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자랑스런 우리 역사

세계 최강 K-9 자주포/행군의 아침

단산사람 2011. 1. 15. 19:15

나는 보병이기에 포병에 대해서는 거의모른다

내가 군생활할때에 포병무기는 105 미리, 155 미리자주 (견인),  8 인치 자주포로 기억되는데

일전에 연평도사건시에 K - 9 자주포라는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되여  어느무기인지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도  시원스런대답을 듣지못해서 할수없이  인터넷을 뒤져서

자주포에대한자료를 찿아서 올림니다      - 柳 來 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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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강의 K-9  자주포


 

자신할 수 있는 세계적 명품

K-9! 155㎜ 자주포인 K-9은 1990년대에 국방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국방과학기술이

혼신을 다해 개발한 대표적 무기체계로서 세계에 자신 있게 자랑할수있는 명품(名品) 중의 명품이다.

물론 K-9자주포와 유사한 성능을 가진 155㎜ 자주포 몇 종이 나와 있고 부분적으로 우월한 성능을

지닌 것도 있어‘세계 최고’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운용성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면에서 K-9보다 확실히 훌륭하다고 지칭할 수 있는 자주포 또한 아직 없다 할것이다.


 

47톤(전투중량)의 무게에 포신을 포함한 길이 12m로서 첫 눈에도 육중한 위압감을 주는 K-9은

2000년대 전장이 요구하는 조건인 화력과 기동력, 생존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K-9을 말할 때 가장 큰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최대 사거리가 40㎞’, 즉 구경 155㎜, 52구경장으로

길이 8m에 달하는 포신이 쏘아대는 포탄은 무려 40㎞를 날아간다. 사격명령을 접수한지 30초 이내에

초탄을 발사하고, 15초 이내에 최대 3발을 쏠 수 있다. 1분당 3발씩 3분 동안 연속 18발을

사격할수도 있다. 자동화된 사격통제장비, 자동화된 포탄 이송 장전장비를 갖추고 있는 덕분이다.

 

 

이 같은 K-9자주포를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155㎜자주포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군의 주력인 155㎜ 자주포 M109A6 ‘팔라딘’보다 사거리와 발사속도, 생존성, 탄약 적재량,

기동성 등 모든 부분에서 우위를보이며 영국의 AS90보다는 사거리와 반응성, 기동성면에서 앞선다.

‘세계 최고’라는 독일의 PzH2000에는 탄약적재량(60발)과 발사속도(1분에 8발)에서 조금못 미칠 뿐

사거리와 반응성에서 대등하며, 기동성을 나타내는 최대주행속도와 가속성능, 그리고 등판능력과

톤(t)당 마력 면에서 오히려 우수하다. 또한 유기압 현수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승차감이 좋아

지속적인전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방위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오는 2011년까지 터키로

수출하는 쾌거를 올림으로써 그 성능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그동안 스페인,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에서 K-9자주포를 시승하거나 훈련과정을 참관하는 등 관심 이상의 부러움과 함께

‘방산협력’을 모색한 바 있다. 한마디로 K-9은 모든 면에서 세계 정상 수준의 자주포임을 알 수 있다.

 

의지와 축적된 기술이 성공 요소

그런데 이렇듯 자랑스러운 위용을 지닌 K-9이 개발초기부터‘세계 최고’를 향한 기대와 개발을 위한

지지를 폭넓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1990년 봄에 작성된 작전요구능력(ROC: Requirment

Operational Capability)은 우리 국방과학기술과 방위산업 역량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당시 미국이 개발 중이던 M109A6보다 요구수준이 높았을 뿐 아니라 독일이 개발 중이던 PzH2000

자주포에 맞먹는 성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미국도 아직 개발하지 못한 장비를 우리가 먼저

개발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 또는 의혹의 눈빛이 한동안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진 주위를

맴돌았다. 21세기 전장 환경을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능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도

