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무이구곡시에서 차운한 송인기의 성잠촌 묘사시 10수
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10] [탐방일:2020.5.15]
송인기의 성잠촌 묘사시 10수
성잠촌은 한정교 건너 하한정 남쪽 성봉 아랫마을이다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구곡의 경치를 묘사하듯
송 선비는 성잠촌 산하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남겼다
성잠촌 10경(十景) 위치도
중국 동주에서 공자(기원전551-기원전479)가 탄생했고, 남송에서 주희(朱熹,1130-1200) 곧 주자(朱子)가 태어났다. 주나라의 공자가 태산에서 유학을 창시하듯 남송 때 주희는 무이산에서 신유학인 주자학을 성립했다. 고려 말 안향(1243-1306)이 원나라에 가서 학풍을 견학하고, 직접 주자서를 베껴와 주자학(朱子學,성리학)을 널리 퍼뜨렸다. 그 후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이 주자가 머물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을 찾았고,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읊으면서 그를 흠모했다. 조선말 영천(옛 영주) 성잠촌(聖岑,성지미)에 살았던 송인기(宋寅箕,1873-1956) 또한 주자를 흠모한 성리학자로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에서 운자를 따 성잠촌 주변 10경(十景)을 묘사한 시(詩) 10수(十首)를 송천시고(松泉詩稿)에 남겼다. 송인기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주범(疇範), 호는 송천(松泉), 심원당(心遠堂) 송대년(宋大年.1589-미상)의 10세손이다.
1. 송천정사(松泉精舍)
河山淑氣地鍾靈(하산숙기지종령) 산하(山河)의 맑은 기운과 땅의 영기(靈氣) 모아져서, 卜得林泉物外淸(복득림천물외청) 산림 천석을 점칠 수 있어서 세속을 맑게 벗어났네. 巷僻谷幽開別業(항벽곡유개별업) 마을도 후미지고 골짜기도 그윽한데 농장을 열었으니, 囂 塵不到靜無聲 (효진부도정무성) 인간세상 소란함이 이르지 않아 고요하게 소리도 없네.
-송천정사는 송천 송인기가 살던 집이다. 심원당(정자)에서 장군봉 방향 골목길 20여m 지점에 있다. 송홍준(宋鴻俊) 선생이 지은 송천(송인기) 선생 행장(行狀,일생행적)에 보면 「공의 행적은 송천시고 한 편이 있을 뿐 달리 덕행을 상고할 만한 글이 없으나 송천여력록(松泉餘力錄)의 무이십절(武夷十絶)을 차운한 시는 주자와 퇴계 두 선생의 절묘한 시풍과 거의 비슷하여 후세 시를 배우는 무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책에 베껴서 읊조리며 감상함을 금하지 못했다」고 썼다. 송천의 증손인 송원일(58,성잠) 주손은 “성잠촌은 심원당 송대년의 부친인 송잠(宋潛)선조께서 터를 잡으신 후 자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400년 세거지”라며 “송천 증조부님께서는 이곳 본가에서 출생하여 83세까지 천수를 누리셨다”고 말했다.
2. 남경대(覽鏡臺)
十丈坮岩等小船(십장대암등소선) 열 길 돈대 바위는 작은 배와 같은데, 江村漁笛下前川(강촌어적하전천) 강 마을의 어부 피리소리가 앞 하류로 내려가네. 更上一層回轉眄(갱상일층회전면) 다시 위로 한 층 방향을 돌려 보니, 南邊垂柳北邊煙(남변수류북변연) 남쪽에는 수양버들이요 북쪽에는 연기일세.
