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사랑 이야기/문화유산보존회

동계구곡에 대하여

단산사람 2017. 9. 17. 09:31

 

동계구곡東溪九曲에 대하여

 

                                       - 김태환(영주향토사연구소장)

 

글을 들어가며

 

동계구곡東溪九曲은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1867∼1952)이 1918년 자신의 거소인 영주시 부석면 도탄리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낙하암천洛霞岩川인 동계東溪의 하암霞巖에서 선암仙巖까지의 아홉곳의 바위〔巖臺〕를 설정하고 경영했던 구곡원림九曲園林이다.

구곡원림을 읊은 구곡시九曲詩는 주로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운韻만을 차운次韻하여 짓는 것이 관례인데 김동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구대九臺」를 차운次韻하여 한 수씩 더 지었다. 이는 동계東溪의 아홉 굽이마다 대臺라고 이름할 수 있는 바위〔巖臺〕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진은 아홉곳의 바위에 이름을 짓고 나서 그 바위를 제재로 하여 구곡시를 지었다. 본고에서는 김동진의 구곡시와 그 위치를 설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1.동계東溪와 탄계灘溪

 

동계구곡東溪九曲을 형성한 낙하암천洛霞岩川은 부석면 임곡 2리 마구령馬駒嶺 소골에서 발원한 물과 봉황산 북지리 큰골에서 발원한 물이 두봉교에서 합수하여 임곡교를 거쳐 부석 삼거리로 흘러온 물이 사발재와 사정을 거쳐 온 물과 자개봉 비그비골 물이 부석저수지에 모여 다시 제금골을 거쳐, 부석 삼거리에서 합수되어 낙하암천을 이룬다. 동계구곡東溪九曲은 부석 소천리에서 감곡리까지 6km 동쪽 계울에 형성되어 있다.

?흥주지興州志?를 살펴보면 동계구곡을 탄계구곡灘溪九曲이라 명명하고 있다.

 

탄계구곡灘溪九曲은 순흥부 동쪽 20리 우계愚溪 상류와 하류에 있는데 1곡이 선암대仙巖臺, 2곡이 호산대湖山臺, 3곡이 회고대懷古臺, 4곡이 창고대蒼皐臺, 5곡이 능운대凌雲臺, 6곡이 풍영대風詠臺, 7곡이 자하대紫霞臺, 8곡이 옥간대玉澗臺, 9곡이 명구대鳴璆臺이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강도講道하고 유상遊賞하던 곳인데 굽이를 따라서 명명하고, 각각 시를 짓고 또 돌에 새겼다.

 

동계구곡을 탄계구곡이라 명명한 이유는 동계가 도탄 마을에 소재해 있어서 탄계灘溪라고 불리어 진것같다. 동계는 이밖에도 우계愚溪, 소계韶溪 등으로 불리어졌다. ?흥주지?의 기록에서 주목할 부분은 ‘굽이를 따라서 명명하고, 각각 시를 짓고 또 돌에 새겼다’는 부분이다. 특히 돌에 새겼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각 굽이의 바위에 굽이의 이름을 새겼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몇 굽이에 지나지 않고 있다.

 

2.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

 

김동진(1867∼1952)은 본관이 선성宣城이고 자가 국경國卿이며 호가 정산貞山, 석포, 이직재이다. 1881년 문계(文溪)에서 도탄(桃灘)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1884년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이재는 정산의 독실함을 보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에게 배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1886년 부친상을 당하고, 1889년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나서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갔다. 1899년 김흥락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스승을 위해 지은 만사에서 “이미 문하에 들어온 지 10년입니다. 선생께 입은 은혜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따라서 김동진의 학풍은 김흥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김흥락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의 제자이니 퇴계退溪 이황李滉에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경敬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학문의 큰 요체는 입지立志,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4가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김흥락의 학풍은 김동진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김동진이 김태범金泰範에게 지경持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을 강조하는 내용의 「증김홍구贈金洪九」 시를 보낸 것에서도 그가 스승의 학풍을 이었다는 사실을 잘 확인할 수 있다.

