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리, 9개 식읍에서 보내온 세공이 쌓여 9더미를 이루었다하여 ‘구구리(九邱里)’ |
불사이군 고려 충신 이억(李薿 )의 은거지, 단산면 구구리(九皐)
王이 내린 9고을 세공 물리치니 마을 앞에 9더미 쌓여 ‘구구리’
구구리 은거하다 국망봉 명칭 남기고 병산 회석 법골에 잠들다
이억은 우계인(羽溪人)으로 자(字)는 신지(信之)요 호(號)는 퇴은(退隱,물러나 숨다)이다.
고려 밀직사(密直使) 사성(思誠)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영양 남씨로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 성로(星老)의 딸이다.
요동(遼東) 정벌의 선봉장 ‘억’
「고려 말 우왕 14년(1388.5) 요동 땅. 이억은 고려 공민왕조 문과에 급제하여 유장(儒將)으로 강계(江界) 원수(元帥)로 재임 중 이철성 원수 홍인계와 함께 선봉으로 요동에 쳐들어가 명(明)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오니 임금께서 매우 기뻐하시어 금정아(金頂兒,관모에 장식으로 다는 구슬) 문기견(文綺絹,무늬비단)을 하사했다. 그 후 재차 요동정벌 시 조민수 장군을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공격할 때 이성계 휘하 우군에 속한 이억은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주의 역사가 담긴 재향지(梓鄕誌,순흥지)에 이억의 기록이 나온다. 「본관은 우계(羽溪). 판중추(判中樞) 이사성(李思誠)의 아들이다. 관직이 도평의(都評議)에 이르렀고,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만년에 구고(九皐)에 와서 살았다」라고 썼다.
고려가 망하자 순흥(구구리)에 숨어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칼끝을 돌린 이성계는 최영을 죽이고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후 고려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려는 정몽주 세력도 제거한다. 공양왕(1389-1392)으로부터 양위 받는 형식으로 임금에 올라 새 나라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왕조가 바뀌어 조선을 개국(1392)한 태조 이성계는 이억에게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겸 도평의사사에 제수하였으나 그는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순흥 땅에서 자취를 숨겼다. 이억은 진현관직제학(정3품) 안영부(安永孚,순흥인)의 사위로 순흥은 그의 처가 고장이었다. 개경에서 순흥으로 낙남한 그는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오지(奧地)에 터를 잡았는데 그 곳이 지금의 단산면 구구2리 ‘구두들’이다.
태조대왕 개국원종공신록권 |
9식읍 세공 야적… 구두들
태조(太祖)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태조가 이르기를 「이억은 내가 장수일 시절에 오래 휘하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많은 공을 이루었으며, 상소(上疏)로서 권신(權臣)들의 전횡(專橫)을 탄핵했고, 그 세력을 무너뜨림에 공헌하여 오늘이 있게 했으니 그 성력이 가상하다」며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하고 기공비(記功碑)를 세워 그 공을 기리게 하였다. 또 많은 토지며 노비(奴婢)를 주었으나 전혀 받지 않았다. 경북대 권남희 교수의 ‘이억개국원종공신록권 연구’에 의하면 「전(田) 30결(結,20만평) 노비 3명 사급(賜給,내려주다)」이라고 적었다.
송지향의 향토지에 보면 「태조가 아홉 고을을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나 그는 “고려의 신하로 어찌 李씨의 녹을 받으랴”라며, 해마다 아홉 고을에서 세공(稅貢)이 들어오면 각 고을의 것을 따로 쌓으니 크게 아홉 더미를 이루었다. 그 곡식을 쌓았던 데가 지금 단산면 구구2리 ‘구두들’이다. ‘구두들’은 조선말까지 순흥부 동원면(東園面) 구고리(九고里)라고 불렀는데 일제 때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九邱里)가 됐다」고 기록했다.
이갑선(감곡리, 소수서원운영위원장) 후손은 “구구리의 유래, 억 선조님의 묘소가 단산면 회석동에 있다는 점, 배(配) 정부인(貞夫人) 순흥안씨 묘소가 단산면 구구리(九邱里) 배나무실(梨木高子洞) 있다는 점 등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선조님께서 구구리에 은거하신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구리에서 바라본 국망봉(國望峯) |
초하루 보름, 국망봉에 올라
그가 강계원수로 있을 때 요동정벌 당시 선봉에 섰으며 위화도 회군까지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하였으나 역성혁명(왕조가 바뀌는 일)에는 불복(不服)하였고, 소백산 아래 순흥 땅에 은거한 후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는 매월 초하루 보름 소백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저 멀리 하늘 끝 개경(송악)을 바라보며 고려 선왕(先王)을 경조(敬弔)하는 4배를 올리고 통곡하니 이 고을 사람들은 ‘나라를 바라보면서 나라를 걱정한 산’이라 하여 국망봉(國望峰)이라 부르게 됐다고 풍기읍지(풍基邑誌)에 전한다.