-남경대는 연화산 지맥이 동북으로 뻗어나가다가 서천을 만나 대를 이룬다.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지금은 성잠마을과 적서농공단지 사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송무찬(한우자조금대의원회 의장) 씨는 “남경대 앞 냇가에 배 모양을 한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하천 정비공사 때 땅속에 묻어버려 안타깝다”며 “마침 그 옆에 바위가 있어 ‘남경대(覽鏡臺)’라 새기니 옛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3. 장군봉(將軍峰)
嶒崚體勢出群峰 (증릉체세출군봉) 높이 솟은 형세가 여러 산봉우리에 특출하여, 虎踞龍蟠特秀容(호거용반특수용) 범이 웅크리고 용이 서린 듯이 특별히 빼어난 모습일세. 兜率西來圍疊疊(도솔서래위첩첩) 서쪽에서 오는 도솔봉(兜率峰)은 겹겹이 둘러쌓고, 馬山南走起重重(마산남주기중중) 남쪽으로 달리는 주마산(走馬山)은 되풀이 일어났네.
-장군봉은 성잠마을 뒷산으로 성봉(聖峰)이라고도 부른다. 송천의 손자 송도선(78,한정노인회장) 씨는 “퇴계 선생이 처가(초곡)에 왔을 때 강 건너 이곳의 ‘맑고 그윽한 경치’에 감탄하여 처가에 올 때마다 성잠마을 주변의 경치를 완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4. 금반대(金盤臺)
盤下長江淺不船(반하장강천불선) 소반 아래 긴 강물은 얕아서 배 띄우지 못하지만, 圓方健軆壓千年 (원방건체압천년) 둥글고 모나며 빼어난 형세로 1000년을 압도했네. 古之承露仙無迹(고지승로선무적) 옛날에 감로(甘露)를 받던 신선은 자취도 없고, 謾使人生白髮憐 (만사인생백발연) 부질없이 인생으로 하여금 백발만 서글프게 하네.
-금반대는 초곡(사일) 마을과 한정교 사이 산 중턱에 형성된 소반(小盤) 모양의 둥근 지형을 말한다. 초곡에 사는 이병장(68) 씨는 “금반대는 옥녀(옥녀봉)가 금상(금반대)을 차려 강 건너 장군(장군봉)에게 바치는 형상”이라며 “이곳이 명당으로 알려진지 1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명당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5. 옥녀봉(玉女峰)
左挾林巒右石岩(좌협림만우석암) 왼쪽엔 숲과 산봉우리를 끼고 오른쪽은 돌 바위인데, 亭亭秀色碧監毛毿 (정정수색벽감모삼) 높이 솟아 빼어난 빛은 치렁치렁 푸르렀네. 揷花峰上雲生鬢 (삽화봉상운생빈) 삽화봉 위에는 구름이 아름답게 생기고, 覽鏡坮前月映潭(남경대전월영담) 남경대 앞에는 달이 못에 비쳐지네.
-옥녀봉은 성잠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마주보이는 산봉우리로 지혜의 여신(女神) 옥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초곡에 사는 오정렬(79) 씨는 “옥녀봉에는 사다리를 닮은 쌍바위가 있어 신성시하고 있다”면서 “이 바위가 쳇다리를 닮아 쳇다리 조(槽) 또는 구유 조(槽)자를 써 조암(槽巖)이라 불렀는데 조선말 영천군 어화면 조암동(槽巖洞)의 유래가 됐다”고 말했다.
6. 비달고개(星月峴)
十里橫來短壑深(십리횡래단학심) 10리를 가로질러 오다가 짧은 골짜기가 깊은데, 上通星月掛峰林(상통성월괘봉림) 위로는 별과 달과 통하면서 산봉우리 숲에 막혔네. 若令此峴臨霄漢 (약령차현림소한) 만일 이 고개를 은하수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면, 共伴列仙不費心(공반렬선불비심) 신선의 반열에 함께하기에 마음 쓰지 않겠네.
-비달고개는 한정에서 지천(현대A)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고려 말 하륜(河崙)이 군수로 부임하여 “남쪽이 낮아 재앙이 끊이지 않고, 인물이 나지 않는다”며 남쪽의 산을 지천(至天)이라하고, 이 산을 넘는 재를 별달재(星月峴)라고 이름 지었다. ‘지천’은 하늘에 이르도록 높다는 뜻이고, 별달재는 재가 높아 별과 달을 볼 수 있다는 뜻인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비달재’가 됐다.
