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자랑스런 우리 역사

영주의 정자(93개의 누정)

단산사람 2019. 6. 24. 18:27

영주의 아름다움의 자태와 기교-음양정사와 영주

 

소백산 품에 안겨 수려한 자연을 자랑하는 선비의 고장

 

 

영주는 통일신라의 '삼국 화합'의 대안이 되었던 화엄사상의 본산 이였던

부석사가 있어, 려말(麗末)까지 민족사상이였던 불교의 중심 사상지였다.

영주에는 조선(朝鮮) 500년의 지배사상이였던 유림을 바탕으로 하는 선비

사상의 근간이 되었던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다.

소백산 품에서 수려한 자연을 자랑하고, 수많은 유 무형 문화유산과 더불어

 인삼 사과 한우 등 특산품이 넉넉한 풍요의 땅이다.

유불(儒彿)문화의 역사가 면면히 흐르는 전통문화의 도시 영주에는, 유가

(儒家)의 후예들이 전통적 유풍(儒風)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는 '선비의 고장

'이다.

영주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93개의 누정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영주의 누정은 우리나라 어느 곳 보다 많다. 이는 영주가 선비의 고장으로

 유가의 후손들이 많음을 의미하고 있다.

영주읍 23개, 풍기 4개, 이산 14개, 평은 13개, 문수 4개, 장수 13개, 순흥

 12개, 단산 5개, 부석 5개 등 모두 93개의 누정이 있다.

△ 한약재 보관창고 가학루
 

 
 
가학루

영주의 누정중 가학루는 옛 영주의 동헌의 문루였다. 1923년 영주초등학교를 

확장하면서 일제강점기에 구성공원으로 이전했다. 가학루는 당시 명필이었던

 해강 김유진과 소우 강벽원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자연의 형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12개의 두리기둥이 있고 그 위에 벽체가 없는 우물마루 바닥에 사면으로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인 익공외부 모양은 초익공형으로 초각을 하고 대량을

 받쳤다.

 

 
제민루

특이한 역할을 해왔던 제민루는 각종 한약재를 소장해 두고 왕실과 지방민의 

구제를 위해 사용됐던 의학루로 1371년 당시의 군수 하륜이 건립했다. 1433년

 군수 반저가 중건하고 정종소가 증축했다고 전한다. 1588년 고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개축했다. 1961년 홍수로 무너진 것을 현재자리로 이전애 건축했다.

구학공원의 야산에 내성천을 조망하면서 남향으로 세워져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층누각이다.

△ 단종과 관련된 보계당

단종의 복위를 주도한 인물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도 있다.

보계당이라고 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허육이 벼슬을 버리고 단종복위운동

을 주도한 허방, 허윤공, 허지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건물은

보개실 마을 뒷산에 있다. 마루방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둔 형태로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쪽마루를 돌렸고 온돌방 뒤에는 반칸 규모의 벽장이 설치

된 것이 특이하다.

또 삼절당이라고 하는 정자는 단종의 절신인 석헌 허방과 그 아들 허윤공,

손자 허지 등 3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순흥부 동원면 띠기에

건립한 정자도 있다.

△수로왕을 추모하기 위한 낙운정

김해김씨와 김해 허씨가 시조 수로왕을 추모하기 위해 1923년에 건립한

 낙운정이 있다. 1964년에 중수한 것으로 영주초등학교 뒤편에 있다. 중앙

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만들

었다.

기둥전면에는 팔각형 화강석 기둥과 두리기둥을 세운 별주가 있고 나머지

는 콘크리트로 만든 초석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병자호란의 등서정과 침석정

등서정이라는 정자는 인조때 참봉을 지낸 안은국이 병자호란의 치욕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마을 뒤 미산에 세운 정자가 있다. '등서'는 중국이

 백이 숙재의 수양산 고사를 뜻하고 있다.

또 아호정이라고 불리우는 정자는 아호 김결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견디지

 못해 낙향해 띠집의 정자로 건립했으나 소실된 것으로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건립했다.

침석정이라고 하는 정자는 인조때 국자감 주부를 역임한 서계상이 병자

호란의 화의에 울분ㄴ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살던 자리에 후손들이

1900년께 건립했다.

건물 우측면 처마도리와 중도리간을 곡재로 연결시키고 여기에 외기도리

왕짜를 짜고 추녀와 측면 서까래를 받친 특이한 건축형태다.

△임진왜란의 모은당

모은당이라고 하는 정자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조선 선조때 봉사를 역임

한 우추가 임진왜란때 영주로 피병해 은거한 곳으로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대은정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정자는 병자호란때 의병활동을 벌인 권창진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780년에 세운 것으로 '아맹정'이라고도 불리우며

 '삼맹와'라는 현판도 걸려있다.

삼맹와는 눈과 코, 입을 막고 지낸다는 뜻이다.

△금선정

 

 
금선정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의 장선마을 뒷산의 절벽위에 세워진 금선정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했던 금계

황준량이 놀던 곳으로 정자의 아래 절벽에는 1757년 풍기군수 송징계가 새긴

 금선대(錦仙臺)라는 각자가 남아있다.

