字本 1종 1책 등 모두 10종 173책이 전한다. 그 중 반 이상이 문집류이고 나머지는 경서 및 역사서로 완질본은 거의 없다. 임진왜란 이전의 내사본은 21종 663책으로 확인되지만 1969년 당시 남아 있는 것은 4종 123책에 불과하다. 1602년의 『紹修書院書冊置簿』와 비교한다면 모두 82%의 책자가 분실되었음이 확인된다. 당시 조사된 자료 중 약 200여 책이 임란전 판본이며, 그 중 『朝鮮賦』(癸丑字覆刻本)가 유일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사료라 할 수 있는 『紹修書院謄錄』이 전해지며, 그 밖에 서원 경영과 관련된 『田畓案』『傳掌記』『書冊目錄』 등의 필사본을 보유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소수서원 고서와 고문서, 책판 등에 대한 조사 목록은 1997년에 간행된 紹修書院 所藏 古書 및 古文書 解題(소수서원 소장자료 조사보고서3)』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사이에 많은 자료 유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특히 서적의 경우 모두 30종 145책만 수장되어 있음이 보고되었다.(南權熙, 『紹修書院 所藏 古書 및 古文書 解題(소수서원 소장자료 조사보고서3)』, 紹修書院, 1998) 한편, 소수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책판에 대한 변천 사항은 2005년에 발표된 裵賢淑의 논문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는 소수서원 문고의 성립과 변천, 대출․점검․서목 편찬 등의 관리 실태, 소수서원 간행의 서적과 책판 현황, 藏書의 특성 등이 설명되어 있다.(裵賢淑, 「紹修書院 收藏과 刊行 書籍考」『書誌學硏究』31, 2005) 3) 소수서원에 소장된 고문서와 성책류로 외부로 유출된 자료 가운데 중요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가장 먼저 간행된 것은 소수서원 운영 전반에 관한 기록을 엮어 놓은 『紹修書院騰錄』이다. 이 책은 서원 연구에 있어 그 자료적 가치가 주목되어 1937년 朝鮮史編修會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하여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한편, 소수서원이 위치한 영주시에서도 소수서원 관련 주요 성책류에 대한 국역 및 간행을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2005년 『國譯 紹修書院雜錄』이 간행되었다.(榮州市, 『國譯 紹修書院雜錄』, 2005) 여기에는 당시까지 소수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雲院雜錄』『雜錄』『講所雜錄』 등 3종의 잡록을 엮어 놓았다. 이 자료들은 조선시대 소수서원의 대소사를 엮어 기록해 놓은 것으로 영인본과 국역본을 함께 수록하였다. 4)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소수서원 소장 주요 성책류에 대한 영인본 간행작업을 실시하였다.(李樹健 外,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 國史編纂委員會, 1999) 이 책에는 소수서원과 관련된 고문서 및 성책류에 대한 간단한 해제와 더불어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소수서원 자료로는 『紹修書院院錄謄本』『雜錄』(院中完議)『紹修書院講所雜錄』『癸酉正月廟宇重修記事』『紹修書院田畓案』(1767)『退溪笏記』『愼齋笏記』가 있다. 5) 책판과 현판에 대해서는 소수박물관에서 간행한 『소수박물관의 목판과 현판』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의 목판과 현판』, 2009) 이 책에는 현재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판과 현판을 모두 소개한 것이다. 소수서원에서 보관되어 오던 책판과 현판이 소수박물관에 기탁된 관계로 이 자료집을 통해 현황을 확인 할 수 있다. 6) 소수서원과 관련된 연구는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라는 역사적 의미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다. 관련 자료에 대한 소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朝鮮史編修會가 1937년 간행한 『紹修書院謄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료의 유출이 비교적 심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자료 보관이 잘 되어 있는 다른 주요 서원의 경우 자료 반출의 어려움 때문에 자료 소개와 연구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이에 반해 소수서원의 자료는 20세기 이후 유출된 것이 많았으며, 주요 자료 가운데서는 국사편찬위원회나 대학 도서관에서 입수한 것도 적지 않아 상대적으로 연구자들의 접근이 용이하였다. 