1904년 주자의 무이정사 고사에 의하여 매학당에서 향약을 실행하고 다섯분의 성인과 여러 현인및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1906년 학생들의 거소인 관선재觀善齋와 1907년 고금의 서적을 보관하는 은구재隱求齋를 건립하였다.

1908년 소수서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1911년 봄에 고종의 밀지와 관련되어 체포되어 흥주감옥에 구금되어 10여일만에 풀려났다. 1914년 여름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19년 봄에 달성감옥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때 그들이 선생의 의관을 벗기려하자 “목은 자를수 있어도 의관을 벗길수 없다.”고 하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1922년 5월에 구고서당에서 여씨향약을 읽었다. 1931년 순흥향교 대성전이 낮고 습기가 차서 중수하였다.

김동진은 소수서원 원장을 3차례 역임할 만큼 학생의 학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가장 관심을 쏟았던 부분은 속된 학문으로 무너져 가는 영남 지역에 도학(道學)의 기운을 다시 부흥시키는 문제였다. 김동진은 소수서원의 원생들에게 안향(安珦)의 제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안향이 동방 도학을 부흥시킨 뜻을 잘 살려 학문에 정진할 것을 편지글을 통해 당부하였으며, 소수서원 원생을 위한 절목을 따로 만들어 일상적인 생활 규칙 외에 학문하는 방법과 요체들을 숙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김동진이 고민하고 있었던 지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그는 공부에는 순서와 완급이 있으므로 그 차례를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점을 학생에게 강조하였다.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은 기본으로 읽어야 하며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는 학문에 들어가는 문이므로 열심히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김동진은 성현의 가르침을 잘 익혀서 현실에 실천하는 자세를 중요시하였다. 성현의 말씀을 마음에 깨달아 밝히고 이를 실제에 적용하는 공부를 하라고 학생에게 항상 역설하였다.

또한 김동진은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에 힘을 쏟은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3년 독립의군부 설립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김동진은 여기에도 동참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김동진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저서로 『정산집』 15권, 속집 3책이 있으며, 『유학연원록』에 1천여명의 문인이 등재되어 있다.

 

3.동계구곡東溪九曲

 

武夷未必詑仙靈 무이산에만 반듯이 신선이 있겠는가

亦愛東溪九曲淸 또한 동계東溪의 구곡의 청정함을 사랑하네

想仰晦翁珍重意 회옹(晦翁, 朱子)의 진중한 뜻 우러러 생각하니

千秋無絶櫂歌聲 천추의 도가 소리 끊어짐이 없어라

 

김동진은 주자의 「무이도가」를 계승하여 「동계구곡시東溪九曲詩」를 지었다. 그는 이 시에서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은 선령을 자랑하지 않으니 동계의 아홉 굽이가 가지는 청정함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은 도교의 유적이 산재하는 산이었고, 도교에서 숭상하는 신선의 전설이 굽이굽이 자리하는 산이었다. 그런데 주자가 이 산에 은거하면서 무이산은 더 이상 선령을 자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주자의 학문과 사상이 무이산의 선령을 물리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김동진에게 무이산은 주자가 은거하면서 더 이상 혼탁한 사상에 물든 산이 아니라 성리학이 전개되는 청정한 산이었다. 무이산이 가지는 청정한 기운이 동계의 아홉 굽이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계구곡의 청정함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김동진은 주자의 진중한 뜻을 생각하고 우러르니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도가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고 하였다.

주자의 사상과 학문이 무이구곡에 맑은 물로 흘렀듯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동계구곡에 맑은 물로 흐르고 있으니 주자의 학문과 사상을 자신이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를 이렇게 은근히 드러냈다. 김동진의 동계구곡 서序를 살펴보면

 

도강道岡의 동계東溪에 하암霞巖에서 선암仙巖까지 구곡九曲이 있다. 구곡에는 층을 이룬 바위와 매우 큰 돌이 있는데, 잘려진 모양이 대臺의 형상 같은 것이 또한 아홉이다. 무오년(1918) 여름, 10일 동안 한 굽이에 노닐었는데 모인 날에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 운을 사용하고, 대영臺詠은 퇴계 선생 「구대九臺」 운을 차운하여 여러 군자에게 보여 주며 화운을 요구하였다.

