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226] 가흥2동 장수고개·윗귀내

단산사람 2020. 3. 4. 20:24

장수고개’의 오랜 역사, ‘웃기내’ 이야기 전설로 남아

우리마을탐방[226] 가흥2동 장수고개·윗귀내 2018.11.27


윗귀내 마을전경

 

윗귀내 사람들

장수고개, 삼국 때 과현·조선 때 성내산봉수대
함창김씨, 1835년 실내(新川) 수해로 상현 이거

가흥2동 윗귀내 가는 길 서천교사거리에서 순흥방향200m 지점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접어들어 철도건널목-귀내보트장-아랫귀내-고현삼거리-고현교를 건너면‘윗귀내’ 표석이 나타난다. 여기서200m가량 올라가면 윗귀내 마을이고, 다시2km쯤 더 가면 장수고개이다. 지난달24일 윗귀내에 갔다. 이날 상고현 경로당에서 강성복 통장, 허영수 노인회장, 이성환3반장, 김증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고현정과 상고현경로당

역사 속의 상고현(上古峴)
영주는 삼국시대 때 날이군(捺已郡)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때는 날령군(捺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지영주사(知榮州事)라 불렀으며, 조선조 태종13년(1413)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조선 중기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으로 정비할 때 귀내 지역은 망궐리(望闕里) 북청방(北廳坊), 장수고개는 상현방(商峴坊)이라 부르다가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망궐면 북청리, 상현리가 됐다. 그 후 조선 말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북청리는 고천동(古川洞)으로, 상현리는 상현동으로 개칭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망궐면 고천동(귀내)과 상현동(장수고개)은 영주면(榮州面) 고현리(古峴里)가 됐다. 1940년 영주읍 고현리(법정동), 1980년 영주시 가흥2동(행정동), 1995년 통합 영주시 가흥2동(2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성복 통장은“귀내·장수고개 지역은 일제 때‘고현리’가 됐다”며“1980년 윗귀내와 장수고개가 가흥2동2통으로 통합되면서‘상고현’이 됐다. 현재70세대120명이 산다”고 말했다.

장수고개(상현) 서낭당

장수고개(商峴)의 전설
장수고개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대에 따라 그 유래를 달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炤知麻立干 十一年秋九月 高句麗襲北邊至戈峴」이라 기록했다. 「소지왕(신라21대왕) 11년(489) 가을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과현(戈峴)은 장수고개에서 갓골로 넘어가는 재(지금 봉우재)를 말한다. 1500년 전 과현에서 신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격전을 벌였다고 하니‘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또 장수고개 뒷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봉수산(309m)이라 한다. 조선시대 때 영천군(옛영주) 성내산봉수(城內山烽燧)가 바로 이곳이다. 봉수는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 통신제도이다. 봉수산 정상에 오르면 옛 과현의 흔적과 봉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장수고개를 상현(商峴) 또는 상산(商山)이라 불렀다. 장사(商)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삼국시대 때 소금·생선장수가 등짐을 지고 동해를 출발하여 봉화-영천(영주)을 거쳐 순흥부로 드나들 때 많은 장사꾼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하여‘장수고개’라 불렀는데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장수 상(商)자에 고개 현(峴)자를 써 상현(商峴)이라 했다.


지명유래
귀내 지역은 조선 때‘망궐면’ ‘북청리’였다. 조선 중기 무렵 추로지향(鄒魯之鄕,학문의고장)을 꿈꿔 온 영주 선비들이 공자의 고향 중국 산동성 궐리(闕里,췌리)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와 권리 앞에 바랄 망(望)자를 붙여‘망궐리(望闕里)’라 했다. 또 이곳을‘북청리’라 한 것은 귀내 동쪽 산의 이름 북청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 진다.

귀내는 지금부터500년 전 반남박씨 형(珩)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 둔덕에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로 시냇물이 흘러 풍광이 절경이었다.

당시 마을사람들은 느티나무 괴(槐)자에서‘괴’ 자를 따고 내 천(川)자에서‘내’자를 따‘괴내’ 라 부르기도 하고, 오래된 고목이라 하여 옛 고(古)자에 내 천(川)자를 써 고천(古川) 또는‘고내’라고도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귀내’가 됐다고 한다. 그 후200년 전 함창김씨 일족이 귀내 북쪽에 자리 잡으면서‘웃귀내’라고 부르다가10여 년 전부터‘윗귀내’라 부른다. 지금의 고현동은 일제 때 고천(古川,귀내)의 고(古)자와 상현(商峴,장수고개)의 현(峴)자를 따‘고현동(古峴洞)’이라 했다.

백남선생 문과급제 교지

함창김씨 입향 내력
영주의 함창김씨는 고려 공민왕 무렵 문하평리 판예의시사상호군을 지낸 귀(龜)의 아들 중서(重瑞), 중보(重寶), 중기(重器) 3형제가 고려가 망할 무렵 절조(節操)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낙향하여 영천(榮川,영주)에 정착했다. 그3형제는 실내(新川,이산면 신암1리)에 함께 살다가 둘째 중보의 현손 사종(嗣宗)은 순흥 파회(단산 바우)로 옮겨가고, 셋째 중기의 손자 고(고)는 의성 비안(比安)으로 옮겼다.

