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4 10:00 겨울방학식
“안보 없이는 희망도 없다”
2010 겨울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과 구제역 확산으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춥지만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에도 하늘과 땅, 바다에서 전선을 지키는 국군장병을 생각하고
구제역 확산방지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역초소를 지키는 시청공무원, 경찰, 자원봉사자들과 고초를 나눈다는 생각으로 참아주기 바랍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고의 안보는 “국민이 단합하여 안보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1950.6.25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1953년 휴전협정 이후 470건이나 도발하였으며 이로 인해 3,700명의 인명을 살상하였습니다.
그 중 어린이가 희생된 사건으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한 이승복의 외침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1968년 12.9일 울진 삼척지구로 침투한 무장공비 120명 중 잔당 5명이 이승복집에 나타난다.
당시 강원도 평창군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9살) 이었던 이승복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한다.
이승복은 공비들에 의해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이 날 이승복군은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무참히 희생되는 처절한 광경을 남겼다.
2010년 봄(지난 3월)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 46용사가 전사했을 때 우리는 근조리본을 달고 분노하고 애도했었습니다.
2010년 겨울. 지난 11.23 후 2:23
북한은 연평도 민간인에게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6,25 이후 최대 무력 공격으로 우리군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사망 2명을 포함한 19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피해와 희생을 막기 위해 우리군은 즉각 응징하기로 결의 하고 육해공군과 해병대가 진돗개 1의 경계태세에 돌입해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를 믿고 국군에게 한없는 존중과 응원을 보내야 되겠습니다.
국가 안보가 무너지면 꿈과 희망, 교육도 경제도 모두 쓸모가 없습니다.
튼튼한 안보 위에서만이 행복한 나라를 이루고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폭격하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가 우리의 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합하고 더 큰 힘을 길러 적을 초전에 제압하여야 할 것입니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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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러니까 1968년 12월9일 저녁 6시가 넘은 시각이었을 게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속사 분교 2학년 이승복 군의 집.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용평면 계방산에는 퍽도 눈이 많을 때였다. 노동리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올라간 계방산 자락 자그마한 초가 오두막집을 휘감아 도는 윙윙대는 바람소리는 방안을 훈훈하게 데워주는 화롯불과 크게 대비되고 있었다.
이삿짐을 옮겨주기 위해 마을로 내려간 할머니(시어머니)와 아버지(남편)를 기다리면서 엄마 주대하씨는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건넌방에는 형 학관씨와 승복, 그리고 두 동생이 있었다.
"엄마, 아빠 언제 와"하고 승복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와 묻자, "글세, 할머니와 아빠가 좀 늦는구나. 왜 배고프니, 고구마 삶아 줄까?"하고 다정스레 묻자 "아니, 배 안 고파요. 엄마 가서 숙제할래"하고 승복이 물러가려 하자 이제 일곱 살인 남동생 승수가 다가와 "형, 우리 밖에 나가 거름 위에서 씨름할까, 아님 형한테 옥수수 알 빼 달래서 먹을까?"하고 말을 붙이는 것이다.
이제 아홉 살이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더 체구도 당차고 특히 동생들을 잘 대해주던 승복이 "밖에 추워, 우리형한테 가자. 옥수수 달래서 먹으면서 형아가 동화책 읽어 줄께"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이제 네 살인 여동생 승자가 큰 형(학관. 당시 15세)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마 아빠가 사 가지고 오실 달콤한 알사탕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지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승수야 무슨 책 읽어줄까"하고 묻자 "응 형아, 콩쥐팥쥐 얘기 해죠," "얘는 어제도 해줬는데 또?" "응, 난 콩쥐 누나가 젤 이뻐, 또 해줘 형 응." 하고 졸라대자 "알았어. 해 줄테니까 자지말고 잘 들어"하면서 또렷또렷하게 책을 읽어주자 어느새 승수도 잠에 빠지고 만다.
승수를 승자 옆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승복도 낮에 학교에서 내준 숙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방 바깥에서는 문풍지를 때리는 12월 계방산의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어두운 밤 그늘도 더욱 짙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덜컹거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이 작은 외따른 오두막집에 사악한 악마의 그림자가 폭풍우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바로 울진-삼척지구로 침투한 120명 무장공비의 잔당 5명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집 안팎에서는 산허리에 울려 퍼지는 차디찬 비명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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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참혹한 죽음, 처절한 광경이었다. 삽시간에 이승복을 비롯한 네 가족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비명에 스러져야 했다. 형 학관씨 또한 36군데에 이르는 자상(刺傷)을 입은 채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 12월이면 서울에도 눈이 내린다. 대체로 이때쯤 서울에 내린 눈은 눈이라고 하기엔 서먹하고 민망함이 묻힌 것이건만 그래도 가슴은 활짝 펴진다. 어쩜 이런 느낌을 갖는 것 자체가 스스로 진화가 덜된 천둥 벌거숭이에 다름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 겨울 스키의 대명사로 더 유명한 강원도 평창으로 들어서면서 내 눈(眼)은 더욱 휘둥그레지고 창 밖을 향하는 손놀림은 바빠져만 간다. 안과 밖의 기온차이로 유리창에 성에가 차 닦아내기 위함이고 햇살로 눈이 부신 산과 산, 들과 들, 천상천하(天上天下)를 뒤덮은 눈 더미를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기 위해서다.