 

김동진은 1918년 여름, 도강서당道岡書堂이 소재한 부석면 도탄리 동계東溪에서 여러 선비들과 동계구곡東溪九曲을 설정하고, 10일 동안 동계東溪를 유람하며 여러 선비들은 하암에서 선암까지 아홉 굽이를 설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운과 이황의 「구대九臺」 운을 가지고 아홉 굽이의 경관을 시로 읊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김동진은 일제에 의해 수차례의 구금과 방면을 거듭하던 시기이다. 1918년 김동진이 동계구곡을 유람한것은 거듭된 일제의 탄압과 나라잃은 울분을 달래기 위해 잠시나마 자연에 의지하고자 했던 선비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던것 같다.

 

제1곡 선암대仙巖臺

 

동계구곡의 시발지인 제1곡은 선암대仙巖臺이다. 선암대는 부석면 보계리 입구에 있는 선바위仙巖이다. 선바위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 왼편에 있는데 지금은 소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들이 덮고 있어 바위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에 ‘광릉동천廣陵洞天’ 4글자가 새겨져 있다.

 

一曲鑑湖問賀船 일곡이라 감호(감실)에서 축하하러 오는 배에 물으니

但看鷗鷺下晴川 다만 해오라기 비개인 시냇물에 내려 앉는다

幽人管領知何物 유인이 관리함이 무엇인지 알겠으니

朝浦雲霞暮渚烟 아침 포구의 구름 노을과 저문 물가의 연기일세

仙眞一去只空臺 선진이 한번 감에 다만 빈 누대이고

千載寥寥鶴不迴 천 년토록 고요하여 학이 돌아오지 않네

獨有淸溪巖上月 홀로 맑은 시내 바위 위로 달만이 오르니

不嫌塵累幾時來 티끌 세상에 찌든 이 몇번이고 오는것을 싫어하지 않네!

                                                                    [仙巖臺][用葛仙臺韻]

 

* 선암대는 이황의 「구대九臺」인 갈산대葛仙臺의 운韻을 사용함. 갈산대는 안동 도산陶山에 있다.

 

제2곡 호산대湖山臺

 

제2곡은 호산대湖山臺로 부석면 상석리 부석초등학교 상석분교 맞은편 들판에 있는 언덕으로 동소라 불린다. 바위에 ‘고산유촉孤山遺躅’ 4글자가 새겨져 있다. 호산대 주변은 원래 연못이었으나 경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거의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고 그 연못에서 물을 대던 논들만이 널따랗게 자리한다. 맞은편 마을에정자가 있는데 매학당梅鶴堂 김선金鍌의 정자이다.

 

二曲西湖湖上峯 이곡이라 서호의 호수 위에 봉우리 있으니

化翁移此獻奇容 조화옹이 기이한 모습 여기 옮겨 놓았네

登臨自有追先感 올라보니 스스로 선조 추모하는 감회 있으니

縷柳叢梅共萬重 실오리 같은 버들과 떨기 매화 수없이 피어 있네

爲愛蒼松植此臺 푸른 소나무 사랑하여 이 대에다 심으니

緬思吾祖好培栽 멀리 우리 선조 즐겨 가꾸기를 생각하네

如何未就明堂用 어찌하여 명당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獨保貞寒許不才 홀로 곧고 차거움을 지켜 재목이 되지 못하였나

                                                                 [湖山臺][用孝縏臺韻]

 

*호산대湖山臺는 이황의 「구대九臺」인 고반대考槃臺 운을 사용함. 고반대는 안동 도산陶山에 있다.