1981년 당시의 군수 이한일이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이라고 이름지었다.

1785년 군수 이대영이 목사 조윤형의 글씨로 새겨 현판했다.

1989년 풍기향교 유림에서 영풍군의 지원을 받아 보수했다. 절벽위에 기둥

을 세운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는 벽체없이 개방하고 바닥

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상부의 결구는 독특한 형태로 대량을 충량과 직교

되게 결구시키고 그 위에 정자로 틀을 짜고 추녀 및 서까래를 걸어 상부하중

을 받도록 했다.

△ 금양정사

 

 
금양정사

금선정 뒤편 산자락에 세운 금양정사는 16세기 중엽 유학자인 금계 황준량이 

학문을 닦고 교육을 하던 장소다. 황준량은 이황이 행장을 지을 정도로 아끼

던 문인이다.

황준량은 중종 35년인 1540년 문과에 을과 제2인으로 급제한후 성균박사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성주목사를 역임했다.

중종과 인종 임금의 실록편찬에도 참가했다. 1866년 고종3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황준량은 백학서원과 욱향단소에서 매향하고 있다.

이 건물은 좌측에 온돌방, 우축에 대청을 설치하고 전면과 좌측에는

쪽마루를 설치했다. 건축양식과 평면구성에서 지방 사림과 사대부 건축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피염정

영주시 장수면에 있는 피염정(避炎亭)은 무더운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쉴만한 정자라는 뜻으로 조선조 진사 이희음(李希音)이 지은 것이다.

원래 있던 장소가 물난리로 잠기면서 자리를 옮겼다.

'염(炎)'자가 2개의 '불(火)'로 이루어진 것으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정자의 원래 주인인 이희음은 '피염(避炎)'이라는 의미를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무더위를 식힐 뿐 아니라,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속세의 불구덩이를 피한다는 바람도 포함하고 있다.

피염정에 얽힌 이야기는 단곡(丹谷) 곽진(郭 山+晉)의 기문(記文)에 잘 설명돼 있다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벗 이희음은 매우 기이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진사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는 숲이 우거진 산골에 숨어 책을 읽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가 책 읽으며 보내는 산골의 집은 문밖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집 앞에는 작은 언덕이 있으며, 그 언덕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정자가 있다. 그 솔숲이 마치 장막처럼 뜨거운 햇살을 가리고서 서늘하게 부채질을 해주니, 제 아무리 찌는 듯한 무더위라 할지라도 더운 줄 몰라 여름날인 것을 잊고 지낼 만 한 곳이다.

일찍이 내가 백운동(白雲洞)에서 나와 들렀더니, 나더러 부탁하기를, "내가 정자를 지어 놓고 '피염(避炎)'이라 이름 지었는데, 자네가 한 말씀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자네는 어떤 연유로 '피염'이라고 이름을 지었는가·"라고 물으니 "그건 말일세, 온 세상이 불구덩이 같은 명예와 이익을 다투느라 허덕이는데, 나는 초연히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해서 이 정자에 올라 거닐곤 하니 정신이 맑고 심기가 상쾌하더군. 그 느낌이 부는 곳 일정치 않은 바람처럼 어지러운 먼지세상을 벗어나 신선의 경지에 오른 듯한 가쁜하고 시원하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 싶네만……."라고 답했다.

"진사 이희음은 은자의 도를 지켜 영달을 도외시하니, 일체 속세에 대한 욕심을 깨끗이 씻어 버려 세상의 이익을 멀리하고는, 자연 속에 소요하면서 맑고 고결한 뜻을 온전히 지키며 생애를 마치려 하노니, 그 뜻이 곧 피염인 것이다. 그러니 속세의 불구덩이를 피하는 그 뜻 외에 무엇을 또 부러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피염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묶어놓은 '피염정일고(避炎亭逸稿)'에 따르면 정자가 황폐해지자 이희음의 후손이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 풍산김씨 김세락(金世洛)이 발문이 쓰면서 이희음의 고결한 뜻을 높이 칭송해 놓았다.

이희음 선생이 이 곳 산림에 정자를 세우고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스스로를 '피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겉으로는 더위를 피하고자 나무 한 그루 심은 것이지만, 한여름의 폭염을 한 그루나무밑에서 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이 만난 세상이 어지러운 군주와 간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난세인지라 잠시 불구덩이 같은 세상에 몸담았다가는 이내 물러나 자연 속에 소요자적하면서 세상에서 잊혀 질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의 덕망 있는 선비 청풍(淸風) 정윤목(鄭允穆)과 단곡 곽진 등과도 교류하고 지내, 이들과의 교류시가 전해 온다.

이 밖에도 피염정 주변 경관도 빼어났던 듯, 그 빼어난 경치를 찬탄하고 그 정자의 주인의 인품을 빗대어 칭송한 시들이 많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정자를 둘러싼 솔숲의 바람으로 식히고,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쫓는 불구덩이를 마음 공부로 피하고자 했던 올곧은 선비의 높은 뜻은 아직도 피염정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