국망봉에 대한 유래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 이 산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단양군지)와 충신백성 배순(裵純)이 선조대왕이 승하하자 국망봉에 올라 3년 동안 곡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순흥지) 등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억의 묘를 수호하는 재사 퇴은정(退隱亭) |
이억의 묘, 단산면 병산3리 회석동 법골(法谷) |
문인석1 |
문인석2 |
이억 묘비, 「가정대부중추원부사도평의사사…이공지묘」 |
단산면 병산3리 법골에 잠들다
왕조신록은 이억의 업적을 기술한 다음 「屛山檜石法谷子坐有碣(병산회석법곡자좌유갈)」이라고 썼다. 역해(譯解)하면 ‘이억의 묘가 순흥부 병산 회석(젓돌마을) 뒤 법골(法谷)에 있다. 정 북쪽을 등지고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라는 뜻이다.
단산면 병산2리 새터마을회관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600m 가량 올라가면 퇴은정(退隱亭,재사)이 나오고 다시 100여m 더 올라가면 이억의 묘소가 보인다. 이곳 지명을 비문에는 법골(法谷)이라 새겼고 지금 사람들은 ‘벅실골’이라 부른다. 묘소에 올라보면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 눈에도 ‘아하! 이런 곳을 명당이라 하는 구나!’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묘비 전면에 「嘉靖大夫中樞院副使都評議事司使兼義興親軍衛同節制使李公之墓 ‘가정대부중추원부사(종이품문무관벼슬)도평의사사사(조선초최고행정기구)겸의흥친군위동절제사(군편제종이품관직)이공지묘」라고 새겼다. 후면과 측면에는 공의 선대와 공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는데 왕조실록 내용과 같다. 이홍선(李弘善,봉화도촌) 우계이씨 종손은 “억 할아버지의 7대손 이감(李戡,1516-1583) 선조께서 묘명(墓銘,묘지에 새긴 글)을 지으셨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가 마모되어 1981년 개갈(改碣,묘비를 다시 세움) 했다”면서 “감(戡) 선조님은 1543년 문과에 급제하시어 경상감사, 대사헌 등을 지내시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셨다”고 말했다.
우계이씨 종택(봉화 도촌리, 도촌은 옛 순흥땅) |
이억의 불천위 사당(봉화 도촌리) |
우계이씨 영주 입향조
우계이씨가 영남 땅으로 낙남한 것은 8세 퇴은(退隱) 이억(李薿 )으로부터 비롯됐다.
이억이 강계원수로 재임 중 요동정벌에 선봉으로 참전하여 상을 받고 밀직부사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고장인 순흥에 은거하니 우계이씨 영주 입향조이다.
이홍선 종손은 “선조님께서 구구리에 은거하신 후 자손들이 장성(長成)하자 ‘나는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의 임금을 섬겼으나 너희들은 너의 임금을 섬기고 충성을 다하라’고 이르시니 후손들은 학문에 정진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봉화 도촌리에 있는 우계이씨 종택 뒤에 불천위 사당이 있다. 이억의 신위를 모시고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국불천위(國不遷位) 사당이다.
종손은 “국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공신에 대해서는 사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신위(神位)”라며 “퇴은 선조님의 고위(考位,할아버지 신위)는 음 2월 11일, 비위(비位,할머니 신위)는 음 7월 14일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낸다”고 말했다.
불사이군 충절, 조선시대 관류(貫流)
퇴은(退隱) 할아버지의 피가 흐른 탓일까. 불사이군의 충절은 조선시대을 관류(貫流)하여 절의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이억의 현손 수형(秀亨.1435-1528,통훈대부)은 평시서령 재직 중 단종이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1456년) 낙향한 단종 절신(節臣)으로, 순흥부 도촌(桃村.현 봉화沙提)에 터를 잡았다. 수형의 현손 이여빈(李汝빈,1556-1631)은 1605년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병중의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임했다. 1613(광해5)년 계축역옥(癸丑逆獄,영창대군사건) 때 대군(영창)과 모후(임목대비)를 구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절절한 우국(憂國) 정성의 글월은 감동과 설득을 지닌 명문으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그는 낙향하여 도촌에서 약간 떨어진 감실(鑑谷)에 터를 잡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만년에(1625년) 영주지 편찬에 힘써 최초 영주지(榮川誌)를 편찬하는 등 평생 선비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후 가문을 빛낸 후손은 이평(李坪,문과) 홍문관수찬, 이잠(李잠,문과) 풍기군수, 이징도(李徵道,문과) 성균관직강·소수서원장, 이기융(李基隆)은 이명희 순흥부사와 금성단 설립, 이진주(李鎭周,문과) 진보현감, 이경제(李慶濟,문과) 병조좌랑 등이 있다.
이장선(보름골) 후손은 “근세 인물로 이윤배(李潤培.1826-1901) 선조는 소수서원장을 지내셨고, 이희경(李羲敬,1862-1929) 선조는 소수서원 일을 주관하고, 금성단 수호를 위해 계를 조직하여 관리에 힘썼다. 이교덕(李敎悳.1895-1955)선조는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시정부 의열단에서 암약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또 이정희(李正熙.1903-1975) 선조는 제3,4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국가적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