 

 

제3곡 회고대懷古臺

 

제3곡은 회고대懷古臺로 도탄에서 수사길 국도변(돌곶이)에 있는 바위이다. 국도의 왼편에 높다란 바위가 있는데 윗부분에 ‘회고대懷古臺’ 3글자를 크게 새겨 놓았다. 회고대 옆에는 정자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자는 무너지고 터만 남았는데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정자가 있었던 터마저 없어졌다. 회고대 맞은편에는 동계가 흐르고 있다.

 

三曲方池可一船 삼곡이라 작은 못에 배를 띄울 만 한데

巖西亭榭昔何年 바위 서쪽 정사는 몇 년이나 되었는가

如今暗記平泉事 이제 가만히 평천平泉의 일을 기억해보니

盡日尋芳獨自憐 온종일 꽃향기 찾으니 홀로 가련하네

更尋奇絶歷巇嶔 다시 기이한 절경를 찾아 험한 곳을 찾으니

不見古人想見心 고인은 보지못하나 그 마음 보길 생각하네

莫謂前程容易到 앞의 길이 쉬 이른다고 말하지 말아라

到頭方覺復高深 원두에 이르면 다시 높은 곳에 임함을 깨달으리라

                                                                   [懷古臺][用招隱臺韻]

 

*회고대懷古臺를 읊은 것으로 초은대招隱臺 운韻을 사용함.

 

제4곡 창고대蒼臯臺

 

제4곡은 창고대蒼臯臺로 부석면 우곡리 우곡교 근처 매암정 입구에 있다. 바위로 된 절벽이 동계에 임하여 있는데 오래된 소나무 몇 그루가 바위 위에 자라고 있다. 바위 아래 부분에 ‘사곡四曲’ 두 글자를 새겨 놓아 이 지점이 동계구곡 제4곡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굽이의 지형이 용의 모양이고 ‘사곡’이라 새겨 놓은 부분이 용두龍頭가 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굽이를 용두라고 한다. 우곡교에서 이 굽이를 바라보면 동계의 맑은 물과 창고대의 바위가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四曲蒼松繞翠巖 사곡이라 푸른 소나무 푸른바위을 두르니

許同癯鶴羽毛毿 여윈 학의 깃털을 함께하게 되었어라

亭亭不用凌霄志 우뚝 솟아 하늘 찌를 뜻 쓰지 않으니

下有淸陰滿碧潭 아래는 시원한 그늘이 있어 푸른연못에 가득하구나.

層巖峭壁十分危 층암의 가파른 절벽이 몹시 위태로워

危險窮時更有奇 위험스러운 것이 다할땐 다시 기이함이 있어라

奇絶無如平坦地 기이한 절경은 평탄한 곳과 같지 않으니

願君努力復深思 원컨대 그대 노력하고 다시 깊이 생각할지어다

                                                             [蒼臯臺][用凝思臺韻]

 

*창고대蒼皐臺를 읊은 것으로 응사대凝思臺의 운韻을 사용함.

 

제5곡 능운대凌雲臺

 

제5곡은 능운대凌雲臺로 부석면 우곡리 우수골 마을에 있는 바위이다. 구름에 닿을 듯한 대臺라는 이름처럼 동계 가에 높이 솟아, 흐르는 맑은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부석으로 가는 도로에서 과수원을 지나 산비탈을 올라가면 능운대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능운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동계의 맑은 물이 능운대를 굽이돌아 흘러간다. 현재 이 굽이의 경관은 동계구곡에서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능운대의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지점까지 작은 길이라도 낸다면 능운대의 가치가 더욱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이와함께 이곳에 동계구곡을 알리는 안내표지판도 함께 세워 관광자원화시키는 길도 모색해 볼만하다.

