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218] 풍기읍 성내2리 중앙시장

단산사람 2020. 1. 15. 08:32

풍기 상권의 노른자위 ‘중앙시장’ 마을

우리마을탐방[218] 풍기읍 성내2리


옛 저잣거리, 일제 때 5일장, 1967년 중앙시장
1975년 새마을운동 때 ‘금동용형당간두’ 발견

 

성내2리 마을전경

성내2리의 위치
풍기읍 성내2리는 십자거리 기준 북동편에 위치해 있다. 태춘당약국 골목에서 순흥통로5거리-대중상회-중앙시장-성동상가-민속떡집-참사랑의원-이디아커피점으로 돌아오는 지역이 성내2리다. 지난달 21일 성내2리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서석수 이장, 김국찬 노인회장, 김동욱 발전위원장, 이영실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들었다.

 

성내2리 마을회관

역사 속의 성내2리
소백산 동남쪽에 일찍부터 소국이 발달해서 풍기에 진한 12국의 하나인 기저국(己저國)이 있었다고 한다. 풍기는 통일신라 때 군사기지 기목진(基木鎭)이 설치되어 ‘기목진’이라 부르다가 고려 때 기주(基州)로 개칭됐다. 조선 태종 13년(1413)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기천현(基川縣)이 됐다.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李珦)의 태(胎)를 은풍현 명봉산에 묻었는데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그 보상으로 은풍과 기천에서 한 자씩 따 풍기(豊基)라 하고 군(郡)으로 승격한 후 은풍현을 풍기군에 속하게 했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동부면(東部面) 성내리(城內里)가 됐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주군(榮州郡) 풍기면 성내2리가 됐다가 1973년 풍기읍 성내2리, 1980년 영풍군 풍기읍 성내2리, 1995년 통합 영주시 풍기읍 성내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성내리는 옛 풍기읍성(豊基邑城) 안에 있다고 하여 성내리(城內里) 또는 ‘성안’이라고도 했다.

 

당간두 발견장소

 

금동용형당간두

금동용형당간두(金銅幢竿龍頭) 발견
성내2리 마을회관 현관 좌측 벽에 보물 제1410호 ‘금동용형당간두(높이 65.0㎝)’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이 당간두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조형미 또한 탁월하여 우리나라 대표 당간두로 평가받아 2004년 6월 26일 보물로 지정됐다. 당간두를 처음 발견한 김동욱(당시 31세) 씨와 발견 현장에 가서 당시 상황을 들었다. 김 씨는 “1975년 3월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성내2리 현 주차장 중간지점 하수도공사장에서 당간두를 발견했다”며 “곡괭이로 땅을 파는데 찍히는 감각이 보통과 달라 곡괭이 끝을 살펴보니 황금색 물질이 묻어나왔다. 조심스레 흙을 걷어내고 형체를 살펴보니 용머리 형상을 한 물체였다. 이상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은 읍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리고, 지상 위로 꺼내 가마떼기를 덮어두었다. 그날 오후 누군가 오더니 현장과 용머리 사진을 몇 장 찍고는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갔는데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연락도 없었다. 그 뒤 2009년 마을회관을 지을 때 보물로 지정된 당간두 형상을 돌로 조각하여 외벽에 붙였으며, 당간두 사진액자을 만들어 회관 거실에 걸었다. 또 소수박물관에 당간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당간두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으로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관리·전시하고 있다. 대구박물관은 이 당간두를 본래 모습으로 복원해 본관 정면 마당에 높이 세워놓았다. 기자가 김 씨에게 “당시 발견자에게 주어지는 증서 같은 거 받았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풍기읍성 흔적

풍기상권의 중심 중앙시장
옛 풍기읍성 동문 밖 일대 저잣거리가 일제 때 5일장으로 발전했다. 6.25 후 풍기인삼과 직물공장이 번성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1960년대 중앙시장은 호황을 이뤘다.

김석진(68) 전 풍기초 교장은 “1960-70년대 중앙시장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으며, 당시 풍기극장(현 민속떡집) 주변은 명동에 버금가는 변화가였다”며 “1967년 중앙시장이 특성화시장으로 지정되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중앙시장에서 30여 년간 가게를 열고 있는 구자성(68) 씨는 “1990년대 농촌인구 감소와 시장 인구가 역전으로 이동하는 등 재래시장이 쇠퇴기로 접어들게 됐다”며 “최근 들어 중앙시장만의 특화된 요소를 찾자는 운동과 특산물 먹거리시장을 개설하자는 등 활성화사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오래된 가게 ‘일삼상회’
60년 동안 한자리에서 쌀가게를 하고 있다는 송연순(85) 할머니를 찾아갔다. 시장이 처음 열릴 때 군(郡) 부지에 지었다는 일삼상회 건물은 방 한 칸, 가게 한 칸 뿐이다. 예전엔 근사했겠지만 지금은 초라하다. 송 할머니는 “예천 보문이 고향인데 풍기 직물공장에 돈을 벌러 왔다가 지인의 소개로 21살 때 희여골 경주이씨가로 시집갔다. 그런데 어찌나 가난했던지 살1되, 밥그릇 2개, 장물 1되, 나무 1짐 달랑 가지고 살림을 났다. 날품팔아 어렵게 사는 걸 본 아는 사람이 ‘쌀장사를 하면 아이들 배는 안 굶긴다’는 말에 26살 새댁이 쌀 반가마를 꿔다 머리에 이고 와서 이 자리에서 쌀장사를 시작했다”며 “당시 쌀1되 2원50전, 보리쌀은 1원80전 했다. 그 땐 밥 안 굶고 사는 게 최대 행복이었다. 여기서 5남매(2남3녀) 학교 시키고 시집장가까지 다 보냈다. 지금까지 여기 사는 이유는 시 부지(敷地)를 불하(拂下) 해주면 새집을 지어 살고 싶은데 60년이 지나도록 불하 소식이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말했다.

