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스크랩] 이퇴계(李退溪)의 소백유산록(遊山錄)

단산사람 2013. 3. 31. 17:03

 

 

▒ 이퇴계(李退溪)의 소백유산록(遊山錄)


퇴계의 소백산 기행이다.
그가 풍기군수로 있을 무렵 명종4년(1549) 초여름4월(음) - 초암 골짜기로 올라 석륜(국망봉 밑 절터) 국망봉,

비로사로 돌아 하산한 기록 인데, 그 3박4일간의 산행은 소백산 경치의 중심부를 샅샅이 살핀 탐승이기도

하려니와 그 중에서도 석륜에서 비로사에 이르는 과정은 아무리 등산행락이 성하다는 오늘이지만, 요새

사람들은 알지도 못할 비경 들인데다가 그 일대에 총총히 깃들인 절들, 국망봉에서 비로봉 사이의 능선에

솟은 여러 바위 봉우리들의 이름이며 형상을 일러주고 있고, 함께 그 산행의 모습이나 그 보는 바 느끼는 바가
요새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기도 하여, 그 기록은 요새 사람들에게 소백산을 아는데 수월찮은 보탬과 아울러

흥미로움을 얻게 할 것으로 짐작되기에 여기 그를 번역하여 싣는다.

 


나는 젊어서부터 영주·풍기를 다녔기에 소백산을 바라볼 수도 오를 수도 있었건만 마음에만 두어 온지가

40년이다.지난 겨울 풍기군수로 와서 백운동(소수서원)주가 되고는 쉬이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될줄 여겼는데

그러고도 겨울을 지나고 봄을 보내면서 몇 차례나 백운동을 다녔으나 틈을 얻지못해 산문에조차 가보지

못했었다.


4월 辛酉일 오랜 비가 개어 산 빛이 멱 감은 듯했다. 이에 백운동서원에 가서 생도들을 보고 나서 이튿날

드디어 산에 오를새 진사 민서경이 그 아들 응기와 함께 따라나섰다.


죽계냇물을 거슬러 십여리를 오르매 골짜기와 숲이 깊숙하고 볼 만했으며 바위를 박차는 여울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안간교를 건너 초암에 이르니 절은 원적봉 동쪽 월명봉 서편에 자리하여

두 봉우리에서 갈린 예쁜 산발이 절 앞을 감싸안아 산문을 이루었다.

 

절 서편 냇가에는 우람한 바위가 솟아 있는데 위는 평편하여 앉을 만하고 밑은 맑은 물굽이가 소용돌이

치는 웅덩이 남으로 山門을 바라보고 굽어 시원한 여울소리를 들으매 실로 절경이었다.

 

 

 

 

주세붕은 이 바위를 백운대라 이름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어 오히려 청운대라 함이

좋을 듯. 산사람 종수가 내가 왔음을 듣고 묘봉암에서 내려왔기에 민서경이랑 함께 바위 위에서 술을 나누었다.


중들은 지난 적에 주군수께서도 가마를 이용했다면서 가마를 만들었는데 아주 간편하게 꾸며졌다.
민서경은 학질을 앓아 초암에서 되돌아가고 민응기, 宗卒, 여러 중들이 앞뒤에 따랐다.


태봉 서쪽에 이르러 냇물을 건너 말에서 내려 걷다가 다리가 불편해지면 가마를 타곤했다.

나처럼 병약한 이의 산행에는 필요한 기구였다.

 

시 한수를 읽고 이 날은 철암(哲庵), 명경암을 지나 석륜사에서 잤다.

철암절은 환경이 씻은 듯 깨끗했으며 맑은 샘이 암자 뒤 바위아래서 나와 암자의 동·서로 갈려

흐르는데, 맛도 차겁고 감미로웠다. 철암은 자리가 높직하여 안계도 시원스러웠다.

 

석륜사 바로 뒤에 솟은 바위는 마치 커다란 새가 머리를 치켜들고 막 날으려는 모양이어서 이름이 봉두암

이란다. 그 서쪽에 큰 집터미같은 바위가 있는데 사다리가 있어야만 오를 만하다. 주세붕은 광풍대라 했다.

절 안에는 석불상이 있는데 매우 영험하다고 중들은 말하지만 정말 그럴는지..