그치질 않았다. K-9 개발을 위한 사업 승인이 난 후에도 개발가능성을 사시(斜視)로 바라보는

눈길은 여전했고 10여 년간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사업이 좌초될 수 있는 위기도 수차례 맞기도 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K-9의 개발과 전력화가 성공한 요소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K-9의 성공 요소를 꼽는다면 굳건한 개발의지, 그리고 축적된 고급 인력과 기술, 상호 협력 등을

들 수 있다. 어떤‘성공’의 사례를 찾을 때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을 거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두가 히딩크 감독의 안목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던 2002년 6월 22일. 국방과학연구

소장을 역임한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과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서정욱(徐廷旭) 박사는

무역협회가 주최한‘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프로젝트’토론회에 참석, 당시 화두로 꼽히던

히딩크의 성공사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일침(一針)을 가한다.

“히딩크의 성공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대표팀의

역대 감독들이 한 역할이 히딩크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 팀이 보여준

놀라운 체력도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강한 국력을 만들어 낸

기성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체력과 선전이 가능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 없는 결과 또한 없는 것이고 보면

오늘 우리가 성공 또는 업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이에 상응한 근원 내지는 바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국방과학 기술이 10여 년에 걸쳐 빚어낸

주요 업적 중 하나인 K-9자주포 역시 마찬가지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다.

K-9 개발에는 당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의 역할이 중심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K-9의 연구를 가능케 한 밑바탕에는 1970년대 초, 총포류 등 기본 병기를 우리 손으로

개발하자는‘번개사업’부터 쌓아온 경험과 기술이 깔려 있다. 또 100여 개의 시제(試製)·협력업체,

그리고 대학 등의 연구소 인력이 K-9 개발을 위해 힘을 모았다.

1971년 1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해 추진된 ‘번개사업’ 에 의해 국산화된 60㎜박격포

등은 동종의 미군장비의 도면을 구하거나 장비를 분해해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개발됐다. 이어 1972년 4월 을지연습 때, 후방 사단의 화력장비를 보강하기 위해 개발이 지시된

4.2인치 박격포나 105㎜ 견인곡사포의 경우는 어려움이 더 컸다.

 

 

당시 105㎜ 곡사포의 경우 포가(砲架) 부분의 도면은 경북 왜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에서

획득했으나 그 외 부품의 도면은 구할 수 없었다. 견본 장비를 획득한 후 포신, 주퇴복좌기를 포함한

600여 종에 달하는 부품을 역설계하거나 기술자료(TDP)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해 도면을 설계했다.

어렵게 개발한 105㎜ 곡사포는 1973년 6월 경기도 다락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관하는 가운데

사거리 2㎞ 내외의 시험사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105㎜곡사포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이 많았다. 이 곡사포의 기술적 문제는 그해 12월 백령도에 최초 배치, 운용시험을 갖게 되면서

발생했다. 105㎜ 견인곡사포가 백령도 쪽으로 배치된 까닭은 이즈음에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 5도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1974년은 김일성이 회갑을 맞는 해로서,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서해 5도를 바치겠다고 공언하던 때였던 것이다.

 

백령도 상공에는 북한의 미그기가 공공연히 나타나 아군을 위협하는 실전상황이 전개되곤 했다.

이런 가운데 곡사포를 운용한 결과, 주퇴복좌기가 파손되거나 탄피의 추출이 곤란해지는 현상 등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다.

이에 곡사포는 백령도에서 철수하고 보완작업이 시작됐다. 화포개발은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뼈아픈 실패 속에 기술 기반 닦아 1976년 1월 19일 미국의 조병 기술자를 초청했다.

5명의 미국 기술자들은 2월 말까지 국내 화포개발 능력과 여건을 조사한 결과, 아주 간단한 견해를

내놓았다. “현 상태로는 안 된다.”이 때만 해도 미 정부의 기술지원은 전폭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기술자들이 다녀간 이후 미국에서 제작도면, 치공구 도면, 품질보증 절차서 등이

제공되었다. 우리 정부는 화포제작업체에 특별융자를 내주었다. 당시 포신을 맡은 대한중기에

70억 원, 포가와 체계조립을 담당한 기아에 41억 5천만 원, 주퇴복좌기를 생산하는

대동에 4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것이다. 이때 대한중기는 경남 창원공단으로

입주하는 최초의 업체가 된다.

