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절신 휴계 전희철의 충정과 절의, 연꽃으로 피어나다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1] [탐방일:2020.5.29]
이산면 용상골 ‘칠성루·휴계재사’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옥천으로 낙향
1457년 가솔을 이끌고 처가 곳 영주 휴천에 숨어살며 절의 지켜
휴계 후손, 용상골에 3,500평 연꽃정원 만들어 시민휴식처 제공
칠성루와 휴계재사가 보이는 용상골 전경
칠성루
휴계재사
휴계의 묘
칠성루 야경
용상골에 숨겨진 보물 ‘칠성루’
칠성루기(七星樓記)에 「살아서는 칠성(七星)을 받들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히었더니, 후손이 그 숨은덕을 나타내고 그윽한 빛을 게시해서 깊은 충정(忠情)과 숨은 절의(節義)를 북극성처럼 빛나게 함을 이 누각을 통해 볼 수 있도다」라고 썼다. 선조의 충절과 후손의 모범을 잘 나타낸 글이다.
영주 원당로 술바위사거리에서 이산면 방향으로 충혼탑-둘구비를 지나 고갯길을 오르면 T자형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 관광표지판에 ‘칠성루·휴계재사’로 가는 길이 안내되어 있으나 찾기 힘들다. 박봉산 등산로 방향으로 난 농로를 따라가다가 산길로 접어들어 한 고개 두 고개를 넘으면 용상1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100여m 더 가면 10시 방향 칠성산 중턱에 칠성루와 휴계재사가 보인다.
칠성루와 휴계재사는 경북도유형문화재 제174호다. 칠성루는 단종절신 휴계 전희철(全希哲,1425-1522)의 유덕을 추모하여 그의 5대손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가 세웠고, 휴계재사(休溪齋舍)는 휴계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그의 증손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가 건립했다. 지금은 휴계의 19세손 전윤구(全胤九,59) 망동파 종손이 칠성루 아래에 있는 논에 대규모 연꽃정원을 만들어 영주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선조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한 선양사업으로 우리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다.
문종·단종 때 상장군에 오르다
전희철의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이다. 그래서 영주에 사는 후손들은 ‘휴계할배!, 휴계할배!’라고 부른다. 그의 아버지 예(禮)는 부녹사(副錄事) 벼슬을 지냈고, 어머니는 상산김씨로 부정(副正)을 지낸 상보(尙保)의 따님이다. 1425년(세종7) 충북 옥천 시랑리(侍郞里)에서 태어난 그는 강직한 성품에 재주가 뛰어나고 넓은 도량에 기상이 활달했다고 전한다. 후손 전진만(종친회사무국장) 씨는 “할배 묘비에 「性素剛直克守儉約(성소강직극수검약)」이라고 적혀 있다”면서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전희철은 일찍이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세종 20년간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포서별제를 역임하였으며 문종과 단종 때는 왕실을 수호하는 어모사직을 지냈다. 특히 문종은 국사를 공정하고 성실하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높은 인품까지 겸비한 전희철을 매우 총애하여 벼슬이 상장군에 이르렀다.
단종을 향한 애끓는 충정
아버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단종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보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1) 10월 황인보 등을 죽이고, 1455년(단종3)에 왕위를 찬탈한다. 가까이에서 이 사건을 지켜본 전희철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30세 젊은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게 된다.
2년 후 1457년(세조3) 전희철은 가솔을 거느리고 경상도 영천(榮川, 옛 영주) 땅으로 옮겨와 휴천(休川)에 자리 잡는다. 영천은 그의 처가 곳이기도 하지만 그가 고향을 떠나 영천으로 오게 된데는 깊은 까닭이 있었다. 바로 그 전 해인 1456년 6월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세조는 이 사건에 단종도 관련됐다하여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귀양 보내고, 아우 금성대군도 연루되었다하여 순흥으로 귀양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전희철은 영월에 가깝고 순흥이 지척인 영천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단종을 향한 절의를 지키고자 했던 그는 단(壇)을 쌓은 후 밤마다 의관을 단정히 하고 영월을 향해 절하면서 단종의 평안을 빌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금성대군의 제2차 단종복위 거사(정축지변)가 밀고로 실패하게 된다.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처형하고 단종 또한 사사(賜死)한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단종의 붕어(崩御,임금의 죽음) 소식을 들은 전희철은 3년간 상복을 입고 부모 시묘살이 하듯 애통해 했다. 세월이 흘러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손들에게 화가 미칠까 시문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그러고 나서 후손들에게 “1년에 한 번씩 단종의 능을 배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그의 충절을 짐작할만하다.
휴계와 교유한 영주 선비들
영천으로 이거하여 휴천 변 초곡에 은거한 그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당대의 명사 김담(金淡,1416-1464) 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춘추를 강명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의 호 휴계(休溪)도 이때 지은 것이다. 당시 영천의 동쪽을 흐르는 내(川)를 ‘휴천’ 또는 ‘휴계’라 불렀기에 이에 따른 것이다. 옥천전씨 문중 전진만 씨는 “휴계할배께서 단종사건 때 영주로 오셔서 처음 터 잡은 곳이 처가가 있는 ‘초곡’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자신의 호를 ‘휴계’라 한 것은 초곡 앞을 흐르는 내 ‘휴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휴계의 부인은 감천문씨다. 문과 급제로 판관(判官)을 지낸 문손관(文孫貫)의 딸이다.