이튿날은 걸어서 중백운암에 올랐다. 어느 중이 이 암자를 짓고 좌선 이치를 깨치자 오대산으로

떠나고 지금은 중이 없어 창문 앞에 옛 우물이 있고 뜰에는 잡초로 쓸쓸하다.

 

암자 뒤의 길은 더욱 가파로운 비탈길이어서 가까스로 마루턱에 올랐다. 이래서 가마를 타고 등마루를 따라

동쪽으로 두어 마장쯤에서 석름봉을 만났다. 봉 위에는 풀로 얽은 막이 있고 사다리가 매어 있었는데 매를

잡기위한 시설이라 했다.

 

그 동쪽으로 두어 마장에 자개봉이 있고 다시 그 동편 두어 마장쯤에 불쑥 솟아 하늘에 닿은듯한 데가 바로

국망봉이다. 날씨가 쾌청하면 용문산 너머로 서울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날은 아지랑이 안개가

아물거려 용문산도 볼 수 없었고 서남쪽 하늘가에 월악산만이 어렴풋 할 뿐이다.


동쪽을 돌아보면 겹겹의 구름 밑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이 태백산, 청량산, 문수산, 봉황산이다.

그 남쪽으로 하늘가에 가물거려 아득하게 보일락 숨을락하는 것이 학가산, 팔공산 등 여러 산이다.

그 북쪽으로 아득히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 오대산, 치악산이다.

 

물은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더욱 적어 죽계의 하류에 榮川 귀대의 냇물 한강 상류의 도담 굽이일 뿐이다.
종수가 이르기를 「산정에서 조망하기는 늦가을이나 장마 뒤 개인날이 좋은데 주 군수님은 석륜사에서

닷새동안을 비에 막혔다가 개인날 올랐기에 멀리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고 나는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막혀 답답함을 겪고라야만 시원함을 얻는 것인데 내 등산길엔 하루의 막힘도 없었거니 어찌 만리의

시원함을 얻을 것인가. 그러나, 등산의 묘미가 꼭 멀리 바라보는데만 있을 것인가..?.


산상은 기온이 낮은데다가 사시장철 세찬 바람에 부대껴 나무들은 모두 동쪽으로 누워 줄기며 가지들이 굽이

뒤틀리고 앙바라지고 뭉툭한 난쟁이들로 4월 그믐께서야 잎이 성하기 시작하기에 1년내 자라야 分寸에 지나지

못하는데 억척으로 버티어 모진 풍상을 견디어내는 모습은 깊은 숲 큰 구렁에서 자라는 것들과는 본래 다르니

사는 환경에 따라 기질이 변화되고 기르기에 따라 체형이 달라짐은 물건인들 어찌 사람과 다를 것인가.

 

세 봉우리(석륜봉. 자개봉. 국망봉)의 거리가 8,9리에 사뭇 철쭉이 숲을 이루었는데 바야흐로 꽃이 한창

무르녹아 화사하게 흐드르져 마치 비단 장막속으로 거니는 듯 축륭(봄을 주재한 神)의 잔치에 취한 듯하여

매우 즐거웠다.

 

 

 


국망봉 정상에서 술 석잔에 시 일곱수를 쓰는데 해가 이미 기울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 숲 속을 걸어 중백운암에 내려왔다. 내가 종수에게 「처음에 제월대에 오르지 않은

것은 미리 다리 힘이 지쳐버릴까 두려워서였는데 다녀오고도 아직 힘이 남았으니 어찌 가보지 않으랴」하고

종수를 앞세워 가파로운 벼랑길을 옆으로 밟으며 간신히 오르매 상백운암이란 데는 불타버린지 오래어 잡초

이끼로 뒤덮혀 있는데 제월대는 바로 그 앞이었다.

 

자세가 외딸고 위태로워 으스스한 두려움에 오래 지체하지 못하고 내려왔다. 이날밤은 다시 석륜사에서 잤다.
이튿날 甲子일 .....힘든대로 상가타암에 올랐다. 막대를 잡아 환희봉에 오르니 봉 서쪽의 늘어선 여러 봉우리의

임학이 더욱 아름다운데 모두 어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수백보를 지나 옛 석 성터를 만났는데, 성안에는

주출돌이며 옛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서편에 바위 봉우리가 빼어 솟았는데 그 위에는 십여 명쯤이나 앉을 만하고 소나무 전나무며

철쭉이 우거져 노니는 사람들의 발길도 아직 닿지 않았다. 산인들이 그 형상을 따서 산대암이라 불렀다.