이렇게 생산시설을 현대화하면서 1년여의 노력 끝에 모범생산사업은 완료됐다. 군사원조로 도입된

포와 동등 또는 그 이상의 성능이 확인됐다. 뼈아픈 실패와 극복의 과정 속에서‘독자적으로

무기체계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KH178과 KH179

개발사업에 착수함으로써 국산 화포 개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미“155㎜ 사거리 연장하자.”제의 거절
KH179 155㎜ 곡사포의 개발 과정을 살펴보자. 1976년을 기준해 보면 당시 서유럽 각국은 사정거리

30㎞의 155㎜ 곡사포 개발을 완료하는 단계에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포병 능력을 보강하고자 사거리 20~30㎞ 급의 화포를 갈망하는 정도였다.

당시 우리 군의 화포 중 20㎞이상을 쏠 수 있는 화포는 군사원조에 의해 들어온175㎜ 자주평사포

뿐이었다. 북한의 비해 수적인 면에서 100대 2 정도, 아군 포병 90%가 적 사정권 안에

들어가는 절대 열세였다.

 

105㎜ 곡사포를 국내 생산하는 가운데 국방과학연구소는 사거리 연장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975년에 155㎜ 견인곡사포 M114A2의 성능개량을 위해 미국에 자문을 구했으나

불가 통보를 받았다. 미국은 내심 M198의 직구매를 희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어 1976년 6월에는

영국에서 새로 개발한 L118 105㎜ 곡사포 2문과 탄약을 도입해 국내에서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그 후 서독에서 기존 105㎜ 곡사포를 성능개량한 FHL 105㎜ 기술 자료를 입수해 국내 기술진만으로

시제를 제작하고 시험 평가하는 등 국내개발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런데 1975년에 구형 화포의 성능향상이 불가하다고 했던 미국이 1977년 말 M114A2의 사거리를

30㎞로 늘리는 사거리연장사업을 갖자고 제의해왔다. 마침 육군은 105㎜ 곡사포를 국내 기술력으로

개발하는 사업이 추진되는 등 화포 생산기반의 토착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형 화포의

성능향상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은 1978년  3월 미국 M114A2 155㎜ 곡사포의 성능 개선사업을 소요제기했고, 이러한

소요제기는 그해 12월 한·미 공동 개발을 전제로 한 개발 과제로 확정됐다. 그러나 1979년 6월,

미국의 제안을 접수·검토한 국내 연구진은 이 공동 개발안을 거부했다. 1975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한 후 1998년 8월까지 화포 개발의 외길을 걸으며‘한국 화포 개발의 대부’로 불린

(주)풍산의 문상규(文相奎)고문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240만 달러라는 기술료가 지나치게 많았고 개발에 따른 전반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어요.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시제 제작과 시험평가를 미국에서 해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지적소유권에 대한 분쟁의 우려도 있었고요.”

155㎜ 곡사포 독자 개발 나서
국방과학연구소가 공동개발을 거부함에 따라 155㎜ 곡사포를 확보하는 사업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개발기간 연장과 함께 국내 독자 개발로 그 수행 방법이 변경됐다. 이것이 현재

우리 포병의 주력 견인포인 155㎜ KH179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독자 개발로 변경되자 기술진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사실을 말하자면, 국내 기술수준은 이제 막 화포의 설계 개념을
이해한 정도였다.

 

한번도 독자적으로 화포를 설계하거나 제작해 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특히 사격 시 발생하는 각종 압력과 가속도 등 설계 변수를 어떻게 결정하고, 제작 후에는

어떤 시험평가 방법을 통해 성능과 신뢰성을 입증하느냐가 문제였다.

“국산화한 M101A1의 일부 문제점을 보완, 개발할 때 미국에서 기술지원한 자료 가운데 155㎜

곡사포 M198의 포신 도면이 있었는데 이를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문상규 기술고문)

연구기술진은 포미환·폐쇄기·주퇴복좌기 등의 설계개념을 정립하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해 .

