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승마을 「송상갑(야성인) 고택」 궤짝에서 나온 ‘근대사’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9]
휴천동 야성송씨 고택 궤짝에서 나온 보물
1881년 광승에서 태어나 강명학교·영흥야학·신간회 활동 주역
1919년 일제가 군 관아를 헐 때 자재모아 성저에 33칸 한옥신축
1934년 공회당을 극장으로 개조-최초 영주극장(현 분수대) 개관
근대사 보물을 간직한 궤짝
광승마을 출신 송재승(75,야성인) 향토사연구가는 영주시민신문 애독자다. 신문을 받으면 먼저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를 본다는 송씨는 ‘우리 집에도 숨겨진 보물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창고에 숨겨둔 할아버지의 궤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영주시민신문에 연재되는 ‘숨겨진 보물’에 자극받아 창고에 숨겨 두었던 할아버지의 궤짝을 뒤져서 근대사 사진, 문서, 서책 등 다수를 찾아냈다」고 적었다.
그리고 다음날(9월 13일) 기자는 광승마을 기려자송상도 생가 터에서 송 씨를 만났다.
송씨는 “상(相)자 갑(甲)자 할아버지는 1881년 이곳 광승에서 태어나셨다”며 “기려자송상도(1871-1947) 선생과는 족친사이로 앞뒷집에 살면서 자연스레 ‘충효예’에 대한 교유가 깊었다는 이야기를 조부님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1940년 송상갑 할아버지의 회갑기념사진
1920년대 성저마을 ‘송주사댁’ 사랑채 앞
“송상갑 할아버지는…”
광승의 야성송씨는 시조 맹영(孟英)下, 14세 현령공(縣令公,휘:륜綸,파조)下, 15세 영주입향조 눌재(訥齎) 송석충(宋碩忠,1454-1524)下, 16세 눌재의 4남 송칭(宋偁 ,4파-광승파)의 후손들이다. 시조의 26세손인 송상갑(宋相甲,1881-1954)은 자는 보형(輔衡)이며, 아버지(源永)·어머니(연안김씨) 사이 장남으로 광승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선대로부터 유학의 기초를 익혔고, 1896년 갑오개혁 이후 신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조선말 통신원주사(通信院主事)를 지냈다. 송재승씨는 “궤짝 속에서 나온 각종 서적과 사진, 문서 등을 통해 당시 조부님께서 하신 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특히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애쓰신 일들, 신간회(항일단체) 간부로, 금융조합 이사로 활동한 내력 등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됐다”고 말했다.
1934년 도민증·자동차면허증
1934년 조선소작관계법규집
천석꾼 부호의 아들
휴천동 광승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마을 앞은 평야다.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물고기가 뛰어오른다 하여 넓을 광(廣)자에 오를 승(昇)자를 써 광승(廣昇)이라 했다. 한편 영주지에는 광승(廣升)을 되 승(升)자를 썼는데 쌀이 많이 나는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송상갑의 선대는 천석꾼 부호(富豪)였다. 나귀를 타고 농감을 했고, 토지는 영주 남산들을 비롯하여 봉화 상운구천들, 안정들, 예천 감천들 등 널리 분포됐다고 한다.
송재승씨는 “궤짝에서 소화 9년(1934)에 발간한 조선소작관계법령집 등 당시 서류들이 다수 나왔다”며 “일제가 공출(供出,강제로 거둠)을 강요할 때 지역농민들의 애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농감위원으로 활동하셨다는 이야기를 고모님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군(郡) 관아 헐 때 자재모아…
1910년 한일합방 후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풍기군·순흥군이 영주군으로 통폐합됐다. 일제는 1919년 현 영주초 자리에 있던 옛 영천군의 관아(官衙) 동헌(東軒)을 학교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헐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기서 나온 목재를 땔감으로 쓰기위해 다투어 가져갔다. 안타까운 광경을 보고 있던 송상갑은 목재와 기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 읍성(龜城) 북동쪽 당시 성저동(城底洞,현 구역앞) 논 가운데에 ㅁ자형 33칸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 집을 ‘송주사댁’이라 불렀고, 이 집을 기준으로 도로가 생기고 집들이 한 집 두 집 들어서면서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그 후 1936년 6월 13일 중앙선 영주역이 읍성아래(성밑)으로 결정됐다. ‘송주사댁’ 서쪽 50여m 지점에 영주역사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송재승씨는 “조부님께서 이 집을 지을 때는 헐리는 관아의 자재를 어디엔가 보존하고자 했고, 이 집을 교육사업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곳이 시가지의 중심이면서 역 바로 앞이 됐다”면서 “세월이 흘러 이 집은 도시계획에 의해 1993년 영주시에 매각됐고, 1995년 철거되었는데 옛 동헌의 초석과 목재, 기와는 단산면 사천리 소재 백산서원 증축자재로 기증했다”고 했다.