 

사람을 시켜 숲가지를 자르게 하고 바라보매, 원근이 한눈에 들어 온 산의 경치가 모두 여기 모인 듯 한데도

주세붕을 만나지 못해 이름이 속돼 보이기에 자하대라 고치고 그 옛 성은 적성(赤城)이라 이름 했으니 옛글

(天台山賦) 「적성에 놀이 일어 표를 세우다에서 취함이었다.

 

대(臺)의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 서있어 그 빛이 흰데 이름이 없기에 내가 그 동편 것을 백학(白鶴)

서편 것을 백련(白蓮)이라 해서 백설봉과 함께 백으로 했다. 백이 많음을 마다 않은 것은 실상 소백이란

이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숲을 뚫고 높은 비탈을 넘어 굽어보매, 구름에 잠긴 샘과 바위구렁의 더욱 좋은 경치를

만났으니 바로 상가타암이다. 그 동편에 동가타암이 있는데 종수가 이르기를 희선장로가 처음에 살다가

뒤에 보조국사가 여기서 참선 수도로 9년 세월을 숨어 지냈다고 종수가 그 시집을 가졌었다면서 그 두어

구절을 외었는데 모두 깨우쳐 채찍질하는 뜻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곡불숙의 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그 서북쪽에 금강 화엄 두 대의 옛 이름은 고승의 자취임을 알리고 있다. 그 동쪽 석봉이 가장 기이하게

빼어나 이름을 연좌라 하니 역시 고승과의 연고로 인함이다.

 

상가타암에서 냇물을 따라 내려오노라니 고목과 넝쿨이 하늘을 가리웠는데 이따금 만나는 석천이 매우

아름다웠다. 중가타암의 어구에 와서는 거기엔 중이 없기에 나는 들르지 않고 얼마 안 가서 층층으로 꺽여

쏟히는 폭포를 만났는데 그 곁엔 바위가 늘어 있다.

 

예전에 고죽 떨기가 들어차 있었는데 지금은 다 말라죽고 뿌리 둥걸만이 보여 이름을 죽암폭포라 했다.

본래는 온 산 숲바닥에 대나무가 가득 깔려 있었는데 지난 신축(숙종36년, 1544)에 한꺼번에 열매를 맺고는

그 해에 모조리 말라 죽었다니 이상한 일이다.

 

작은 시내를 지나 금당-하가타암에 이르다. 중가타암의 위에서 동쪽으로 들어가 보면 보제암 등 절이

있고 하가타암 곁에는 진공암이 있는데 다 중이 병중에 있다하여 들르지 않았다.

 

하가타암을 따라 내려오다가 냇물을 건너 바로 관음굴에 올라가서 머물러 잤다. 이튿날 신축일 산을 내려오다

산 아래에 반석이 넓게 깔리고 맑은 물이 그 위로 쏟겨 콸콸, 옥을 부수는 듯한 물소리도 시원스럽다. 양편

냇가에는 목련이 활짝 피어있고 나는 지팡이를 꽂아놓고 냇물에 세수도 하고 물장난도 즐겼는데 매우

유쾌로웠다.

 

중 종수가 시냇물은 응당 웃으리, 옥을 찬 나그네(벼슬에 있는 사람) 아무리 씻으려 씻으려 해도 씻기지 않는

세속 티끌의 자취를 이란 시구를 읊고는 「이게 누구의 말입니까?」해서,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웃고나서

시를 쓰고 일어섰다.

 

 

 

 

시냇물을 끼고 두어마장 걷는데 구름숲 절벽 구렁이 모두 좋은 경치였다. 갈림길이 나서는데 이르러 잠시 쉬고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중들은 초암골로 가고 나는 박달고개쪽으로 갔다. 작은 박달고개에 이르러 가마를 버리고

걸었는데 인마(人馬)가 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시내를 건너, 깊은 골짜기를 지나 큰 박달고개를 넘으니 곧 상원봉의 한 갈래가 남으로

달리다가 허리가 조금 낮아진 데였다. 거기서 상원사가 두어 마장 거리였으나 오르기에 힘이 지쳐 그만두었다.