12월9일 오전 9시30분, 우리들 일행(영관장교연합회 회원)을 태운 버스 2대가 서울을 출발했다. 전 날 기상예보가 강원도에 많은 눈이 내린다고 해 조금은 긴장 속에 아침을 맞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서울에 내린 눈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서울을 벗어나 한참을 달려 강원도로 들어서자 역시 그곳은 눈 잔치, 눈의 천지였다. 금년 들어 제대로 된 눈을 보기는 이 날이 처음. 오가는 차량에도, 논과 밭에도, 양철지붕 위에도, 나뭇가지 위에도 보이는 것은 온통 눈이다. 강원도 용평군 평창면 속사리에도 눈 눈, 눈의 향연이었다.
그 날 노동리 이승복 기념관 경내 계방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승복 군 묘역에서 그의 어린 넋을 달래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며 오늘에 다시 그의 정신을 되새기는 42주기 추모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 날도 계방산 해발 720미터 지점에 나란히 누워있는 이승복(당시 9세,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1학년) 군과 어머니 주대하씨, 그리고 남동생 승수(7세)와 여동생 승자(4세)의 묘역 주변에는 순백의 하얀 눈이 수북하니 쌓여 있었다.
그는 마치 42년 전 한민족이면서도 동족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이되 인간이기를 포기한 붉은 늑대 무리와도 같은 북한 공산무장공비들에게 무참한 죽임을 당한 일가족 네 명의 한 서린 넋을 달래주는 것만 같았다.
필자가 이승복 군의 묘역을 찾은 것은 올해로 세 번째다. 그것은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다. 올해로 12년 째 매 해 12월9일, 그의 기일이면 이곳 묘역을 찾아 추모제를 지내며 그의 영혼을 위무해 오며, 지난 2008년부터는 '이승복 역사 되살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노병들의 이 추모행사를 취재하면서부터다.
한 시절 나라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특히 1968년 10월 말에서 11월초 당시 울진-삼척지구로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하자 직접 공비소탕 작전에 참여한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이다. 그 분들은 이 날도 어김없이 한 자리에 모였다. 대부분 70세가 넘고 가장 연로하신 분은 90세가 다 된 분도 계셨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서는 한 점 흐트러짐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날씨에도 200여 미터가 넘는 산길을 걸어올라 추모제에 참석하고, 어린 영혼의 안식을 기원했다.
필자의 입장에서 올해 행사 참석이 비록 세 번에 불과하지만 가능한 이 추모제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자 하는데는 별다른 이유가 있다. 다른 이유에 앞서 바로 승복이 같은 또래 나이라는 한가지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기운이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안타까운 죽음의 사연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면서 그를 생각하며 늘 뇌까리던 노래를 잊은 적이 없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흘러 어쩌면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그를 잊었을 수도 있다. 그의 기일이 언제일지 까마득하고, 오래 전 먼지 수북한 낡은 공책 위에 덮어진 일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올해 그의 묘소를 찾아 향을 사르고 묵념을 하면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는 기쁨에 겨워했다.
하지만 어찌 그를 기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란 말이 허위 조작되고 날조된 사건(기사)이라며 온갖 방법으로 깎아 내린 사악한 이념그룹 세력들과 의 법정싸움이 무려 14년만인 지난 2006년 11월 대법원에 의해 진실임이 밝혀졌으니 그 지난한 세월을 그는 저 하늘에서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
어디 그 뿐인가, 1968년 12월9일, 천인공노할 학살(虐殺) 만행을 자행하고도 휴전선 너머 무리들은 붉은 마수(魔手)의 근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수많은 도발을 자행해 왔으며, 지난해 5월 2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금년 3월의 천안함 폭침과 11월 연평도 포격으로 무고한 민간인까지 살상하고도 계속적인 추가 도발 운운하며 으름장을 계속하고 있으니.
어찌 동족이란 이름을, 한민족 한 피붙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가슴 저미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을 송두리째 파괴하고자 김일성-김정일-김정은까지 3대 권력세습으로 광분(狂奔)하고 있는 북녘의 붉은 金의 집단, 그 집단에 목을 매 동조·옹호하며 비호하는 우리사회의 광신세력들을 보면서 더 이상 어린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정신이 훼손되지 않기를 간구한다.
이제 우리가 승복이 에게 보여주고 자랑해야 할 일은 그 옛날 그 때처럼 산새 지저귀는 운두령 고갯길을 아무런 구김살 없이 평화롭게 오르내렸듯이 우리가 이 땅을 자유와 평화의 세계, 아무런 걱정 없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책무일 것이다. 후회 없는 미래의 삶을 위해서도 우리는 반드시 그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
이 날 그의 추모제에 참석해 그의 묘에 깊숙이 허리를 구부리던 당시 침투 무장공비였던 김익풍씨의 말이 귓전을 스친다. "잘못에는 100배, 1000배로 응징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이승복과 오늘 우리사회를 대비시켜본다. 참으로 씁쓸하고 안타까운 이 현실을.(konas)
이현오(수필가) 님의 글을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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