문손관은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조부이다. 그래서 휴계의 부인과 창계는 고모와 조카 사이가 된다. 당시 초곡은 감천문씨 세거지로 정치, 교육,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농협파머스마켓에서 시청방향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이지만 당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역 유명 인사들이 초곡으로 장가들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단종 절신 휴계 전희철을 비롯하여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 장응신(張應臣), 김해허씨가로 장가든 퇴계 이황, 고창오씨 영주 입향조 죽유 오운(吳澐),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 눌재 송석충 등이다.
휴계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김담의 아들 김만칭(金萬秤)에게, 2녀는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 송석충(宋碩忠)에게, 3녀는 도사(都事) 유탄(柳坦)에게 각각 출가시켰다.
당시 휴계와 관련한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문손관의 사위는 휴계 전희철이고, 전희철의 사위는 눌재 송석충이다. 또 송석충(야성인)의 사위는 졸재 권오기(영천군수 역임)이고, 권오기(예천인)의 사위는 소고 박승임(반남인)이다.
3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긴 세월을 휴천에 은둔했던 전희철은 만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호군(通政大夫護軍)에 올랐다. 1522년(중종6) 8월 3일 몰하니 향년 97세였다.
연꽃정원
휴계 선생 추향제
휴계의 충절 연꽃으로…
전윤구 망동파 종손
용상골은 조선시대 때 영천군 어화면(於火面) 지역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용상리가 됐다. ‘용상골’이란 지명은 휴계 선생의 묘가 임금이 용상(龍床)에 앉은 형태라 하여 용상골(龍床谷)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 용상골은 옥천전씨 휴계 후손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으로 성역화사업이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용상골이 온통 연꽃으로 만발하니 휴계의 절의가 연꽃으로 피어난듯하다. 휴계 선생의 충정(忠情)과 절의(節義) 정신을 이어받은 전윤구 망동파 종손은 사비를 들여 여름이면 연꽃정원을, 겨울이면 얼음설매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시내 구성오거리 서울뚝배기에서 만난 망동파 종손은 “10여 년 전부터 휴계 선조님의 충정과 절의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선양(宣揚) 사업을 추진해 왔다”면서 “산골 오지마을이라 찾아오기가 힘들고 홍보 또한 미미했다. 볼거리 먹거리에 이어 휴계의 정신을 알리는 팜플랫 제작 등 가볼만한 곳이 되도록 노력 중”이라고 했다.
옥천전씨 종친회 전진만 사무국장은 “윤구 망동파 종손은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국가보조 한 푼 없이 시민들에게 좋은 선물을 제공하고 있어 문중에서도 칭송이 자자하다”며 “저희 후손들은 칠성루와 휴계재사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휴계의 정신’이 계승·발전될 수 있도록 힘을 모을 것”이라고 했다.
목공예 체험실
행운의 언덕과 충절의 소나무
행운의 언덕에 오르면
칠성루로 오르는 길목에 소나무 몇 그루가 우뚝하다. 충절의 소나무다. 그 푸르름은 아마도 휴계의 절의를 상징하는 듯하다. 소나무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 연꽃정원을 관리하고 있는 이영설(53,茶연구가) 씨를 만났다. 이 씨는 “이 언덕을 ‘행운의 언덕’이라 한다”며 “여기서 행운을 찾는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단위 회원을 모집하여 고택체험, 차만들기체험, 다도체험, 목공예체험, 먹거리체험 등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6월부터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행운의 언덕에는 오만송이 야생화가 피어 있고 체험학습장도 있다.
행운의 언덕에서 칠성산을 바라보면 휴계의 묘소가 용상같이 보인다. 그의 총명한 재주와 씩씩한 기상을 본받을 수 있다. 언덕 아래 논에는 3,500평 연꽃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겨울이면 얼음썰매장으로 변신하여 아이들에게 신나는 겨울을 선사한다.
후손 전효우(56)씨는 “칠성루와 휴계재사를 둘러본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귀한 보물을 보았다”며 “어디에 가도 이런 귀한 건축물을 만나보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칠성산 뒤로 보이는 박봉산은 대동여지도에 봉산(烽山)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에 「奈解尼師今 二十九年秋七月(내해이사금 이십구년추칠월) 伊伐飡 連珍 與百濟戰(이벌손 연진 여백제전) 烽山下破之殺 獲一千餘級(봉산하파지살 획일천여급). 내해이사금 29년(224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烽山)’ 하에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살육하거나 포획했다」는 기록이다. 박봉산에 오르면 사방이 훤히 보인다. 타임머신을 타고 삼국시대로 가보자. 신라의 이사금왕이 되어 봉산에 올라 백제군과 전투를 지휘해 보는 것 또한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까.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