나갔다, 미국의 M114 곡사포의 포신 길이를 두 배 가까이 긴 38구경장 포신으로 채택한 것이 

가장큰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동일 구경에서는 포신 길이가 길수록 정확도가 높아지고 사거리가

늘어난다. M114의 포신 길이는 3.62m지만 연구진이 정립한 곡사포는 7.08m(전장10.3m)에 달한다.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험평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 화포 개발 시적용하는

장비시험절차서를 철저히 분석했다. 또 학계를 포함한 국내 관련 기술진의 두뇌를 모두 끌어모았다.

사격 시 발생하는 각종 압력·응력·속도·가속도·힘(force)·온도 및 탄의 비행특성 등을 계측하여

설계치와 비교 평가하면서 설계가 타당한가를 입증했다. 시제를 제작한 후에는 악조건 상태에서의

안정성 확인과 신뢰성 보장을 위해 실사격 외에 시뮬레이터를 통한 반복시험을 수없이 실시했다.

문 고문은 악조건 상태 중 하나인 저온에서의 시험평가 사례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당시 안흥 종합시험장에는 극저온 시험시설이 있었지만 4.2인치 박격포 사격에도 설비가 깨져나갈

정도여서 155㎜ 화포시험에는부적절했어요. 추운 겨울(1982년 1월) 할 수 없이 다락대로 달려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봤습니다.”

먼저 화포를 방렬한 상태에서 베니어판과 절연제로 집을 지었다. 실내에 드라이아이스와 알코올을

잔뜩 넣고 10개의 선풍기로 공기를 순환시키며 실내온도를 영하 44도로 끌어내리면서 화포를

냉각시켰다. 이렇게 20시간이 지난 뒤 포구와 포미 쪽 벽만 허물고 최대 장약의 115% 압력으로 5발을

사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때 사용된 드라이아이스는 2.5톤 트럭으로 3대, 알코올은

1대분이 소요되었다.

“포신의 수명평가 또한 중요합니다. 실사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예산이 소요되고 단기간

내에 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100발 이상 사격한 포강 내에 히트크랙(Heat Crack)이 발생한 포신

자체를 시편으로 만들고, 이를 유압으로 59,000psi 즉 4,015기압에 해당하는 약실압력을 반복해

넣었지요. 포신 3개를 파괴될 때까지 시험했습니다.”(문 고문)

이때 연구진은 사거리 연장(RAP)탄 개발도 동시에 진행하여 155㎜ 곡사포의 사거리를 14.6㎞에서

30㎞로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이 사업을 통해 최초 외국에서 수입했던 고강도 포신 소재와

주강품인 제퇴기 소재 등의 국산화도 이룩했다.

화포 개발의 독립 선언
이렇듯 갖은 노력으로 개발한 38구경장 155㎜ 곡사포는 포신의 길이가 길어졌음에도 경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총중량 6,855㎏선을 유지함으로써 CH-47 헬기로 공수가 가능하고

C-130 수송기에도 적재할 수 있었다. 사거리 30㎞로써 미국이 1977년 개발을 완료한 후

1978년 주한미군에 배치한 M198, 그리고 영국·독일·이탈리아의 FH70, 스웨덴의 FH77 등 사거리

30㎞의 155㎜ 곡사포와 동등한 수준이다. 전력화 시기는 이들 선진국보다 다소 늦지만 견인포와

관련한 기술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이 포에는 KH179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KH는 한국형(Korea) 곡사포(Howitzer), 1은 최초 또는 시작이라는 뜻이며 79는 1979년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 개발에 착수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시 같은 의미로 이름 지어진

105㎜ 곡사포 KH178과 함께 화포 개발의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문 고문은“KH179의 개발을 통해 쌓은 기술력, 연구개발진이 보여준 용기와 의지가 우리의 화포 개발

능력을 오늘날 세계적 수준으로 나아가게 하는 확실한 기반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포병 신뢰 한 몸에 받은 KH179
그러나 KH179는 1983년 전력화한 이후 예상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84년 봄, 한마디로

잘 나가던 KH179에 성능시비가 일어난 것이다. 발사시험 중 포구 쪽의 제퇴기가 세 번 연속으로

부분 파손된 것이었다. 이 일은“KH179의 포신이 깨졌다.”로 확대돼 삽시간에 번져나갔고, 급기야

당시 윤성민 국방부장관에게도 보고됐다.

