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에 준하는 류빈(柳濱)의 묘(墓) 종릉(鍾陵)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8]
문수면 승문1리 버드내 마을 ‘종릉’
류빈은 태종(이방원)의 동갑계원으로 절친, 지영주사 하륜의 생질
세종 명으로 한양-영주 관군이 운구, 임금 예우로 ‘종릉’ 하사
조선 왕릉에 준하는 석실·팔각묘, 류빈 후손 문과급제자만 80명
종릉의 주인 류빈(柳濱)
종릉은 문수면 승문1리 버드내(柳川, 종릉로 258) 마을 동녘에 있다. 마을에서 종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두 개 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종릉(鍾陵), 또 하나는 류릉(柳陵)이라고 새겼다. 마을에서 종릉까지는 약 500m쯤 된다. 또 이곳에는 문수면 만방리 ‘종릉’ 마을과 승문리 ‘버드내’ 마을이 있다. 둘 다 류빈의 묘와 종릉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류빈(柳濱, 1370-1448)은 본관이 전주(全州)다. 시조 완산백공(完山伯公) 류습(柳濕)의 손자이고, 고려 때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류극서(柳克恕)의 둘째 아들이다. 1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함경남도)를 지냈다. 고려 말 지영주사(知榮州事, 옛영주)를 지내고 영의정을 역임한 하륜(河崙)의 생질이고, 부인 단양우씨는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낸 우탁(禹倬)의 증손녀이다.
태종의 유언으로 세종이 하사한 종릉
능(陵)이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종릉은 사인(私人)의 묘인데 능이란 이름이 붙어 호기심이 더한다. 류빈의 묘가 능(陵)의 칭호를 받은 것은 태종과의 관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태종(太宗,1367-1422)은 1382년 진사시에 동방급제한 류빈 등 20명과 정미갑계(丁未甲契)를 조직하여 친교하는 등 절친지간으로 조선 개국을 적극 도왔다. 이때 태종대왕어제인물평론에 류빈을 총애한 대목이 감모록(感慕錄)에 나온다. 「柳濱, 事君竭忠 待人克寬 聖明之下 律身極妙(사군갈충 대인극관 성명지하 율신극묘) 류빈은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어질고 밝아 극히 관용하며 몸을 경계함이 지극히 묘하도다」라고 평했다.
태종이 왕위에 올라 “나는 비록 왕이 되었지만 나와 동문수학한 그대들도 똑같이 군졸을 가져야 한다”면서 개국원종공신들에게 벌 100통씩 하사하였다. 그는 또 “그대들이 죽으면 임금과 똑같이 능(陵)으로 만들라”고 했다. 후일 류빈이 졸(卒)하자 생전 유언에 따라 세종 임금이 ‘종릉’이란 칭호를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암(虎巖) 연기설화
종보(宗報)에 실린 호암 연기 설화에 「영흥공(빈)이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꺼내 주자 공을 등에 태우고 밤새 천리길을 달려 지금 직제학공(빈의 아버지) 묘원(안동시 녹전면 속칭 호암)에 내려주었다. 선친의 유택(幽宅)으로 하라는 뜻으로 판단하고 개성에서 운구하여 예장하니 과연 명당이라…
호랑이는 지쳐 묘소 부근에서 죽어 돌이 되니 호암(虎巖, 범바위)이라 하였다. 호암은 지금도 묘소를 수호하고 있으니 깊은 감명을 준다」 이 설화를 보면서 류빈은 죽어 아버지 묘소 곁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풍수가 묘터를 잡았겠지만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류빈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448년 류빈이 수(壽) 79세로 졸하니 조선 왕실은 국풍(國風,왕실지관)을 풀어 전국 명산을 두루 밟게 하여 명당을 찾으니 지금 종릉이다.
한양-영주(500리) 관군이 운구
류빈의 장례는 당시 예법에 따라 한양에서 초장례를 치룬 후 운구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양에서 영주까지 500리 길을 관군에 의해 여러 날 동안 운구했다고 한다. 한편 묘소 현지(종릉)에서는 주변 자연석을 이용하여 현실 석곽, 호석, 상석, 문인석 등 석물을 준비했을 것이다.
