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역사 편년
연월 |
개요 |
주관자 원 장 |
기 사 |
문헌/비고 |
1541년 5월 |
창건준비 | 주세붕 |
1541년 [중종36년] 5월, 신재(愼齋)주세붕이 풍기군수에 부임, 3일만에 회헌의 옛마을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 약3리쯤인 숙수사(宿水寺)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읽던 절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나, 혹은 그때까지 절이 있었는데, 서원을 짓기위해 철거시켰다는 설도 있다.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따로이 솟아 도사린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자리한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을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내리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성(贊成)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했다.(順興志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건설계획을 서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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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 |
창건 | 주세붕 |
1542년 [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 자 남짓 땅 밑에서 놋쇠와 황금이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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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 |
창건 |
1543년(중종38년)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되었고,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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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배향중흥 | 주세붕 |
1544년 {중종39년] 9월 1일에 안축·안보(安軸·安輔 형제:회헌의 再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였다. 주자의 백록동서원[註3]의 예에 의하여 학규를 제정하고 유생 10명을 상거하기로 하고, 그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전토와 노비를 제급(題給)하고 또 유지(有志) 황빈(黃彬)이 기증한 조(租) 75석을 기금으로 보(寶, 재단)를 만들어 이자를 거두어 경비에 보충하게 되었다. 고을의 生員 몇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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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주세붕 전임 |
주세붕 |
1545년 [명종1년 乙巳] 5월 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전임하다. |
64 |
1 |
소수 |
주세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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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1 | 중흥 | 안현 |
서원의 기초는 명종 원년(1546)에 회헌의 후손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뒤에 더욱 튼튼하게 되었다. 안현은 안향의 10대손으로서 뒤에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까지 올라갔거니와, 그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임명된 것은 주세붕이 풍기군수를 물러난 지 약 반년 후인 명종 원년(1546) 정월 17일이고, 퇴임한 것은 다음해 2월 19일이다. 그는 감사(監司) 재임중 재포(齋浦)의 어기(漁基, 어장) 3처와 영덕의 염분(鹽盆) 2좌9坐)를 백운동서원에 소속시켜 유생을 공궤하는 어염(魚鹽)의 걱정을 덜게 하고, 속공 노비 10여구를 제급하고 또 관하 각 고을에 명하여 혹은 백미, 혹은 장태(醬太), 혹은 등유(燈油), 기타 잡물을 보내게 하고 여유가 있으면 존본취리(存本取利)하여 전지를 구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운동서원에는 토지 약 30결과 노비 수십명을 보유하고 있었다.[註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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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 |
사액 |
아직 중앙에서는 알지 못하는 한 개의 사설 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조정에 상주하여 국가에서 공인하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발전시킨 것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다. 이황은 안현이 경상감사에서 물러난지 1년후인 명종 3년(1548) 10월에 풍기군수가 되어 다음해 12월에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그는 사직할 때 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상서하여 백운동서원의 건립전말(建立顚末)을 상세히 기술하고, 송나라 백록동서원의 고사에 의하여 편액을 선사(宣賜)하고 서적을 반강(頒降)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여 유생들이 귀의(歸依)할 수 있게 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이러한 일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면 중간에서 폐지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건의한 것이었다. 감사 심통원이 이것을 임금에게 전계(轉啓)하니, 명종은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토지와 노비 및 어전(漁箭), 염분은 주세붕과 안현이 조치한 것이 넉넉하므로 더 주지 아니하였으나,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이라 하고 편액을 새겨서 하송(下送)하는 동시에 사서 · 오경 · 성리대전 각 1부씩 하사하였다. 이것이 명종 5년(1550) 3월의 일이다.[註6] 이로써 소수서원은 국가의 공인하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안향의 영정은 본래 순흥 향교에 있었고 순흥은 본래 행정구역상 군수보다 높은 부사(府使)를 수령으로 하는 부(府)였으며, 풍기군과 영주현이 모두 그 예하(隷下)에 있었다. 그런데 세조 3년(1457)에 순흥부의 아전 이보흠(李甫欽)이 그 곳에 귀양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더불어 단종복립운동(端宗復立運動)을 모의하였기 때문에 부를 폐지하고 풍기군에 부속시켰으므로, 향교에 있던 안향의 영정은 서울 안향의 종가로 이안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하고 안향을 봉사하게 되자 안향의 10대 종손 안정(安珽, 당시 주서)이 그의 집에 있는 안향의 영정을 회헌사(晦軒祠)로 이안하여 지금까지 소수서원에 봉안되어 있다.[註2] 《사액서원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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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 |
주세붕 |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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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 |
주세붕 |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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