부(富)로 학(學)을 꽃피우다
송상갑은 선대가 일구어 놓은 부(富)를 신교육 도입사업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등 영주에 학(學)을 꽃피운 신교육의 선구자로 역사는 기록했다. 개화기 이래 경술국치(1910년)를 전후하여 영주에서도 신교육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때 가장 먼저 뜻을 모은 단체가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다. 고종43년(1906) 순흥면 내죽리에 사립 소흥(紹興) 학교가 세워지고, 2년 뒤 풍기에 사립 안정(安定) 학교가, 영주에는 사립강명학교(私立綱明學校)가 개교되면서 이 지역에도 신교육이 시작됐다. 이 때 선도적으로 활동한 교남교육회 인사로는 이병헌(李秉憲), 김숙(金塾,1896-전 풍기군수), 송상갑(宋相甲,통신원주사), 김인식(金仁植,군서기), 김홍규(金洪奎,진사) 등이다. 이들은 1908년 읍성아래 향서당(鄕序堂,현포교당)에 사립강명학교를 설립한다. 영주 최초의 학교다. 이 때 송상갑 등 회원들이 학교설립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지원했다. 이 후 신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더욱 고조되어 1911년 4월 1일 사립강명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하게 된다. 이 때 교사(敎師), 교실, 학생 등 교육주체가 향서당에서 영주향교로 옮겨지게 됐고, 최초 공립학교인 ‘영주공립보통학교’가 영주향교에서 개교하게 됐다.
영흥야학·학술강습회 설립
「영흥노동야학회는 1920년 8월 9일 송상갑이 창설했다」고 ‘영주독립운동사’에 기록했다.
영흥야학회는 지식계발, 저축장려, 품성향상, 위생향상 등을 교육목표로 주경야독하는 어려운 학생을 대상으로 한글과 한문, 수신, 산술, 농업 등 교과목을 가르쳤다.
또한 1920년 10월 송상갑 외 여러 유지들의 발기로 영주학술강습회를 조직하고 당국의 인가를 얻어 일어, 조선어, 한문, 지리, 역사, 산술 등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신문기사에 「고명한 강사를 초청하여 열심 교수하였던바 학생들이 100여명에 달해 신교육 보급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문화발전에 반하여 유일한 교육기관인 영주공립보통학교가 협소하고, 입학자가 급증하여 지원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학술강습회를 설립 하게 됐다」고 했다.
송재승씨는 “조부님께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한 사건들이 ‘영주시사’와 ‘영주독립운동사’에 전해지고 있다”며 “그 외에도 경비헌납, 도로부지 희사, 학교실습지 기부 등 물려받은 부(富)를 신교육 발전을 위해 대부분 쓰셨다고 족친들이 전했다”고 말했다.
1934년 영주극장 모습
1957년 영주극장 모습
1975년 영주극장에서 장학금 수여식
영주 최초 영주극장 개관
세계 최초 영화 상영은 1895년 프랑스 파리, 한국의 최초는 1919년 서울 단성사, 영주 최초는 1934년 영주극장이다. 이 무렵 송상갑은 사재를 털어 일제가 설립한 공회당을 인수하여 극장으로 개조한다. 장남(정섭正燮)을 일본에 보내 영사기, 음향기기 등을 사오게 했다. 초창기에는 신파악극, 변사가 등장하는 무성영화로부터 시작했다. 1950년 6.25전쟁 중 북한군이 극장을 점령하여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교육장소가 되기도 하였고,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영사기 등 주요 기기를 가지고 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송상갑의 아들 3형제(정섭,현섭,수환)는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끝내 소식이 없었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상이군인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55년 재 설립하여 제대로 된 영화관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1966년 장손 송재승이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극장을 운영하면서 1960-70년대 극장전성시대를 펼쳤다.
당시 영주극장은 선대의 장학(獎 學) 정신을 이어받아 영주 최초로 문화장학회를 설립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초중고 학생 20여명을 선발하여 각 5천 원씩 장학금을 지급했다.
송재승씨는 “1970년대까지 영주에 장학회는 전무했다”며 “당시 극장입장료가 120원일 때 5천원을 지급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50만 원 이상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1481년(辛丑)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
1998년 야성송씨 광승세거지지비
500년 전 계모임 그림도 나와
궤짝 속 서책 중 눈에 띄는 그림 한 장이 있다. 정자에 갓 쓴 선비 다섯 명이 앉아있고, 그 우측에 ‘好賢坊(호현방)’ 좌측에 辛丑八月八日(신축8월8일)이라고 쓰여 있다. 정지교부계회도(情志交孚契會圖)다. 학문에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계모임을 하는 그림이다.
송재승씨는 “이 그림은 눌옹유사(訥翁遺事)에 나오는 것으로,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이신 눌옹 선조님께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생원 김굉필 집에서 생원 송석충, 진사 최부, 진사 박담손, 진사 신희연 등 25-6세 젊은 학사 다섯 분이 둘러 앉아 정지교부계를 맺는 장면”이라며 “김굉필(한훤당)이 직접 쓰고 그린 5벌의 계회도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신축년은 1481년이고 호현방은 서울 중구 회현동이다. 지금으로부터 539년 전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원식 기자 lwss04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