7. 소태령(小台嶺)
上應天台下碧灣(상응천태하벽만) 위로는 천태산(天台山)에 부합하고 아래는 푸른 물굽이인데, 烈風淫雨摠無關(열풍음우총무관) 세찬 바람과 장맛비에도 모두 무관하겠네. 數三茅屋山之半(수삼모옥산지반) 산허리엔 두세 집의 초가집인데, 牧笛樵歌歲月閑(목적초가세월한) 목동의 피리와 나무꾼 노래에 세월만 한가롭네.
-소태령과 소태재는 같은 말이다. 초곡에 사는 오병락(84) 씨는 “금반대 아래 ‘소태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는 설도 있다”면서 “냇가에 살다보니 해마다 수해로 피해가 컸다. 그래서 서천 건너 목골, 성잠 등 안전지대로 이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성잠 출신 송우선(82) 씨는 “소태재란 초곡(사일)에서 상초곡(한정교)으로 넘어가는 낮은(언덕) 재를 말한다”며 “1970년대까지 7-8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없다”고 했다.
8. 송장암(宋將巖)
千年老石臥平灘(천년노석와평탄) 1000년 묵은 늙은 돌이 평평한 여울에 누웠는데, 宋將何時坐起看(송장하시좌기간) 어느 때 송장군(宋將軍)이 앉고 일어나 보았는가? 名與苔顔俱不朽(명여태안구불후) 이름과 이끼 낀 얼굴은 영구히 전하고 있는데, 磨風洗雨豈嫌寒(마풍세우기혐한)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겼는데 어찌 추위를 싫어하겠는가?
-송장암은 뚜껑바위 전설의 주인공 ‘송장사’의 활동무대가 된 곳이다. 송우선 씨는 “송장암은 금반대 아래, 소태재 인근 냇가(현 철교아래)에 있었는데 하천 공사 때 파괴되어 석축재로 사용됐다. ‘소태재마을’은 야성송씨 입향조가 처음 터 잡은 곳”이라고 말했다.
9. 한천원(寒泉院)
先賢封築洞天開(선현봉축동천개) 선현께서 흙을 쌓아 올려 좋은 명승지를 열었는데, 芳躅當年杖屨回 (방촉당년장구회) 당시 선현들의 자취가 지팡이 신발 차림으로 돌았네. 世換時殊經幾載(세환시수경기재) 세상도 바뀌고 시대도 달라진지 몇 해를 경과했던가? 泉源惟有古今來(천원유유고금래) 사물 생성의 근원은 오직 옛날에서 지금으로 오고 있네.
-한천원은 한천서원을 말한다. 송무찬 씨는 “1786년 성봉 아래 산천서당(山泉書堂)에 한천서원(寒泉書院)이란 현판을 걸고 4현(오운·장수희·박회무·박종무)을 봉안했다”며 “현 금강물류(컨테이너 하치장) 뒤쪽에 한천서원 구지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10. 노림평(魯林坪)
上下坪林廣漠然(상하평림광막연) 위아래의 평탄한 벌과 숲이 넓고도 고요한데, 稻花初熟繞長川(도화초숙요장천) 벼꽃이 처음 익으니 긴 냇물이 둘러 흐르네. 年年布穀聲聲裡(연년포곡성성리) 해마다 뻐꾹새가 소리소리 우는 속에, 雨順風調霽後天(우순풍조제후천) 비와 바람이 순조로운 속에 비 개인 뒤 하늘일세.
-노림평은 ‘노림평야’라는 뜻이다. 송무찬 씨는 “남경대 남쪽 넓은 들을 ‘노림평야’라 불렀다”며 “지금은 노벨리스코리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