지금까지 출간된 연구 논문과 서적, 보고서, 자료집 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史編修會, 『紹修書院謄錄』, 1937 •尹武炳, 「紹修書院 講堂 上樑記」『考古美術』9 제2권 4호, 考古美術同人會, 1961. •李春熙, 『李朝書院文庫目錄』, 國會圖書館, 1969. •정순목, 『한국 서원교육제도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 •渡部學, 「16世紀 朝鮮朝 書院의 3類型-書院의 動態的 硏究를 위한 一試論-」『第1回 韓國學 國際學術會議 論文集』,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이수환,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 소수(紹修)․옥산(玉山)․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2․3,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鄭椙元, 「紹修書院의 復原에 대한 硏究 : 講堂을 中心으로」, 영남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尹熙勉, 「紹修書院 罷格論爭」『李基百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下,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 편, 一潮閣, 1994. •南權熙, 『紹修書院 所藏 古書 및 古文書 解題(소수서원 소장자료조사보고서3)』, 紹修書院, 1998 •張極奉, 「紹修書院의 敎育史的 意味에 관한 硏究」,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李樹健 外,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 國史編纂委員會, 1999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서원 한국사상의 숨결을 찾아서』, 예문서원, 2000. •榮州市, 『紹修書院 講學堂 및 文成公廟 實測調査報告書』, 2003. •尹熙勉, 「조선후기 소수서원의 교육 사례」『歷史敎育』92, 歷史敎育硏究會, 2004. •윤희면,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집문당, 2004. •裵賢淑, 「紹修書院 收藏과 刊行 書籍考」『書誌學硏究』31, 2005 •榮州市, 『國譯 紹修書院雜錄』, 2005 •장영훈, 『조선시대의 명문사학 서원을 가다』, 담디, 2005. •송정숙, 「「紹修書院 入院錄」분석-16·17세기를 중심으로-」『書誌學硏究』34, 書誌學會, 2006. •이호일, 『조선의 서원 - 살아 있는 역사의 거울, 조선의 서원을 찾아서 』, 가람기획, 2006. •노대환, 「雜錄을 통해 본 소수서원 -『雲院雜錄』·『雜錄』·『講所雜錄』」『조선시대 문화사 (하) - 시대정신과 인간의 대응』, 일지사, 2007. •송정숙, 「『紹修書院 任事錄』연구-16·17세기를 중심으로-」『書誌學硏究』38, 書誌學會, 2007. •嶺南文獻硏究所 編, 『紹修書院誌』, 紹修書院, 2007. •전재강, 『선비문학과 소수서원』, 박이정, 2008.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의 목판과 현판』, 2009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 소장유물도록』, 2009. •權五貞, 「紹修書院 景濂亭詩 硏究」,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원향사』, 2011. 7) 소수서원과 관련하여 발간된 자료집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2007년 嶺南文獻硏究所 編의 『紹修書院誌』이다. 이 책자에는 소수서원의 연혁과 건립 및 사액과정과 배향자의 이력, 서원이 소장하고 있거나 다른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수서원 관련 고문서 및 성책류와 고서 등의 목록을 수록하고 있다. 그 외 소수서원과 관련하여 작성되었던 각종 문자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의 문집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간된 소수서원 관련 자료집 가운데 가장 방대한 양의 자료와 자료 목록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4. 전승 자료의 내용과 특성 ○ 고서 현황 20세기 이전까지 소수서원은 막대한 양의 서적을 보유했던 것으로 확인되나, 이후 관리의 소홀과 6.25 전쟁을 겪는 동안 상당수 유실되었다. 1969년 조사에서는 141종 563책이 보고되었는데 대부분이 낙질본이었으며, 1997년 조사에는 30종 145책만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69년 이춘희의 조사에서 內賜本과 주목할 만한 活字本을 나열하였으나, 그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한편, 2007년도에 나온 『紹修書院誌』에는 주요 고서로 91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1969년 조사 때 주목할 만한 고서로 지목된 것 가운데, 현재 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귀중본 •『周易傳義大全』 胡廣(明)等撰. 木板 11책(零本). 주기 : 內賜紹修書院, 來讀院中. •『朱子大全』 朱熹(宋)箸. 古活字 33책(零本 1책 파손). 주기 : 來讀院中 勿出院門. •『儷語編類』 趙仁奎(明)箸. 古活字 1책(零本). 주기 : 白雲洞書院相, 來讀院中 勿出院門. •『闡義昭鑑』 英祖(朝鮮)命編. 古活字 1책(零本, 전후 파손). ○ 고문서 현황 소수서원이 소장하였던 고문서와 성책류에 대해서는 2007년에 간행된 『紹修書院誌』에 그 목록이 소장처 별로 정리되어 있다.(嶺南文獻硏究所 編, 『紹修書院誌』, 紹修書院, 2007.) 이를 종류별로 분류하여 그 수를 파악하면 전답문서 4점, 노비문서 1점, 관문 2점, 도서목록 7점, 일기․사적 3점, 입의․회계․운영 문서 15점, 입원․거재․강회 문서 14점, 원임․집사․회원 명부 21점, 잡록 11점, 서원 방문 기록 32점 등 모두 110점이다. 이 중 주요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紹修書院謄錄 :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는 필사본 자료. 서원 운영 내용을 월·일별로 나누어 1546년부터 1670년까지의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그중 주로 1546․1547년의 기록이 집중. •雲院雜錄 :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는 자료로. 원본이 있으며, 이를 복사한 사본도 전해지고 있다. 원본은 훼손 또는 낙장이 심하다. 