여기에 KH179에 대한 미국 측의 견제까지 곁들여졌다. 미8군 지휘부 측에서도 KH179의 성능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있다고 거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KH179가 헬기에 의한 공중수송이 불가능

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신들의 주력 화포인 M198의 기술을 도용해 제작했다며

우리 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포신 파손’으로 번진 문제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포탄과 포신 사이에 위치한 인터페이스

상의 문제였다. 기술적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사항이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심각성을 더해 갔다.마침내 상급기관으로부터 KH179의 안정성과 운용성등을 증명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방법은 악조건 시험과 공중수송 테스트를 다시 수행하는 것이었다. 먼저 포신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시험이 실시됐다. 육군 소장이 지휘하는 검열반이 구성되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KH179 6문으로 포탄을 무려 230발 이상이나 쏘는 가혹시험이 진행됐다.

 

그러나 KH179는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개발단계에서 포신의

수명을 평가하기 위해 이보다 더 가혹한 평가를 실시했던 것이다. 즉, 100여발을 사격한 후 포강

내부에 히트크랙이 발생한 포신자체를 시편으로 만들고, 여기에 실사격과 같은 압력을 주는 시험을

파괴 시까지 반복했던 것인데 이는 2만 발의 실사격과 버금가는 것이었다.

공중수송 검증을 위한 훈련도 서부전선에서 실시됐다. CH-47 헬기 12대가 병력 및 탄약을 실은

가운데 KH179를 매달아 작전지역으로 수송했다. 미군의 M198도 1문 포함됐다. 그런데 수송 후

KH179곡사포는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안정되게 착지해서 정상적으로 사격이 이뤄진 반면

M198곡사포는 그렇지 못했다. 헬기와 화포를 연결한 슬링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격조차 할 수 없었다. 내심 화포성능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지녔던 미국 측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은 훈련 후 비로소“한국군은 매우 우수한 화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남겼고

성능과 기술도용의 문제도 일시에 해소됐다. 동시에 KH179와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개발 능력에

대한 포병의 신뢰는 높아만 갔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용어 해설▶▶▶
■ 포열=탄두를 목표지점까지 비행토록 발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후미에는 탄약이

            삽입되는 약실을 가지고 있다.
■ 포미장치=격발 또는 사격 때 발생하는 사격력의 지지 및 뇌관 탄피 추출 등의 기능을 한다.
■ 제퇴기=탄이 포구를 이탈하면서 함께 방출되는 고압 사격가스 일부를 후방으로 방출시켜

               사격에 따른 포신의 주퇴 운동량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 제연기=사격 후 포강 내에 남아 있는 연소가스를 포구쪽으로 배출시킨다.
■ 구경장=포열의 길이를 나타내는 말. 52구경장이란 구경의 52배 길이로서 155㎜/52구경장은

               155㎜의 52배, 즉 8m라는 뜻이다.

<K-9 자주포>

 

◆ K- 9  자주포 제원

 

· 길이: 12m

· 폭: 3.4m

· 높이: 3.28m

· 무게: 47t(전투중량)

· 엔진: MT 881 Ka-500 1000마력 디젤엔진

· 최고속도: 67km/h

· 무장: 52 구경장 155mm 곡사포 1문, K-6 12.7mm 중기관총 1정

· 사정거리: 41km(BB-HE탄), 30km(RAP탄)

· 발사속도: 3발/15초(최대), 6~8발/분(최초 3분간), 2발/분(지속사격)

· 승무원: 5명(포반장, 조종수, 사수, 부사수, 1번 포수)


 

출처 : 국방일보 

 

 

 

 

♬ 행군의 아침 _ 軍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