첫째 중서의 아들 이음(爾音)이 문과로 관찰사, 손자 권(권)이 문과 장원급제, 이음의6세손 융(隆,1545-1594)이 학행으로 사점시 봉사를 지내고, 8대손 요흠(堯欽)이 문과, 융의 현손 시빈(始빈)이 문과, 융의8대손 기헌(騏獻)이 문과, 9대손 진하(鎭河)가 문과로 병조참판에 오르는 등 과환(科宦,문과급제)이 이어졌다.

문중 기록에 의하면 「1835년 실내(新川) 옛 터전이 큰 수해를 입자 융의8대손 황암(篁巖) 김진하(金鎭河,1786-1865)가 조부의 별장이 있던 상산(商山,장수고개)에 집을 옮기고, 집 곁에 작은 정자를 지어 쌍죽정(雙竹亭)이라 하고 만년에 거처로 삼고자 했다」고 적었다.

황암 선생은180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1841년 정시 문과에 올라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됐다. 그는 벼슬에서 은퇴한 후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다 장수고개 뒷산에 묻혔다.

상현문중 김증(86) 어르신은“진하 선조가 상현에 터를 잡으면서 실내에 살던 문중 다수가 상현으로 이거하게 됐다”며“그 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웃귀내, 서늘기로 터전을 넓혀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장수고개에 사는 백남(백남) 김시빈(金始빈,1684-1729)의10대손 김석홍(73) 주손 집에는 백남 선생이 남긴 유물 다수를 소장하고 있다. 김 주손은“백남 할아버지의 사마시급제 교지, 문과급제 교지, 과거시험 답지, 백남문집 등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함창김씨가의 며느리 박화자(70) 씨는“1960년대 웃귀내의 모습은 전부 초가집이었고, 함창김씨4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말했다.


‘웃긴다’는 지명‘웃기내’
윗귀내를 전에는‘웃기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사는 영호(서부초등3학년)가 학기 초 외지에서 부임한 선생님과 교실에서 있었던‘웃기내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온다.

「교사:영호는 어디 사니?/영호:웃기내요/교사:뭐 이 자식(영호에게 호통을 치면서), 어디 사느냐고?/영호:(울먹이며) 웃기내요/교사“야, 김현수. 이 자식 정신 어떻게 된 거니?/현수:아니요. 웃기내 맞아요/교사(더욱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야, 인마 선생님을 놀리는 거야?/학생들:맞아요. 진짜 웃기내요/교사:뭐! 이 자식들이……」-국립국어원 국어문화학교 교재에서-

쌍죽당(雙竹堂) 고택
참판공(김진하)의 묘
상고현노인회 친목회
장수고개 옛길

상고현 사람들

이성환 씨

기자가 상고현 경로당에 가는 날(24일) 첫눈이 내려 윗귀내 마을을 감싼 솔숲 풍광이 더욱 아름답다. 현관에서 만난 이성환(68) 씨는“윗귀내는 선조들이 잘 가꾼 솔숲이 마을의 상징”이라며“솔숲에서 나오는 좋은 기(氣) 덕분에 모두 건강하고 장수한다”고 말했다. 경로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에는 허영수 노인회장을 비롯하여10여명이 모이셨다. 안방에는 박찬분·은윤태·강정애·김진숙 할머니 등 여러분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산면 안수구리에서 윗귀내로 시집 왔다는 박찬분(83) 할머니는“경로당이 있어 참 좋다”며“통장님과 노인회장님이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은윤태(83) 할머니는“예전에 윗귀내는 함창김씨 집성촌으로 함창김가들만 살았는데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화합하며 산다”고 말했다.

윗귀내에 산지23년 됐다는 강정애(82) 할머니는“윗귀내는 공기좋고 인심좋은 마을”이라며“다음 주엔 허영수 노인회장님 인솔하에 회먹으러 간다”고 자랑했다. 이날 마을 부녀회에서 우족탕을 끓여 어르신들을 대접했다. 허영수 회장은“매주 토요일이면 점심을 함께 하면서 친교활동을 한다. 늘 봉사를 많이 하시는 부녀회원들께 감사드린다”면서“다음 주27일날은 마을 어르신들을 모두 모시고 예천상리에 있는 가재봉송어횟집에 가서 회도 먹고 친목회도 여는 나들이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의 옛 모습을 설명해 주신 김욱 씨, 장수고개 옛길과 쌍죽당(雙竹堂)고택, 장수고개 서낭당, 참판공 묘소 등을 직접 안내해 주신 김증 어르신과 김석홍 씨께 감사드린다. 또 마을탐방 취재에 적극 협력해 주신 강성복 통장님과 허영수 회장님께도 감사드린다.

강성복 통장
허영수 노인회장
김증 어르신
박찬분 할머니
은윤태 할머니
강정애 할머니
김진숙 할머니
김석홍 씨
김욱 씨
박화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