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가 평생 공부한 것을 거르고 짠 결정체 「성학십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8] 소수박물관 소장 ‘성학십도’
성학십도-소수박물관 1층 기증유물전시실
성학십도 병풍-소수박물관
새로 지은 이산서원-이산면 석포리
이산서원 구지 (남간로 세영첼시빌 101동 앞 50m 지점)
괴헌고택 ‘고물’-성학십도 보관창고(상단 액자 뒤)
퇴계가 성리학 기본개념을 열장의 그림에 담아 선조에게 올린 글
소고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경비마련-이산서원에서 목판 새겨
그 속에 ‘선비정신의 핵심’이 들어있어 ‘영주 선비들이 꼭 읽어야’
1568년 겨울,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68세 때 그동안 자신이 익힌 성리학의 기본개념을 열장의 그림에 담아 17세 어린 왕 선조에게 올렸다.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서 452년이 지났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해묵은 사상을 끄집어내보려고 하는 것은 ‘선비정신의 핵심’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주 소수박물관은 퇴계 학문의 결정체인 성학십도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소수박물관 소장 성학십도 목판(수장고 내 사진)
성학십도(聖學十圖) 목판(木版)
퇴계 이황 영정
이산서원지(伊山書院誌)에 「1572년(선조5)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이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퇴계의 ‘무진봉사(戊辰封事,임금에 올린 글)’와 ‘성학십도’를 합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도록 경비를 영천(榮川ㅌ) 군수 허충길에게 보내어 발간토록 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1572년 이산서원에서 최초 목판이 새겨지고 판본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 목판은 이산서원에서 보관해 왔으나 1871년(고종8) 서원 훼철령(毁撤令)에 의해 괴헌고택으로 옮겨져 다락방 고물 속에 비밀리 보관해 오다가 2004년 소수박물관에 기증됐다. 몇 해 후 2009.8.31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17호로 지정됐다. 향토사학자들은 “역사적 가치로 볼 때 국가지정문화재(寶物)로 승격 지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성학십도는 1책 목판본으로 ‘퇴계문집’ 중 내집(內集) 제7권 차(箚)에 수록되어 있다.
‘성학십도’라는 명칭은 본래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라고 수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진·차·병·도 글자를 생략해 ‘성학십도’로 명명되고 있다. 진(進)은 성학십도의 글을 왕(王:宣祖)에게 올린다는 의미이고, 차(箚)는 내용이 비교적 짧은 글을 왕에게 올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병도는 도표(圖表)를 글과 함께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십도(十圖)는 태극도·서명도·소학도·대학도·백록동규도·심통성정도·인설도·심학도·경재잠도·숙흥야매잠도 등 10가지이다.
책으로 보는 성학십도-제10도
퇴계가 선조에게 올린 글
1565년 퇴계(65세)는 세상의 비방을 떠나 도산(陶山)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명종은 다시 퇴계를 불렀다. 이듬해(1566) 정월, 퇴계는 소명에 응해 서울로 출발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영천(옛 영주)에서 조섭(調攝,음식조절 등)하고 풍기에서 머물다 돌아왔다. 1567년 6월 명나라 사신 대적을 위해 상경하였지만 명종은 서른 초반에 세상을 떠난다. 퇴계는 대궐에 들어가 곡배(哭拜)하고 귀향한다. 그리고 새로 등극한 선조도 퇴계를 불렀다. 1568년 7월, 군왕의 일을 충고하는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린다. “사적인 인연보다 국사의 공공이 더 중요하다”며 “성학을 닦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퇴계는 선조가 자신의 말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퇴계는 다시 물러가기로 작정하고, 간절한 충정을 담아 ‘성학십도’를 올린다.
선조께 올린 글은 “판중추부사 신 이황은 삼가 재배하고 말씀을 올립니다”로 시작하여 “신은 그윽히 생각건대, 도(道)는 형태가 없고 하늘(天)은 말씀이 없습니다”로 이어진다.
