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암 절벽에 아슬아슬 걸터앉은 ‘문수사(文殊寺)’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17] 문수면 월호리 ‘문수사’
신라 때 창건한 방석사지(放石寺址)에 세워진 절집
처음 보는 순간 아슬아슬한 절집구조에 놀라기도
옛 방석사 보물들, 화단·돌담·계단·절간으로 흩어져
문수면 월호3리 문수사 전경
방석산 문수사
방석마을 표석
문수면 방석마을 문수사
문수사(文殊寺)는 문수면 월호3리 방석(放石) 마을에 있다. 영주에서 내려가는 서천과 봉화에서 흘러 온 내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서북쪽 방향 산속에 숨어 있다.
옛 승문역 노트리 승강장에서 강 건너 산등성이에 위치한 문수사는 꼬부랑 산길을 돌고 또 돌아야 겨우 찾을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안내드리면 문수면소재지에서 문수역 앞을 지나 서천 강변도로를 따라 무섬방향으로 간다. 학가산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뻗은 이 길은 중앙선철길과 강변길이 나란히 내려가는 정답고도 아름다운 길이다. 약 3km 가량 내려가다 보면 노트리 마을로 건너가는 큰 다리가 보인다. 승평교(노트리교)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옥천전씨 집성촌 노트리 마을이고, 이 마을 아랫쪽을 지나 언덕길 100여m를 휙 오르면 ‘소풍가든’이란 큼직한 간판이 보인다. 여기서 우측으로 꺾어 1km쯤 가면 작은 마을이 나타나는 데 이 마을이 방석(放石)마을이다. 절은 방석마을 뒷산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다.
아슬아슬 대웅전
문수초 회단으로 옮겨진 사천왕상
절 계단석이 된 옛 절의 주초석
절벽에 걸터앉은 문수사?
마을에서 절집으로 오르는 길은 멀지는 않지만 지그재그 길을 올라야 한다. 숲속 길로 접어들면 한적함과 함께 진한 솔향이 스며든다. 한 구비 돌고 두 구비 돌아서면 솔숲 사이로 요사체가 보인다. 차를 세우고 절집을 쳐다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으악!-’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바위산 낭떠러지 밑에 절집이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가 또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바위 전체가 무시무시하게 생겼는데 스님의 눈으로 보면 “사천왕상이 절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할 것 같다.
인적 없는 문수사에 차문 닫는 소리 나자 기도에 정진하던 스님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탐방객을 맞는다. 스님은 “이 절은 조용히 기도하고 공부하는 절”이라며 “알릴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문수암과 삼성각
범종각
제비집처럼 절벽에 붙은 절집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대웅전으로 오른다. 바위 낭떠러지 옆으로 난 계단을 갈 지(之)자로 올라야 한다. 계단 첫머리 발밑에 옛 절의 주춧돌로 보이는 검은 돌이 두어 개가 보인다. 또 돌계단을 다 오르면 사람 키만한 사각 돌기둥이 보이는데 옛 절이 남긴 장대석이라고 한다.
큰 바위가 상하로 층을 이룬 좁은 공간에 자리 잡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아한 규모다. 그 안에 석가모니부처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 보니 지붕을 바치는 서까래가 바위에 맞닿아있다. 바위의 위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대웅전 남쪽 벼랑 밑 20여m 거리에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 앞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절집이 문수암 절벽에 걸터앉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낭떠러지에 붙어있는 제비집 같기도 하다. 그 아슬아슬함이 문수사의 매력이라고들 말한다.
삼성각 아래층에 범종각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와 범종각으로 갔다. 사람 키 보다 큰 범종이다. 불기 2535년(1991) 건립한 범종에는 천녀(天女)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발원문과 시주자 1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옛 방석사지에 세운 문수사
통일신라 때 창건된 방석사(放石寺) 사지(寺址)에 세워진 문수사는 1970년대 초 영주시내에 사는 ‘안약국’이라는 여성보살(안승규)이 이곳 부지를 매입하면서 중창이 시작됐다고 전해온다. 이 절은 1974년 오재선(吳載善, 법명:靑河) 스님에 의해 중창됐고, 문수면(文殊面) 문수암(文殊岩) 아래에 있다 하여 문수사(文殊寺)라 칭하게 됐다.