 

五曲愚溪轉入深 오곡이라 우계가 돌아 들어 깊어지고

春來物物感西林 사물마다 봄이 오니 서림西林이 변화하네

從今畏壘無憑問 이제부터 외루에는 찾는 이가 없어서

鞠草偏多傷我心 잡초가 두루 많으니 나의 마음 아프네

朝雲欲雨復爲霞 아침 구름은 비 내리려다 다시 노을이 되니

暎水翻成片片花 물 위에 비쳐 도리어 조각조각 꽃으로 피었네

如有漁郞今再覓 만약 어랑(어부)가 있어서 지금 다시 찾는다면

武陵源裏有人家 도릉도원 속에 사람 집이 있으리라

                                                                 [凌雲臺][用凌雲臺韻]

 

*능운대凌雲臺를 읊을 것으로 능운대凌雲臺의 운韻을사용함.

 

제6곡 풍영대風詠臺

 

제6곡은 풍영대風詠臺로 부석면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낙하암천)경계 지점에 있었다. 바람을 쐬면서 시를 읊고 돌아오는 대臺라는 뜻을 가진 풍영대(풍영대자리에는 정자가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아쉽게도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풍영대가 있었던 터가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모두 헐렸다. 도로 아래, 냇물 건너편 돌에 ‘풍영대風詠臺’라고 새겨져 있다.

 

六曲流霞問碧灣 육곡이라 안개 속에서 벽만을 물으니

樵人笑指白雲關 나무꾼이 웃으며 백운관을 가리키네

雲關未是靈眞境 백운관은 참되고 신령한 경계 아니나

松桂叢中意自閒 소나무와 계수나무 떨기 속에 뜻이 절로 한가롭네

臨風嘯咏碧山前 푸른 산 앞에서 바람 맞으며 휘파람 불고 시 읊조리니

濯盡煩襟臺下川 누대 아래 시내에서 모든 번뇌 모두 씻었네

緬思沂雩當日樂 멀리 기우沂雩 그때의 즐거움을 생각하니

未應深意在詩篇 깊은 뜻이 시편詩篇에 있음을 感應<느낌>하지 못했네!

                                                                          [風詠臺][用朗詠臺韻]

 

*풍영대風詠臺를 읊은 것으로 낭영대朗詠臺 운韻을 사용함.

 

제7곡 자하대紫霞臺

 

제7곡은 자하대紫霞臺로 영주시 부석면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낙하암천)에 있다. 제6곡 풍영대에서 물길을 따라서 약 2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암반으로 이루어진 굽이에 이른다. 암반 위로 동계의 맑은 물이 흘러가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든다. 바위 위에 ‘하암동천霞巖洞天’ 등 여러 가지 글씨가 있는데 그 옛날 이곳을 유람했던 선비들이 이 굽이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그 의미를 적어 놓은 것이다.

 

七曲經來七里灘 칠곡이라 칠리에 흐르는 여울을 지나오니

釣磯留與後人看 전인의 낚시터를 후인이 볼 수 있게 되네

一絲難得扶回力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힘을 얻기 어려우나

千載心期水月寒 천년 세월 마음엔 물에 비친 달을 두었네

丹霞流暎碧嵐光 붉은 놀을이 흘러서 푸른 남기 빛에 비치니

石碌巒回自一塘 돌이 많고 산이 둘러있어 절로 못이 되네

恨不隨看朝海處 바다 드는 곳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거늘

有誰知我此懷長 누가 나의 이 마음을 알아줌이 있으리오

                                                              [紫霞臺][用天雲臺韻]

 

*자하대紫霞臺을 읊은 것으로 천운대天雲臺 운韻을 사용함.