 

태춘당약국

태춘당가의 대를 이은 의술
풍기사람은 누구나 태춘당을 잘 안다. 근대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태춘당약국에 들러 송시락 약사를 만나 태춘당가 4대 이야기를 들었다.

송 약사는 “고향은 양주송씨 집성촌인 장수면 호문2리 토계다. 부친(송종훈)께서 서울대 약대를 나오셔서 영주초등학교 앞 복어집 자리에 처음 약국을 열었다가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때(1953) 풍기로 와서 현 위치에 조부님(송영호)은 태춘당한의원을, 부친은 태춘당약국을 열었다”면서 “조부님에 이어 부친과 제가 풍기에서 의료인으로 지역민과 함께했다. 제 아들(송동혁,피부과전문의)은 시대변화에 따라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송 약사의 조부 송영호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수립 무렵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된 바 있는 독립운동가다. 또 송 약사의 아들은 서울 강남 역삼동 소재 피부전문 엘스타의원 원장이다.

풍기직물의 선구지들
지난달 20일 성내2리 김국찬(92) 노인회장을 찾아 갔다. 회관2층 경로소에서 김 회장과 김진세(91), 윤정대(93), 길승균(90) 어르신을 만났다. 이 분들은 풍기직물 1세대로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다. 윤정대 어르신은 “평북 연변에서 해방 후(1946) 아버지를 모시고 풍기 금계동 용천골에 정착한 정감록파”라며 “당시 ‘풍기로 가야 산다’는 정감록을 믿고 1승지를 찾아 풍기로 왔다. 먹고살기 위해 수직기 부속을 짊어지고 와서 명주를 짜기 시작했으니 풍기직물의 1세대”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 분들이 풍기직물의 선구자들이 맞다”며 “지금은 아들(2세대)들이 현대식 직물공장에다 인견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세, 윤정대, 김국찬, 길승균 어르신
최윤희, 이옥분, 최위성, 이영실, 고점순 씨
강숙영, 백인숙, 서원자, 이명옥 씨

 

성내2리 사람들

성내2리 사람들
서석수(64) 이장은 “성내2리는 풍기 상권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가 밀집 지역”이라며 “상권 일부가 역앞으로 옮겨 가기는 했으나 평상시 상업활동은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120세대에 240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실(65) 부녀회장은 “우리 마을회관이 아마도 영주시 관내에서는 최고인 듯싶다”며 “풍기읍의 주요행사는 우리회관에서 할 때가 많다. 우리 동민들은 서석수 이장님을 중심으로 단합이 잘 되는 마을이다. 이장님과 김동욱 발전위원장님께서 헌신적으로 마을을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마을 고점순(64,상업) 씨는 “5년 전까지만 해도 난전에 곡식·채소·과일을 파는 할머니들이 있었는데 그 마저도 역앞으로 가고 지금은 없다”며 “예전에 자전차점(자전거 가게)이 10군데나 있었는데 지금은 딱 1군데 남았다. 시장이 점점 줄어들기는 하지만 살던 곳이 좋고 인심이 좋아 눌러 산다”고 말했다. 김현자(62) 부녀회총무는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석수 이장님과 김동욱 발전위원장님이 앞장서서 막아내고 해결하여 마을 분위기가 참 좋다”면서 “해마다 12월 30일에는 마을대축제 대동회가 열리고, 초복날은 삼계탕을 끓여 어르신들을 대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회관 옆 정자에서 김보비(85) 할머니의 고달픈 인생사를 들었다.

평안남도에서 살다가 해방 후(1946) 아버지를 따라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김 할머니는 “충청도 예산에 터를 잡았으나 빈손으로 왔으니 얻어먹고(동냥) 살아야 했다. 열두 살 먹은 여식이 밥 얻으러 가면 불쌍해서 많이 줬다. 그러다가 ‘풍기에 가면 일자리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6.25 후(1953) 풍기에 와서 살게 됐다. 북에서 같이 넘어 온 동갑내기 남편과 열심히 일해서 아들 3형제 잘 키워 장가보냈다”고 말했다. 추석 대목밑에 무척이나 바쁜 가운데도 마을 곳곳을 안내해 주신 서 이장님과 김 위원장님께 감사드린다.

서석수 이장
김국찬 노인회장
김동욱 발전위원장
이영실 부녀회장
김석진 전 풍기초 교장
김보미 할머니
송연순 할머니
구자성 씨
고점순 씨
김현자 부녀회총무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