사본은 1658년 이후 일괄 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초기부터 1600년도 초기까지 서원에서 생성된 기록물과 기사를 망라해 놓은 것이다. •院任題名錄 :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는 자료로 1542년부터 1718년까지 소수서원 원장 등 각 직책을 맡았던 院任들의 인사기록을 엮어 놓았다. •紹修書院任事錄(9책) :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는 것으로 1542~1718년, 1708~1794년, 1794~1897년, 1898~1914년, 1916~1931년, 癸酉三月日, 甲申三月日, 1969~?, 丙子八月日의 소수서원 역대 원장 등을 기재해 놓았다. 조선조 서원 원장의 성격을 파악 할 수 있는 자료이다. •入院錄 : 4책이 전해지고 있는데, 1543~1696년의 것은 도산서원의 고문서로 소장되다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됨. 나머지 3책은 1660~1691년, 1721~1760년, 1725~1846년의 것으로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16~19세기 소수서원 원생의 인적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尋院錄(32책) : 모두 소수박물관 기탁됨. 16세기-20세기 후반의 소수서원 방문인사들의 명단. •紹修書院田畓案 : 소수박물관에 기탁된 1766년의 자료이다. 설립초기부터 1738년까지 전답의 증가현상을 기록한 것으로, 18세기 말 書院田의 확대 상황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雜錄(9책) : ‘紹修書院雜錄’ 또는 ‘雜錄’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1626~1678년, 1667~1720년, 1712~1718년(이상 3책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720~1759년, 1759~1832년(이상 2책은 소수박물관 기탁), 1794~1795년, 1799~1900년(이상 2책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것이 있으며 나머지 2책은 19세기 및 20세기 초반의 기록으로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소수서원과 관련된 고문서 및 고문서 형태의 각종 글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紹修書院講所雜錄 : 소수박물관 기탁 자료로 1826~1828년까지 이루어진 소수서원의 강학 내용을 엮어 놓은 것이다. •居齋錄 :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1780~1793년까지 소수서원의 교육활동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居齋雜錄 :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1761~1780년까지 소수서원의 교육활동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紹修書院院錄謄本 : 도산서원 고문서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 서원 운영과 관련된 각종 잡문서, 서원 입원 규정 등이 수록되어 있다. ○ 책판 현황 소수서원에서 제작되었던 책판의 경우 현재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모두 4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4종 모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31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에 조사된 『도지정 동산문화재(전적류)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竹溪誌』 117장, 『追遠錄』 302장, 『六先生遺稿』 5장, 『家禮諺解』 4장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 『도지정 동산문화재(전적류) 실태조사 보고서』, 2011) ○ 현판 현황 소수서원의 현판들도 책판과 함께 현재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먼저 건물관련 편액으로는 ‘白雲洞’, ‘文成公廟’, ‘日新齋’, ‘直方齋’, ‘學求齋’, ‘至樂齋’, ‘景濂亭’(1), ‘景濂亭’(2), ‘鳳棲樓’, ‘迎鳳樓’, ‘文宣王影幀室’, ‘儒道敎育館’, ‘遺物館’ 등 13점이 있으며, 名言․名句 관련 편액으로는 ‘學求聖賢’(1), ‘學求聖賢’(2), ‘學求聖賢’(3), ‘鳶飛魚躍’(1), ‘鳶飛魚躍’(2), ‘鼎山幽居’, ‘仁者無敵’, ‘雙坪’, ‘承家輔國’ 등 9점이 있다. 그 외 記文에 해당되는 것은 ‘白雲洞紹修書院記’, ‘白雲洞安文成公祠堂記’, ‘鳳棲樓重營記’(1), ‘鳳棲樓重營記’(2), ‘紹修書院童蒙齋重建記’, ‘紹修廟宇重修記’ 등 6점이 있으며, ‘白雲書院榜’, ‘學規’, ‘白雲洞書院令’ 등 公用文 3점과 ‘文成公享祀執事’도 보관되어 있다. ○ 소수서원 소장 자료의 가치 -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었던 만큼 그 운영에 있어서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소수서원 운영과 관련된 자료들의 내용은 우리나라 서원 운영에 있어 기본적인 방향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유실이 심해 인근 주요 서원보다 자료는 적지만, 소장 자료의 의미와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소수서원 소장 자료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책류이다. 