 

내려오다가 비로전 옛터 아래 냇가 바위에서 쉬느라니 이윽고 허간씨와 아들 준이 고을에서 찾아왔다.

맑은 냇물 무성한 수목이 좋아 해가 기울도록 앉아 얘기했는데 그 바위를 비류암이라 이름했다.


이윽고, 욱금동을 거쳐 풍기고을에 도착했다.

소백산에는 숱한 바위며 구렁의 경치들이 있으나 절이 있는데와 사람 발길이 통하는 데는 대개 세 골짜기다.

초암사, 석륜사는 산의 복판골이요, 성혈사 두타사등은 그 동편골 세 가타암들은 서편골에 있다. 등산하는

이들이 초암-석륜을 거쳐 국망봉에 오름은 길의 편함을 취함인데 힘이 지치고 흥취가 다하면 그만 내려오고

마는 것이다.

 

주경유 갗은 기이함을 좋아하는 분도 거친 데는 복판 한 골짜기뿐이었다. 그 유산록은 매우 자세하게 적혀

있지만 실상 그건 다 산승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목격한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그가 명명한 광풍대다,

제월대, 백설봉, 백운봉이니 하는 모두가 복판 한 골짜기일뿐, 동-서골짜기엔 미치지 못했다.

 

나는 병약한 몸으로 한번에 온 산의 경치를 다 보기는 또한 어려운 일이어서 동편 골은 뒷날로 미루고,

서편 골만을 찾은 것이다. 서편 골에서 만난 경치에 백학봉, 백련봉, 자하대, 연좌대, 죽암대 등 이름

짓기를 사양치 않은 것은 주경유도 중간골에서 그러했음이다.

 

내가 처음 주경유의 유산록을 백운동 서원의 유사 김중문에게서 보았는데 석륜사에 갔더니 그 유산록이

판자에 씌여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시문의 웅건하고 기발함을 칭상하여 가는 곳마다에서 펼쳐 읊곤했는데

마치 홍안백발의 늙은이와 거기서 서로 수창하는 듯하여 그로 하여 흥겹고 재미로움이 참으로 많았다.


산놀이에는 기록이 있어야 하고 기록이 있음이 산놀이에 유익하다. 함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주경유보다 먼저도 문토로 와서 노닌 이가 산사람의 이르기는 정호음 선생과 임제고아

군수일 뿐인데 이제 그 기록을 찾자면 임군수는 한 글자도 얻어 볼 수가 없고 정호음의 시 한절이 초암절에

있을 뿐이며, 다른 것을 찾으면 석륜사 중에게 활금계의 시가 있고 명경암에 황우수의 시가 있을 뿐

이밖에는 볼 수가 없다.

 

허! 영남은 사대부가 많은 고장으로 영천-풍기에는 큰 선비가 잇따라 빛나는 곳으로 이 산에

노닌이가 고금에 얼마인데 기록으로 전할 만한 것이 어찌 이에 그칠 것인가.

 

생각건대 순흥의 여러 안씨가 이 산 아래의 정기를 받아 이름이 중원에 떨쳤거니 그들이 필시 이 산에 노닐고

여기서 즐기고 여기서 읊고 노래했을 것인데 산에는 바위에 새긴 것도 없고 선비가 외는 것도 없으니 ,

아주 없어졌음인가, 찾아볼 수가 없다.

 

대개 우리나라 풍속이 산림의 아취도 즐기지 않는 편이고 일 벌이기를 좋아해 기록하여 전하는 사람도

없으므로, 그처럼 명성을 드날린 여러 安씨에 이처럼 크고 높은 명산인데도 마침내 문헌으로 전함이

없음이 이러하거니, 다른 무엇을 말할 것인가.

 

 

 

2005/09/12 - 휘뚜루 -

♬ 청산 / 정강스님 ♬

출처 : 산으로, 그리고 또 산으로..
글쓴이 : 휘뚜루 원글보기
메모 : 평소에 알고 싶었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