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144]가흥1동 성지미 (성잠)

단산사람 2017. 7. 17. 14:17

심원(心遠)의 깊은 뜻 간직한 마을 ‘성지미(聖岑 성잠)’

우리마을탐방[144]가흥1동 성지미 [탐방일:2017.3.26]

 

 

성지미-마을 전경

심원당(心遠堂), 선비들의 수양과 강학 공간
퇴계 선생이 거닐고, 학사공이 시를 읊은 곳

가흥1동 성지미 가는 길
성지미 마을은 한정교 남쪽 금강물류(주)와 노벨리스코리아 영주공장 사이에 있다. 신영주 남부육거리에서 현대아파트 방향으로 가서 비달고개를 넘으면 한정교가 보인다.

한정교에서 노벨리스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강물류 뒤쪽으로 보이는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 야성송씨 400년 세거지 성지미 마을이다. 지난달 26일 성지미에 갔다. 이날 마을 사람들과 심원당 정자에 올라 당의 내력과 마을의 전설을 듣고 왔다.

송씨별업(세거지 표석)

역사 속의 성지미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기군(奈己郡), 신라의 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 등으로 부르다가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성지미 지역은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구분할 때 가흥리(可興里) 초곡방(草谷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 면동(面洞)으로 바뀌면서 가흥면 초곡동(草谷洞)이 됐다.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초곡동이 상초동과 하초동으로 분리되면서 성잠은 하초동에 편입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문전(文田)의 문(文)자와 한정(寒亭)의 정(亭)자를 조합하여 문정동(文亭洞)이 됐다. 그 후 1940년 영주읍 문정동, 1980년 영주시 가흥1동 14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영희(54) 통장은 “가흥1동 14통은 성지미, 한정, 서릿골, 목골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며 “성지미와 목골은 야성송씨 집성촌이고, 한정과 서릿골은 반남박씨 세거지”라고 말했다.

심원당 유적비

지명유래
영주시사에 보면 「예전에 물 건너 솟대재에 살던 송대년(宋大年)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이주하여 살았다. 당시 ‘마을 뒷산이 작지만 성스럽다’하여 성스러울 성(聖)자에 봉우리 잠(岑)자를 써 성잠(聖岑)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성지미가 됐다」고 기록했다.

또 「풍수지리에 밝은 성지도사가 물 건너 사일 앞을 지나다가 이 마을 뒷산에 서기(瑞氣)가 서려있는 것을 보고 이곳을 찾았더니 야성송씨 심원당 정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성지도사가 다녀간 곳이라 하여 성지미라고 불렀다」고 했다. 풍수지리에 밝은 이 마을 출신 송우선(79) 어르신은 “이 두 가지 지명유래는 오랜 세월 선조들로부터 구전되어 왔다”며 “심원당 선조께서는 이 터가 천년토록 학문하는 곳이 되기를 소망하셨다”고 말했다.

심원당 전경

 송씨별업(宋氏別業)
마을 가운데 ‘송씨별업’이란 표석이 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여쭈니 송무찬(55)씨는 “별업(別業)이란 옛 선현들이 경관 좋은 곳을 찾아 ‘○○별업’이라고 돌에 새겼는데 요즘 말로 치면 ‘별장’과 같은 뜻”이라며 “성스러운 이 터전은 ‘야성송씨 세거지’라는 강한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야성송씨 성잠문중은 심원당 대년(19세)의 후손으로 「시조 맹(孟)자 영(英)자 下, 현령공(경산자공.14세.휘綸)파 下, 영주 입향조 눌재(訥齎) 송석충(宋碩忠.15세)의 장자 첨지공(엄儼.16세)파 下, 엄의 장자 복숭(福崇.17세)-복숭의 차자 판관공(잠潛.18세)파 下, 잠의 3자 심원당(대년大年.19세.1589-미상)파 下, 대년의 아들 시봉(時鳳.20세)-세영(世英.21세)-태진(泰晉.22세)으로 이어져 현재 주손 원일(32세)로 세계를 잇고 있다.

심원당-친필 전자글씨

수양과 강학 공간 심원당
심원당(心遠堂)이란 야성송씨 19세손 송대년(宋大年)의 호(號)이면서 그의 정자 이름이기도 하다.