글이 길어 요지를 간추리면 「‘군주의 마음은 만 가지 결정이 나오고, 백 가지 책임이 모이는 곳이다.’, ‘스스로를 위대한 척 거만을 떨고 방종을 일삼다가 마침내 나라를 망친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치를 깨닫게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게 된다.’, ‘쉬지 않고 노력하여 내 잠재력을 다해 나가면 마음(心)이 인간성(仁)을 어기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등 이다. 성학십도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제1 태극도(太極圖)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라” 태극도는 염계 주돈이가 글과 그림을 모두 만든 것으로, 우주의 근원인 태극과 음양의 변화, 그리고 오행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과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퇴계는 “근사록 첫머리에 나오는 ‘태극도설’를 통해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의 실마리를 찾고, 그 다음에 ‘소학’과 ‘대학’을 읽어서 학문을 점차 넓혀야한다”고 했다.
제2 서명도(西銘圖)
“천지 만물과 하나 되라” 서명도는 북송 때 사람인 장횡거(장재)가 쓴 ‘서명(西銘)’을 보고 원나라 때 사람인 정복심이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퇴계는 성인이 되는 학문으로 ‘서명’을 선택했고, 성학의 내용은 곧 인(仁)이라고 생각했다. 퇴계는 “분별을 명확하게 하고 인(仁)을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제3 소학도(小學圖)
“일상적인 일에 충실하라” 소학도는 주자가 저술한 소학(小學)이라는 책을 도표로 그린 것이다. 소학의 공부 방법은 물 뿌리고 청소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집안에 들어와서는 공손하여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 등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야할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는 “어렸을 때 참 모습을 배우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는 더욱 힘들어 진다”고 했다.
제4 대학도(大學圖)
“수신으로부터 시작하라” 대학도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이라는 책을 조선초기의 성리학자 권근이 그림으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퇴계는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라며 “소학을 통해서 실천해야 할 행동 규범을 배우고, ‘대학’을 통해서 자신을 수양하여 집안과 국가를 잘 다스리고, 나아가 인류를 안정시키는 것을 포부로 삼아야한다”고 했다.
제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인간이 되는 학문을 하라” 백록동규도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규범의 목차를 퇴계가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퇴계는 “먼저 오륜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며 “학문이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밝히고, 그대로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마음을 바르게 하라” 심통성정도는 글과 그림 중 상도를 정복심이 만든 것인데, 퇴계가 중도와 하도를 보완한 것이다. 퇴계는 “심통성정은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제한다는 뜻”이라며 “중요한 개념은 마음과 본성, 감정이다. 마음이란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주인이다. 마음은 본성과 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제하고 포섭하는 역할도 함께 한다”고 했다.
제7 인설도(仁說圖)
“인(仁)을 본체로 삼아라” 인설도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글과 그림을 모두 만들었다. 인(仁)이란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쉽게 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퇴계는 “인간에게는 네 가지 덕이 있는데 바로 인의예지”라며 “그 가운데 인은 나머지를 모두 포괄하는 가장 중요한 덕이며, 인(仁)의 발현이 곧 사랑의 실현”이라고 했다.
제8 심학도(心學圖)
“잃어버린 본심을 찾아라” 심학도는 정복심이라는 학자가 글과 그림을 모두 만든 것이다. 유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타고난 선한 마음이므로 이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퇴계는 “인간의 선한 마음은 사회생활 속에 욕심에 물들어 악한 모습을 띠기도 한다”며 “항상 경(敬)으로 몸과 마음을 잘 통제하여야한다”고 했다.
제9 경재잠도(敬齋箴圖)
“경(敬)의 세부 항목을 실천하라” 경재잠도는 주자가 쓴 ‘경재잠’이라는 글에 왕백이 그린 그림을 그린 것인데, 주자는 이 글을 자신의 서재에 걸어놓고 항상 경계했다고 한다. 퇴계는 “모든 것은 경을 통해 이루어진다”면서 “움직일 때나 고요하게 있을 때나 항상 경을 간직해야 한다. 만약 경을 잃게 되면 욕심이 생겨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다”고 했다.
제10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라” 숙흥야매잠도는 진백이 글을 쓰고 퇴계가 그림을 그린 것이다. 주자는 이 글을 자신의 서재에 걸어놓고 항상 경계했다고 한다.
퇴계는 “‘숙흥야매’라는 말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잔다는 뜻인데, 그만큼 시간을 아껴서 학문에 전념해야한다는 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