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52] 문수면 조제2리 금영골 [탐방일:2019.6.7]
금영(今寧)이란 욕심을 버리면 편안해 진다는 뜻
성황제·화전놀이 통해 마을의 화합과 결속 다져
금영동 양지마 전경
문수면 금영골 가는 길
금영골은 연화산(蓮花山) 줄기가 남쪽으로 달리다가 내성천 가까이에 이르러 불끈 솟은 남박산(南璞山,250m) 남쪽 자락에 자리 잡았다.
휴천동 남산육교사거리에서 문수방향으로 간다. 노벨리스코리아에서 좌회전하여 월호교-와현-전닷-화방마을 앞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금영골·예천 보문으로 가는 금영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보문방향으로 700m가량 올라가면 도로 우측에 금영동 표석이 나타난다.
지난 7일 금영골에 갔다. 이날 금영동노인회관에서 김영필 노인회장, 손승록 전 노인회장, 임복순 할머니, 장태순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금영골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동샘
역사 속의 금영골
영주는 삼국 때는 내이군(奈已郡)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때 내령군(奈靈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부르다가 조선조 태종13년(1413)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금영골 지역은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으로 정비할 때 영천군 진혈리(辰穴里) 조제방(助梯坊)에 속했다가 175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될 때 진혈면 조제리(助梯里)에 속했다.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辰穴面) 조제동(助梯洞)에 편입됐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순흥군, 풍기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면서 영주군 문수면 조제2리에 속했다가 1980년 영풍군 문수면 조제2리, 1995년 영주시 문수면 조제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연지(今淵池)
음지마 전경
지명유래
1984년에 발간된 경북도지명유래 총람에 「금영골의 본명은 이곳에 못(池)이 있다하여 이제 금(今)자에 못 연(淵)자를 써 금연골(今淵谷)이라 불렀다. 세월이 흐른 후 이 마을 선비들이 모여 ‘못 연(淵)자가 마음에 걸린다’하여 ‘예전에 이곳에 있었다는 금영사(今寧寺)라는 절에서 유래하여 금영골(今寧谷)로 개칭했다. 金圭煥 제공」고 기록했다. 금영골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한 고승이 부처님을 편안히 모실 좋은 절터를 찾기 위해 학가산(鶴駕山,870m)에 올랐다. 동서남북을 둘러보던 중 북쪽 연화산 방향 그리 멀지않은 곳에 서광(瑞光)이 비치는 곳을 발견하고 다음 날 이곳을 찾았다.
고승은 나지막한 야산(남박산) 아래 명당 터가 있어 이곳에 절을 지었다. 고승은 “澹泊明志 寧靜致遠(담박명지 영정치원)이라”며 “욕심 없는 맑은 마음으로 뜻을 밝히고, 편안하고 정숙한 자세를 가지면 원대한 포부가 이루어질지니라”고 하면서 영정치원의 중심 뜻인 편안할 영(寧)자를 따 절 이름을 금영사(今寧寺)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 손승록(89) 어르신은 “금영(今寧)이란 욕심을 버리면 편안해 진다는 뜻”이라며 “금영마을은 선대 때부터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알뜰함으로써 덕(德)을 쌓아 왔으며, 하늘의 뜻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면서 욕심 없이 사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마을 뒤 동수나무에서 북서쪽으로 300여m 올라가면 주변에서 제일 높은 남박산(南璞山)이 있다. 연화산 남쪽에 옥돌(수정水晶)이 나는 산이라 하여 남박산이라 부른다.
동수나무(洞樹木)
마을의 형성과 번성
마을 뒷산에 수령 4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동수나무(느티나무)가 있다.
아마도 이 마을 입향조가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경북도지명유래 책에 보면 「1700년경 예천 임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기록했다. 김영필 노인회장은 “예천임씨 후손들이 지금은 한 집도 없어 내력을 알 수 없다”며 “제가 알기로는 김해김씨, 진성이씨, 평해손씨, 경주김씨가 세거해 왔다”고 말했다.
김석주(경주인) 전 이장은 “저의 선대는 학가산 아래 감나무골에 살다가 조부님께서 이곳으로 이거하셨으니 10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며 “제가 어릴 적에는 40여 호에 300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독자적 문화 형성
금영동은 지리적으로 이웃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다. 최근 포장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외부와의 왕래가 쉽지 않은 오지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금영마을은 독특한 민속과 미풍을 이어오면서 마을의 화합과 결속을 다져왔다.
김영필 노인회장은 뒷산 언덕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동수나무 옆 성황당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지냈다”며 “정초에 헌관이나 집사로 선정되면 합방을 금하고 매일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면서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해야 했다. 제물은 고기류, 어류, 백설기와 주과포를 진설했다. 이튿날은 마을 사람들이 도가(都家) 마당에 모여 음복을 먹고, 멍석을 깔고 윷을 놀았다”고 했다.