 

 

제8곡 옥간대玉澗臺

 

제8곡은 옥간대玉澗臺로 부석면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낙하암천)에 있다. 제7곡 자하대에서 물길을 따라서 약 55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동계 위로 놓인 잠수교에 이른다. 잠수교 우편 언덕 위에 자리하는 바위에 ‘팔곡八曲’ 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이 굽이가 제8곡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내 왼편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로를 내면서 바위 윗 부분이 잘려나갔지만 아래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바위 아래 부분에 ‘낙하동천落霞洞天’ 등의 몇 가지 글씨가 있는데 이 굽이의 경치를 표현한 말이다. 지금은 동계의 수량이 줄어서 맑은 물이 흐르는 옥간대를 체험할 수 없지만 그 옛날 맑은 물이 바위들 사이로 흘렀을 때에는 옥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八曲蘚苔掃不開 팔곡이라 이끼蘇苔는 쓸어도 쓸리지 않으니

故尋崖刻幾沿洄 바위 글씨 찾으러 얼마나 거슬러 올랐나

我心未是忘機久 내 마음 기심(변화)를 잊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猿鳥疑人去復來 원숭이와 새들이 사람을 의심해 오고 가네

虛汀來坐日如年 텅 빈 물가에 와서 앉으니 하루가 일 년 같고

澄慮誰非入定禪 생각이 맑으니 누구인들 선정에 들지 않겠는가

玉澗淙淙瑤韻古 옥간의 물소리는 아름다운 옛 노래이니

有懷千載徒嘐然 천년 세월 품은 마음이 다만 매우 크네

                                                                 [玉澗臺][用月瀾臺韻]

 

*옥간대玉澗臺를 읊은 것으로 월란대月瀾臺의 운韻을 사용함.

 

제9곡 명구대鳴璆臺

 

제9곡은 명구대鳴璆臺로 부석면 소천리 동산 근방에 위치한다. 제8곡 옥간대에서 물길을 따라서 약 4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소계韶溪와 문천文川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는데 이 굽이가 명구대이다. 이 굽이를 흐르는 동계를 소천韶川, 소계韶溪라고 하였는지 부석면소재지 주변의 지명이 소천이다. 이 굽이는 영주시 부석면 소재지기 때문에 개발로 인하여 지형이 많이 변해 그 옛날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시내의 서쪽에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이 명구대로 짐작된다. 소나무가 빽빽이 자라는 언덕은 동계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동계를 거슬러 올라온 유자遊者에게 가장 눈에 띄는 대가 아닐 수 없다.

 

九曲源頭意灑然 구곡이라 물의 근원에는 가진 뜻이 시원하고

韶溪西畔又文川 소계 서쪽 두둑(두들마을)에는 또 문천이 흐르고

移笻復向蓬萊渚 지팡이 짚고 다시 봉래蓬萊(봉래골) 물가 향하는데

不是仙鄕別有天 신선이 사는 곳은 별유 동천 아니라네

歲暮堪羞學少年 세모에 배우는 젊은이에게 부끄러우니

磵聲盈耳故催前 산골의 냇물 소리 귀에 가득 앞서길 재촉하네

師襄入海將璆去 사양師襄이 바다로로 경쇠를 가지고 갔나니

獨保希音水底懸 물 아래 있는 귀한 가락 홀로 지키네

                                                                   [鳴璆臺][用鳴玉臺韻]

 

*명구대鳴璆臺를 읊은 것으로 명옥대鳴玉臺의 운韻을 사용함.

 

3.동계구곡東溪九曲의 차운시次韻詩

 

동계구곡을 차운한 시는 3편이 보이고 있는데 춘고春皐 송인박宋寅鏷(1861~1946)의 ‘차동계구곡운次東溪九曲韻’과 소암小巖 김준용金駿鏞(1864~1934)의 ‘경차퇴도부자운김정산(동진)동계구곡敬次退陶夫子韻題金貞山(東鎭)東溪九曲’, 운강雲岡 송천익宋天翼(1878~1968)의 ‘경차동계구곡운敬次東溪九曲韻’ 등이 그것이다.

 

1)『춘고문집春皐文集』宋寅鏷 卷1詩 ‘次東溪九曲韻’.

 

송인박宋寅鏷(1861~1946)의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춘고春皐로 도봉에서 출생했다. 치와痴窩 송운찬宋雲燦에게서 경사를 익히고,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재 권연하의 문하에서 위기실천爲己實踐의 학문을 배웠고, 뜻을 같이한 선비들과 향음례鄕飮禮를 강정하기도 했다. 저서로 『춘고문집春皐文集』이 있으며, 김회진이 행장을, 권상용權相用이 묘명을 지었다.