이 마을(노트리 옥천전씨) 고 전두영 어르신(당시 89세, 2017.11.28 인터뷰)은 “문수사리(文殊師利)께서 이 바위에서 공양을 하였다하여 문수암이라 전해오는데, 이제 그 전설도 아는 이가 별로 없다”며 “부석사개연기(浮石寺改椽記)에 「1357년(왜병) 적병화(敵兵火)로 무량수전 소실」이란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이 때 방석사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옛날 탑의 잔해 등이 두 바위 사이에서 낙엽에 덮여 있는 것을 1960년경까지 보았는데, 지금은 낙엽과 흙이 두껍게 쌓여 보이지 않으니 현재도 그 속 어디엔가 남아 있는지?”라고 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옛 방석사(放石寺)는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영주지역에는 부석사, 응석사, 방석사 등 3석사가 있었고, 여기에 흑석사와 유석사를 더해 5석사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방석사는 그 연원 등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창건 연대 등 역사성을 찾아 볼 수 없어 아쉽다. 절집 내에는 1960년대까지 3층 석탑의 탑재, 신중상이 새겨진 면석편(面石片), 석불좌상, 기단석(주춧돌)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방석마을 전시영(70)씨는 “어릴 적 절터 바위틈에서 놀았는데 바위와 바위 사이(현 대웅전)에 비스듬히 넘어진 탑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 없더라”고 했다.
돌무더기에서 나온 옛 절의 흔적들
옛 방석사가 남긴 보물들
송지향 선생은 향토지에 「옛 절터에 탑재(塔材)와 석조물이 흩어져 있다. 탑재는 두 대의 안상(眼像)이 새겨진 하층 기단 일부와 사천왕(四天王) 상이 면석에 새겨진 상층기단 일부인데 이 상층기단은 문수중부초등학교(적동) 뜰에 옮겨져 있다. 마을 부근 돌무더기 속에 많은 탑재들이 묻혀 있다고 하니, 이들을 모아 복원하면 우수한 조각을 갖춘 좋은 탑이 되리라고 본다」고 적었다. 또 「방석마을과 노트리 마을 사이 야산에 ‘윤절’이라는 절터가 있다. 여기는 기왓장만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은 없다. 윤절에서 서천을 사이에 두고 그 동쪽 ‘돌절’ 마을에도 절터가 있다. 속칭 ‘돌절’이라고 하는데 여기도 다른 유물은 없다」고 썼다.
방석마을 함창김씨 어르신들은 “1970년대 새마을 사업 때 많은 석재유물 조각들이 땅에 묻혔다”며 “절 아래쪽 마을 곳곳에서 주춧돌 등이 여럿 발굴되는 것으로 봐서 마을 전 지역이 방석사지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무관심 속에 흩어진 보물들
방석마을 출신 김서원(66,단양) 씨가 문수향우회에 올린(2009.9.9) 글에 보면 「초등학교 다닐 적(1960년대) 방석사지 절터에는 부처상들이 수십 개 즐비하게 줄지어 있었어요.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 부처상에 금줄을 치고 자식들의 복을 빌기도 했지요. 먹고 살기에 급급했고 옛 문화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 동네 사람들은 “그 깐 돌부처들 간수해서 뭐하냐?”며 누구하나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요. 그 무렵 마을 유지들이 동네 힘 있는 장정을 시켜서 “지게로 한 개 옮기는데 20원 줄게”하는 식으로 10여점의 불상이 옛 문수초등학교(와현)로 옮겨지게 됐어요. 그 후 모두의 무관심속에 어디론지 하나둘씩 없어지고 딸랑 하나 남은 사천왕상은 적동리에 있는 문수중부학교로 옮겨졌다고 하네요. 그리고 가장 최근까지 문수사 대웅전 자리에 있었던 탑재마저도 장비를 동원해 이동해 갔다니 기가 막힐 일」이라고 썼다.
김서원 씨는 지난달 25일 전화통화에서 “옛 방석사지의 유물들을 지키지 못해 지금도 아쉽고 부끄럽다”며 “영주시민신문에서 그 내력만이라도 찾아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했다.
낭떠러지 아래 요사채
방석마을에서 나온 주줏돌들
곳곳에 흩어진 보물들
옛 절터는 문수면 월호리 산68번지(승평로 117번길)에 있다. 「한국의 사지」에는 ‘월호리 사지’라는 항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옛 방석사는 이 마을 전체와 현 문수사까지 가람배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옛 절의 석재들은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돌이 되기도 하고, 법당 옆 산신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스님은 ‘정 맞은 돌’이라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던 돌을 요사채 앞에 모아 두었다. 이 절에 남아 있던 사천왕상은 옛 문수초(와현) 화단으로 옮겨졌다가 문수초가 폐교되는 바람에 문수중부초(현 적동리 문수초)으로 옮겨져 중앙 현관 앞 화단에 있다. 이 면석은 폭 63cm, 높이 57cm, 우주폭 15cm인 서천왕상인데 9세기 중반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방석마을 밭둑가에 뒹굴던 탑재나 주줏돌은 이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옮겨 담장을 쌓기도 하고 축사 축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느 집에는 샘가 빨랫돌이 되기도 하고 어느 집에는 화단 장식돌로 쓰이기도 한다.
옛 방석사의 흔적들이 곳곳으로 흩어져 아쉽지만 또 다른 어떤 절집으로 가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