마을의 좌상인 고점순(91) 할머니는 “예전에는 모든 게 풍족하지 못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곡식을 모아 행사를 치르곤 했다”며 “정월달은 보름날까지 세배하고 윷놀고 하다가 보름이 지나면 농사일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화전놀이터(앞산)
화전놀이의 추억
화전놀이(花煎─)는 ‘봄에 경치 좋은 곳에서 꽃잎을 따 전(煎)을 부쳐 먹으면서 노는 부녀자의 놀이’다. 장태순(84) 할머니는 “지금은 한 해에도 여러 번 관광을 가지만 예전에 부녀자들은 1년에 단 하루 노는 날이 화전놀이였다”며 “당시 멀리도 못가고 앞산등성이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는데 부녀자들끼리만 놀면서 애환을 노래로 풀었다”고 말했다.
화전놀이 추억이 많다는 장춘월(75)씨는 “화전놀이 가는 날이면 전날부터 맘이 설레었고 모두 예쁘게 단장을 하고 갔다”면서 “먹을 것이 넉넉지 않을 때라 전과 국수를 먹었던 것 같다. 그 때 글을 아는 부인들은 화전가를 읊기도 했으나 대부분 유행가를 부르며 놀았다”고 말했다.
청빈한 선비가 살던 집
추억의 학교길
기자가 뒷산 언덕에 있는 성황당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청빈한 선비가 살던 집 같아 들어가 봤다. 그 집 마당에서 주인인 임복순(85) 할머니와 딸 김순남(52)씨를 만났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문수남부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순남씨는 “어머니가 계셔서 고향집에 자주 온다”면서 학교길 추억을 들려줬다. 순남씨는 “당시 마을에 학생이 4-50명은 됐던 것 같다”며 “여러 패로 나눠 한 줄로 쭉 서서 가기도 했는데 앞서 가던 친구가 뒤쳐져오는 친구의 욕을 길바닥에 써 놓았다가 싸우기도 했던 추억이 있다. 또 송충이 잡던 일, 찔레 꺾어 먹던 일, 어느 비오는 날은 세거리 쪽이 물에 잠겨 화방마을 뒷산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했다.
옛 선비가 살았던 방에 들어가 봤다. 서적과 제사 축문, 부고, 문집 등이 있다. 벽에는 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도 걸려 있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 말씀이 “이 집 할아버지(김종회)가 살아계실 때는 글 읽는 소리가 골목에서도 들렸다”며 “그 할아버지의 후손들도 글을 많이 하여 좋은 자리에 가 계신다”고 했다. 기와지붕 팔작부분 시멘트에 1976.4.10 이라고 써져있다. 새마을 사업 때 초가에서 기와로 개량한 날짜라고 한다.
금영동경로당 준공식
금영골 사람들
금영골 사람들
마을은 산을 등지고 좌청룡 우백호 가운데 자리 잡았다. 예전에 아들이 장성하여 장가들면 살림을 내놓을 때 바로 옆에 집을 지어 새살림을 차렸기에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이유다.
마을로 들어가는 첫 집이 금영동노인회관이다. 회관 방안 벽에 2006년 12월 13일 마을회관 준공 기념사진이 있고, 그 옆에 2010년 4월 21일 금영동 버스운행을 기념하는 사진도 있다.
거실로 나오니 할머니들이 “점심 같이 먹자”고 했다. 고점순·장태순·임경란·임복순·장춘월·최동순 할머니와 상추쌈을 같이 먹었다. 임복순(85) 할머니는 “예전에는 의식주를 자급자족했다”며 “우리 집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직접 지었고, 내 손으로 배를 짜고 바느질을 해서 식구들 옷을 지어 입혔다”고 했다.
임경란(85) 할머니는 “어릴 적 영주장 갈 때는 전닷, 기와고개로 걸어가서 월호교 근처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 문수역까지 가서 기차타고 영주장 갔다”며 “나중에 예천가는 기찻길이 개통된 후에는 어등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예천장, 영주장 갔다”고 했다.
회관 밖으로 나왔다. 마을 앞 도로변에는 최근에 지은 정자가 있고, 150m 아랫쪽에는 옛 금연(今淵)으로 추정되는 못(池)이 있다. 문수면새마을협의회장 김영조(63)씨를 정자에서 만났다. 김씨는 “지방도(보문-북후) 928호(2005년 준공)가 나기 전에는 소발이 길밖에 없는 오지마을이었고, 아이들은 이 길을 걸어서 분계 학교에 다녔다. 저기 있는 저수지는 예전부터 있던 것을 일제 때 보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김영필 노인회장
손승록 전 노인회장
고점순 할머니
임복순 할머니
임경란 할머니
장태순 할머니
최동순 씨
장춘월 씨
김영조 씨
김순남 씨
이원식 시민기자
'책사랑 > 우리마을 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때 군(郡) 관아가 있던 마을 ‘선계동(仙溪洞)’ (0) | 2020.08.31 |
---|---|
예전에 선녀가 놀다간 가마바우 밑에 있다하여 ‘바우실’ (0) | 2020.08.31 |
머리(智慧)를 모아 서로 돕고 사는 마을 ‘필두(弼頭)’ (0) | 2020.08.31 |
영주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다하여 ‘향교골(鄕校谷)’ (0) | 2020.08.31 |
영주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다하여 ‘향교골(鄕校谷)’ (0) | 2020.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