소수서원의 역사적 의미와 맞물려 서원 연구에 있어 이 자료들의 활용도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紹修書院謄錄』을 비롯해 각종 雜錄은 서원 운영과 관련하여 작성된 여러 문서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서원이 건립되고 사액되기까지의 운영 양상, 서원 운영의 기본 규정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 규정은 소수서원뿐만 아니라 인근 다른 지역의 서원 운영 규정을 제정하는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것들이기에 특히 주목할 만하다. - 서원의 일차적인 운영 목적이 교육에 있음에도, 교육과 관련된 자료는 다른 서원에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소수서원에서 작성된 『入院錄』과 『居齋錄』 등의 성책류는 실재 서원에서 원생들을 선발하는 방법, 교육과 관련된 각종 운영 규정을 파악하는데 가치 있는 자료가 된다. - 소수서원도 출판의 기능을 소화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책판은 4종 밖에 없으나 그 중에서는 희소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竹溪誌』 책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지 책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추원록』 책판은 현재까지의 고서목록들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그 印本이 없는 판목인 만큼 그 중요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5. 향후 활용의 과제 이상으로 소수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성격과 가치 등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으로 의미 있는 자료가 많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리의 소홀로 20세기 이후에는 적지 않은 자료가 유실된 상태이다. 비록 그 중에서도 유출 된 자료가 일찍 공개되어 자료를 활용한 의미 있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분산된 자료의 종합과 발굴은 지속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1) 자료의 발굴 소수서원이 소장하고 있었던 자료는 대부분 소수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어 어느 정도의 집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국학진흥원, 계명대학교 동산박물관 등에 소장된 자료에 대해서는 빠른 시기에 소개가 되었고, 그 중 일부는 간행되어 연구자와 대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외부로 유출된 자료의 규모나 소장처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고서의 경우 유출된 것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하나, 작성처를 알 수 있는 고문서와 성책류 등에 대해서는 자료의 발굴과 소장처 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紹修書院誌』(2007)가 고문서와 성책류를 현 소장처 별로 명기하고 목록화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2) 연구사업과 정기적인 학술대회 개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큰 역사적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교육사적 의미도 매우 크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성격이 반영된 학술세미나와 정기적인 학술회의 등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서원을 건립한 본연의 정신을 밝히고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3) 아카이브 구축과 자료의 DB화 관리 소홀로 인한 자료의 유실로 소수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고문서와 성책류 등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남아 있는 자료들이 비록 몇몇 기관에 분산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현재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 기관들과의 협조를 통해 현재 소개된 자료들에 대한 DB화를 이루고 이를 여러 연구자와 대중들이 활용할 수 있게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4)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며, 조선시대 유교교육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징성을 높이 이용한 각종 프로그램의 개발이 요구된다. 소수서원의 경우 인근에 선비촌이 조성되어 있어 이와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에 매우 용이한 편이다. 프로그램의 대략적인 추진 방안은 다음과 같다. •전통 교육의 체험 : 예절 교실, 한문 교육, 전통 의례 교육 등 •전통 문화의 경연장 : 서예 대회, 전통 놀이 대회의 개최 등 •기타 전통 문화의 체험장 : 다도, 과거시험 재현, 국궁, 농악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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