 

2)소암실기小巖實紀』金駿鏞 卷1詩 ‘敬次退陶夫子韻題金貞山(東鎭)東溪九曲’.

 

김준용金駿鏞(1864~1934)의 자는 덕언德彦이며, 호는 소암小巖이다. 두규斗奎의 아들로 동호東湖 서재정徐在正 문인이다. 1908년(융희 2) 김동진金東鎭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강회講會를 베풀었고, 소수서원장이 되어 유학儒學 진흥에 힘썼다. 저서로『소암집小巖集』이 있다. 김동진이 행장을 짓고, 참판 이병관李炳觀이 묘명을 지었다.

 

3)운강유집雲岡遺集』宋天翼 卷1詩 ‘敬次東溪九曲韻’.

 

송천익宋天翼(1878~1968)의 자는 계옥啓玉이며, 호는 운강雲岡으로 도봉에서 출생했다. 영특한 자질로 태어나 정산 김동진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학덕과 효행이 겸비하여 소수서원장紹修書院長을 중임 하였고, 순흥 향내 수향장首鄕長을 다년간 역임하면서『운강유집雲岡遺集』을 남겼다. 김설(정산의 둘째아들)이 행장을 지었고, 이지복李址馥(안동 소흐리의 한산이씨)이 묘명을 지었다.

 

글을 나오며

 

동계구곡東溪九曲은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일제강점기인 1918년 영주시 부석면 도탄리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동계東溪의 하암霞巖에서 선암仙巖까지의 아홉곳을 설정하고 경영했던 구곡원림九曲園林이다.

김동진은 이미 1890년 봄에 동계東溪의 풍광이 좋은 6곡인 풍영대風詠臺에 벗들을 초대하여 계契를 만들고 매년 꽃피고 경치가 아름다울때 이 대臺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는 등 낙하암천인 동계東溪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김동진은 1904년 주자朱子의 무이정사 고사에 의하여 동계東溪에 위치한 매학당梅鶴堂에서 향약鄕約을 실행하고 다섯분의 성인과 여러 현인 및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등 주자朱子를 흠모해왔다. 이러한 바탕위에 김동진은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동계東溪에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경영하게 되었다.

 

구곡명

위 치

각자刻字

퇴계의 구대

1곡

선암대仙巖臺

보계리 선바위 마을 입구

갈산대葛仙臺

2곡

호산대湖山臺

상석초등 맞은편 들판 언덕(동소)

고산유촉孤山遺躅

고반대考槃臺

3곡

회고대懷古臺

도탄에서 수사길 국도변(돌곶이)

회고대懷古臺

초은대招隱臺

4곡

창고대蒼臯臺

우곡리 우곡교 근처 매암정 입구

4곡

응사대凝思臺

5곡

능운대凌雲臺

우곡리 우수골 마을 뒷편

능운대凌雲臺

6곡

풍영대風詠臺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낙하암천)

풍영대風詠臺

낭영대朗詠臺

7곡

자하대紫霞臺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낙하암천)

하암동천霞巖洞天

천운대天雲臺

8곡

옥간대玉澗臺

우곡리와 소천리 경계(낙하암천)

8곡,낙하동천落霞洞天

월란대月瀾臺

9곡

명구대鳴璆臺

부석면 소천리 동산 근방

명옥대鳴玉臺

 

 

이후 김동진은 동계東溪의 아홉 굽이를 설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운과 이황의 「구대九臺」 운을 가지고 아홉 굽이의 경관을 시로 읊었다. 구곡원림을 읊은 구곡시는 주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운만을 차운하여 짓는 것이 관례인데 김동진은 이황의 「구대九臺」를 차운하여 한 수씩 더 지었다. 김동진이 동계구곡을 읊은 이후 소암 김준용 등 몇몇 선비들이 차운을 쓰기도 했다.