당시 관군이 운구했다는 상여는 일제 말까지 종릉재사 인근 곳집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장틀과 포류(布類)는 관리 소홀로 없어지고 연화(蓮花), 각판(刻板), 운용(雲龍) 등 부품이 남아 있으며, 단청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편이다. 현재 소수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릉에 준하는 석물구조
류빈의 묘비 및 석물은 일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2016.10.6)됐다. 이 묘는 조선 초기 고관의 무덤 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이다.
류빈의 묘가 왕릉에 준하는 석물 구조라는 것은 외관상으로 보이는 봉분, 3단 호석, 8방위 면석, 혼유석(魂遊石), 상석, 문무인상 뿐만 아니라 무덤 안 광중(壙中, 현실)을 왕릉과 같이 화강석을 다듬어 석곽(石槨)으로 축조했다는 것이다.
좀처럼 광중 내부를 살펴볼 수 없으나 2008년과 2020년 두 차례 도굴 사건 후 석곽 측면석 이탈 부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광중 내부를 엿볼 수 있었다. 석곽은 지하 3-5m 지점에 축조됐다. 석곽은 사방 3m 정방형이며 높이는 2m 정도 된다. 석곽 속에 목관을 안치하였으며, 공(公)과 부인(덕산윤씨)의 관 사이에는 영혼이 통할 수 있는 창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 왕릉은 세종 이전까지는 석실(石室)로 축조하였으나 1468년(예종1) 예종이 “돌아가신 왕(세조)께서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 석실 대신 회격(灰隔)을 쓰라는 말씀을 남겼으니 회격으로 조성하라”고 명했다.
이에 1469년 세종의 능 영릉(英陵)을 조성할 때부터 회격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회격이란 석회3:황토1:모래1로 배합하여 벽돌을 쌓듯 회곽을 조성한 것을 말한다. 종릉은 영릉보다 20년 앞서 조성하였으니 석실로 축조한 마지막 능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종릉재사(鍾陵齋舍)
능 바로 아래 재사가 있다. 예전에는 능지기가 있어 관리하였으나 지금은 동서남북 4대문을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다. 서쪽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이고, 행랑채 문 안으로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정침, 서쪽에 추원당, 동남쪽은 행랑채로 ㅁ자형이다. 규모나 건축 양식면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3.2.25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됐다.
이 재사는 공(公) 몰 후 158년째인 선조39(1606)년 6대손 경상감사 영순(永詢)이 치산과 함께 묘갈(墓碣)을 세우고 추원재(종릉재사)를 창건했다. 종중의 원로는 “종릉은 1980년대까지 인근 초중학생들의 소풍 장소로 인기가 있던 곳”이라며 “재사는 매년 영천(옛 영주) 군수가 치제(致祭)하고 어사(御使)가 감시하였으나 임진왜란부터 중지됐다”고 말했다.
류빈 후손 문과급제자만 80명
공의 후손들은 조선조를 내려오면서 인물과 학문의 명성을 이어왔다. 공의 둘째 아들 의손(義孫)이 1426년(세종8) 문과급제를 시작으로 무려 80명(장원5인)이 문과급제했다.
또한 공의 후손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구국 활동에 앞장서 임진왜란 때는 소중한 목숨을 나라에 바쳤고, 일제강점기 때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이는 학문에 바탕을 둔 선비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류빈(종릉) 후손 문과급제자를 살펴보면 아들 류의손 예조참판, 손자 류계반 이조참판, 증손 류숭조 성균관대사성, 증손 류헌 대사헌, 증손 류식 부사, 현손 류윤덕 예조참판, 현손 류세린 대사간, 5대손 류신 병조좌랑, 5대손 류감 장령, 5대손 류훈 형조판서, 6대손 류영립 관찰사, 6대손 류영길 예조참판, 6대손 류영부 이조정랑, 6대손 류영경 영의정, -중략- 17대손 류정 홍문관 교리까지 80명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 1550-1608) 6대손은 1550년(명종5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풍기 백골(희여골) 창원황씨에 장가들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아들 오형제와 가솔을 거느리고 처갓집 부근인 순흥 태장으로 내려와 우거(寓居)한 적이 있었다.
이때 둘째 아들이 병으로 죽자 산에 묻고 이자산(二子山)이라 하였고, 아들에 대한 정을 잊기 위해 망정골(忘情谷)이란 지명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후손 일부가 순흥 석교리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종릉 취재에 적극 협력해 주신 공의 후손 류창수(향토사학자) 선생과 류기민 총무이사님께 감사드린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