심원당의 후손 송원일(源日.55.32세손) 주손은 “심원당 선조께서는 소고(嘯皐) 선생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8년) 성균관 진사에 오르셨으나 당시 윤리가 패한 것을 보시고는 관직에서 물러나 임천에서 원근현우와 시화풍유(詩話風遊)로 천수를 누리셨다”며 “당의 편액은 도연명의 시어에서 취하여 ‘심원(心遠)’이라 하셨으니 ‘심신을 수련하여 원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어질고 넉넉한 마음을 키운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후손 송무찬(55.32세손)씨는 “이 정자는 심원당 선조의 아드님이신 시봉(時鳳) 선조께서 선친을 추모하고 유지(遺志)를 받들기 위해 1670-80년경 세우셨다”면서 “당에는 선조께서 손수 쓰신 전자체 ‘심원당’ 편액이 있고, 학사 김응조 선생의 시판, 류성룡의 현손으로 난고서당 초대 사부이신 류희지(柳熙之) 선생의 기판(1680년경으로 추정), 전적 김상온의 갑자 중수기, 진사 박승진의 경술 중수기, 풍산 김세락의 묘갈명 등이 있다”고 말했다.

심원당 옆에 살고 있는 송도선(75) 노인회장은 “이곳은 일찍이 퇴계 선생께서 ‘맑고 그윽한 경치를 감상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며 “심원당은 수양과 강학의 상징으로 후손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심원당 묘소

 심원당 시(詩)와 기(記)
학사 김응조의 시판에 보면 「先正當年此地遊(선정당년차지유) 선정(퇴계)선생이 당년에 여기에 노시어/爭傳草谷最淸幽(쟁전초곡최청유) 다투어 전하기를 초곡(푸실)이 가장 맑고 그윽하다 하네」라고 적었다.

이 시에서 ‘퇴계 선생께서 일찍이 이곳에 와서 경치를 감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류희지의 기문 첫머리에 보면 「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失不훤/‘고반(은거하는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덕이 크고 높은 사람)의 마음 넉넉하도다.

홀로 자다가 깨어나 말하니 길이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라고 적었다. 류 공은 이어서 “퇴계 선생이 이곳에 와서 그 맑고 그윽한 경치를 완상(玩賞)하였으며, 학사공이 그 참다운 경계를 시로 읊어 탄복했다”고 적었다.

심원당기

 심원당의 후손들
심원당 후손들은 공의 유지를 받들어 강학을 중시하고 덕을 쌓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집성촌을 이루고 살다가 산업화 이후 도시로 진출하여 지금은 각계각층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송원일 주손은 시청 중간 간부로 재직하면서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 문중 대소사를 챙기고 있다. 또한 송무찬 후손은 축산전문가로 우리나라 축산발전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다. 2009년부터는한우자조금 대의원과 전국한우협회 감사를 거쳐 2017년 3월 한우자조금관리위원회 감사로 선출됐다. 

김응조의 시판

성지미 사람들
마을 앞에 정자가 있고 집들은 소쿠리형 골짝 안에 층층 자리 잡고 있다. 뒷산을 성봉(聖峰)이라 하는데 장군봉(將軍峰)이라고도 부른다. 산줄기가 오른쪽으로 길게 뻗었는데 오른쪽 끝자락을 남경대(覽鏡臺)라고 한다.

마을 위쪽 전망 좋은 곳에 송진선(65. 부인 문영자)씨 부부가 산다. 송씨 부부는 “성지미가 이름난 것은 심원당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며 “할아버지는 재주가 뛰어나시고, 시문은 아름답고, 필법 또한 기묘함에 이르러 당세 큰 선비이셨다”고 말했다.

이 마을 출신 송태선(81) 어르신은 “저의 증조부 재(在)자 성(星)자 할아버지는 진사에 오르셨는데 시문(詩文)에 밝아 원근 각처에서 기문, 제문, 상량문 등을 많이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남경대

단산면 구구리에서 성지미로 시집왔다는 신화순(75)씨는 “여기서 50년 넘게 살았는데 고생만 했다”면서 “예전에 한정교가 없을 때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비달고개를 넘어 시내로 갔다. 또 정자 옆 우물물을 하루종일 여날랐고, 남경대 앞 냇가에서 빨래를 했다”고 말했다.

마을 어르신들이 ‘질부’라고 부르는 신숙자(49)씨는 “심원당 기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서천의 경관이 참 아름답다”며 “30여 년 전에는 백사장과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어 소풍객이 많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선비화와 심원샘

심원당을 나와 송무찬씨와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성봉 중턱에 올라서니 서천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송씨는 “심원당 선조께서는 글은 두보와 이백을 닮았고, 필법은 종요와 왕희지를 사모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선조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지극한 겸손 때문인지 남긴 시와 서를 찾을 길 없어 안타깝다”며 “이제 기문과 시판, 중수기, 행장, 타 문중 관련기록 등 선조께서 남기신 조각들을 모아 심원당실기 국역 출판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가흥1동 성지미 사람들>
 

유영희 통장
송도선 노인회장
송원일 주손
송태선 어르신
송우선 어르신
신화순 씨
송진선 씨
문영자 씨
송무찬 씨
신숙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